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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23화 (123/288)
  • 123화

    보물(8)

    얼마 전 낭인들과 함께 그들을 습격했던 적룡창 배규였다.

    물론 얼굴에 복면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애당초 창을 쓰는 절정의 고수는 드물다. 만약 배규가 정말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자 했다면 철창이 아니라 검이나 도를 들고 왔어야 한다.

    명정 신니가 그의 말에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제법 길어지는 대화. 마침내 명정 신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다. 거기 해랑검, 그리고 혈운검이 스스로 무공을 폐하고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리기 위해 관으로 따라온다면 나머지 제자들의 목숨은 보장하마.”

    “개소리!!”

    해룡방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소리쳤다.

    밤송이처럼 빽빽하게 수염이 난 사내였는데 어깨를 칭칭 감은 붕대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먼저 사숙을 죽여 원한을 만든 것은 명정 신니 그대가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손속에 자비를 베풀어 그대들을 살려두었건만. 문파가 약해진 틈을 타 이런 습격을 가해오다니. 정파라는 작자들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자비? 지금 그 입으로 감히 자비를 운운하였느냐?”

    명정 신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쾅!!

    분에 못 이긴 듯 석장을 내리찍는데 땅이 울리는 것이 그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를 짐작할만했다.

    “어이쿠, 신니. 참으로 힘이 좋으신 것이 산에서 좋은 것만 드셨나 봅니다.”

    “이놈이 감히? 실로 방자하구나. 하지만 내 너의 할애비 얼굴을 봐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다. 이번 일은 우리 보타암과 해룡방의 은원에 관한 일이니, 외부인인 너는 더는 상관하지 말아라.”

    남궁철이 씨익 웃었다.

    “아쉽게도 제가 외부인이 아니라서 말이죠.”

    “외부인이 아니라고?”

    “네, 제가 조 소저와 혼인을 약조했으니 지금 신니께서 무공을 폐하라 말씀하신 혈운검께서는 저의 장모님이 되십니다.”

    “혼인?”

    명정 신니의 눈동자가 떨렸다.

    해룡방의 잡졸들이라면 이미 끈 떨어진 연 신세이니 무서울 것도 없다. 하지만 남궁 세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는 초절정의 고수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타암을 단신으로 올라왔던 파검을 통해 뼈저리게 깨우쳤다.

    ‘신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검왕은 이번 일에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애당초 검왕은 저 혼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검왕이 파검을 얼마나 싫어했었는지를요.’

    적룡창 배규가 명정 신니의 마음을 읽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 맞아. 검왕도 파검을 싫어했어. 어쩌면 나만큼이나. 하지만 혹시라도 이번 사태를 통해 뭔가 달라졌다면?’

    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초절정 고수에 대한 두려움은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화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단신으로 보타암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초절정 고수다.

    적룡창 배규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게다가 신니, 공공께서 약속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검왕은 이제 남궁 세가의 태상 가주이기 이전에 무림맹의 맹주입니다. 남궁 세가의 흥망이 달린 일이라면 또 몰라도, 고작 소가주의 처가. 그것도 그가 싫어하는 파검 가문의 복수를 위하여 사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명정 신니의 시선이 해룡방을 훑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해룡방 방도들의 시선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해적들로 인해 멸망한 마을의 생존자였던 그녀의 제자는 첫 강호행에서 남해의 해적무리를 쳐부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어린 해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해적무리는 그보다 더 잔인한 것을.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조차 지겹다.

    그래, 어차피 강호란 이러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은원은 얽히고설켜 어느것이 선이고 어느것이 후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모든 은원을 종결짓겠다.

    “해랑검, 그리고 혈운검은 어서 스스로 무공을 폐하라. 너희가 말하는 파검의 자비는 여섯의 무공과 한 사람의 한쪽 팔이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모든 은원은 그것으로 거두겠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베푸는 자비다.”

    “자비? 신니께서는 아무래도 자비라는 단어를 잘못 배우신 듯 하군요. 어차피 말로는 끝나지 않을 자리. 이 공모가 신니의 손속을 감당해보겠습니다.”

    “흥, 해랑검. 청어람은커녕 푸른 빛조차 띄지 못한 애송이가 감히 나를?”

    “내가 청어람이었다면 신니께서는 이 자리에 계시지도 않았을 테니,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시지요.”

    “건방진!!”

    해랑검 공조가 자신의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파리한 안색의 혈운검이 자신의 검을 쥐고 공조 옆에 섰다.

    “혼자는 힘들 것 같은데?”

    “함께 해준다면 나야 든든하지.”

    남궁철이 한걸음 뒤로 빠지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운호에게 물었다.

    “저자, 적룡창 배규인 듯하다. 괜찮겠느냐?”

    운호가 웃었다.

    “여기서는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안 괜찮다고 말하면 형님이 목숨 걸고 덤비실 생각 아닙니까.”

    “크흠, 아니 뭐 목숨까진 아니고. 설마 이렇게 공공연한 장소에서 남궁세가의 장자를 어찌하겠느냐?”

    “목숨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몇 년은 요양해야 하게 만들 수는 있지요. 경지를 앞두고 계신데 지금 퇴보하면 무인으로는 목숨을 잃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운호가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소신검, 설마 끼어들 생각인가? 남궁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대는 외인이다. 게다가 구대문파와 보타암의 관계를 모르지는 않겠지?”

    명정신니가 소리쳤다.

    “글쎄요. 아쉽게도 그 남궁철이 제 의형 되시는지라. 게다가 외인이라면 그 쪽도 마찬가지 인 것 같은데요.”

