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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122화 (122/288)
  • 122화

    보물(7)

    남궁철은 이 년 전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현시, 부시, 원시 향시를 모조리 장원으로 통과하고 거인에 선발된 기재 중의 기재였다. 일반적으로 원시를 통과하면 수재(秀才)가 되는데 수재만 되도 부역과 공량이 면제되고 관원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다.

    물론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라. 우물 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으니 무림인들이 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들어간다면 현재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운호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되는 신분은 남궁철 하나뿐이다.

    아무튼 본인 입으로 워낙에 자주 이야기하고 다녀 조금 빛이 바래는 감이 있긴 했지만, 남궁철은 안휘성 백 년만의 천재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동생, 내가 그 팔고문이라 하여 고루한 문장들을 공부하며 종종, 아니 매일 이런 생각을 했었지. ‘내가 살면서 이딴 것을 대체 언제 또 쓰겠다고 이러고 있는 건가. 학당에서 괜히 나의 천재성을 드러냈구나. 차라리 적당히 못 하고 말 것을.’ 헌데 지금 이렇게 그 공부를 사용할 기회가 이렇게 찾아오니 참으로 반갑구나.”

    조금도 변함없는 입담이었다.

    운호는 의형의 이런 모습이 참으로 반가웠다. 물론 무한에서의 일이 있기 전과 비교하면 어딘가 모르게 얼굴에 그늘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운호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만한 일을 경험하고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봤을 때는 이 부분은 글자 자체를 틀린 것 같더구나. 뜻이 통하지 않아. 아마도 이건 박(博)이 아니라 전(傳)인 듯하다. 단순히 검초를 넓게 펼치는 것보다는 그 이후로 연결하기 위한 동작이 아닐까?”

    그 부분은 박(博)이라고 봐도 당장은 딱히 크게 틀려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박(博)과 마찬가지로 전(傳)이라는 글자에도 널리 편다. 퍼트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퍼트린다는 글귀가 단순히 그 초식 하나를 위함이 아닌, 후속 초식을 위한 사전 동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는 순간 검술 전체의 흐름이 달라진다.

    남궁철의 이야기에 운호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형님, 정말 자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셨던 거군요. 사람이 달라보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처음에는 진짜 깜짝 놀랐었다니까. 와, 남궁 공자가 정말로 배운 사람이었구나. 뭐 그런 느낌?”

    두 사람의 놀림에 남궁철이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로구나. 하, 내가 만약 남궁세가의 장자만 아니었더라도 아마 지금쯤 황제 앞에서 술을 한 잔 받고 있지 않았을까? 뭐 우리 고향집 앞에는 장원방도 하나 세워졌겠구나. 지금 너희는 그런 귀한 분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광인 줄 알아라.”

    그 뻔뻔한 발언에 운호와 강아현이 두손두발을 모두 들었다.

    “그보다 외인에게 이렇게 막 공유를 해도 괜찮은 것이냐?”

    “형님이 어디 외인입니까? 게다가 초식