    운호의 검극이 적룡창 배규에게 향했다.

    “이 자는······.”

    “적룡창 배규. 아닙니까? 그러고보니 이상하군요. 신니께서는 문파간의 오랜 은원을 말씀하시는 데, 불과 며칠 전 재물을 훔치러 왔던 도적놈과 함께라······.”

    “소신검!! 지금 감히 보타암을 모욕하는 것이냐. 화산에서는 그리 가르치던가.”

    “글쎄요. 만약 화산에서는 만약 본문의 문도가 도적과 어울렸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이에게 화산을 모욕하지 말라며 화를 내는 대신, 일깨워줬음을 감사하라고 가르치긴 합니다.”

    “이이익!!”

    명정 신니의 얼굴, 아니 얼굴을 넘어 머리 전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신니, 저 어린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진정하시죠.”

    적룡창 배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린놈이 참으로 입이 맵구나.”

    “늙은이의 뻔뻔함이야말로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간 것이 며칠 전이라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복면을 두르고 나타나셨습니까. 그래.”

    “글쎄,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도통 모르겠군.”

    “적룡창 배규. 지금 그런 눈 가리고 아웅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글쎄, 적룡창 배규가 누군지, 왜 나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소신검은 설마 그자가 상대라면 이길 수 있다 생각하여 나선건가?”

    백운호가 피식 웃었다.

    “그저 변방에서 창이나 좀 휘두르며 자기가 뭐라도 됐다고 착각하던 늙은이 따위 우습지도 않다.”

    “뭐라고?”

    “설마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화를 내주는 건가? 공감 능력이 참으로 뛰어나군.”

    마침내 배규가 말을 섞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본인의 성명 병기인 적룡창 대신 시커먼 철창 하나를 뽑아들었다. 국법에 따라 여덟 자 이상의 창은 금지되어 민간에서는 적룡창 만한 창을 구하기 힘들었을 터인데, 아무래도 어딘가 무림인이 몰래 들고 다니던 조립식 창인 듯 보였다.

    -운호야. 조심해라.

    만병의 왕은 검이다.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가 존재했다.

    이 땅에 통일 제국이 들어선 것은 약 1700년 전. 당시 최초의 황제가 국가가 아닌 호족의 병기 길이를 여덟 자로 규정했다.

    본래 기술의 발전은 환경을 따라간다. 이후 중원의 무학은 창이 아닌 검. 그리고 도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산중의 도가 문파들은 검에 여러 가지 철학과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려 17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천재들의 손을 거쳐 발전했다.

    1,700년. 그래, 무려 1,700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창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민간에서 검과 도를 중심으로 무학이 발전했다면, 관. 특히 군에서는 여전히 창을 중심으로 무학이 발달했다. 다만 군은 어디까지나 효율적으로 적을 살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 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창을 가장 잘 부리는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가장 잘 부리는 사람이다.

    한쪽은 평생을 검을 궁구하며 오직 그 발전에 힘을 썼고, 또 한쪽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재 만병의 왕은 검이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일장이 훌쩍 넘는 저 장창.

    저것은 그 길이만으로도 보통 무림에서 상정하는 범위를 벗어난다.

    물론 검을 휘두르는 무인, 특히 절정의 경지에 달한 무인은 이미 그런 것 정도는 구애받지 않을만한 고수다. 하지만 문제는 저 창을 휘두르는 사람 역시 같은 경지의 고수라는 점이다.

    -피융

    먼 거리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찔러온다.

    생소하다.

    하지만 적의 간격이 넓다면 자신의 간격으로 들어가면 된다. 보통은 육장을 휘두르는 자들이 검을 쓰는 이를 상대할 때 쓰는 방법이지만,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운호가 검을 들어 그 공격을 빗겨냈다. 검신을 타고 비껴가는 창. 운호의 몸이 순식간에 두 걸음 접근했다.

    생각보다 너무 쉽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운호가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예상대로다.

    비껴 나간 창이 순간 낭창하게 휘어졌다. 강철로 만든 창이라고 믿기 힘든 탄성. 묵직한 창대가 운호의 옆통수를 노렸다.

    -부웅

    빠른 회피.

    하지만 끝이 아니다. 이것으로 다시 적룡창이 공세를 되찾았다. 스르륵 빠르게 창이 회수된다. 몸을 당긴 것일까? 아니다. 무슨 수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운호의 이기어검처럼 벌려진 손아귀 사이에서 창이 스스로 움직인다.

    공세를 피하느라 자세를 낮춘 운호를 향하여 적룡창의 창이 다시 폭발하듯 쏘아졌다. 이미 한차례 보여준 움직임이라는 것일까? 이번에는 그 낭창한 움직임을 처음부터 활용했다.

    창끝이 요란하게 흔들린다.

    ‘쳇.’

    운호가 빠르게 뒤로 세 걸음 빠져나왔다.

    처음보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뒤로 멀어졌다.

    “소신검, 소신검 소문은 자자하더니. 별것 아니구나.”

    의기양양한 목소리.

    운호가 화를 내는 대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한걸음에 그토록 신이 난 것을 보니 노인장을 기쁘게 하는 일은 참으로 쉽겠군. 자, 여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더 크게 기뻐해 보는 것은 어떤가?”

    운호가 실제로 크게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서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눈가에는 조롱과 경멸이 가득하다.

    “이······, 이놈이 감히?”

    적룡창이 운호에게 쏘아졌다.

    -하, 이놈 이거. 남궁철 녀석과 어울리더니 나쁜 물이 아주 잘 들었구나.

    그리고 파검이 크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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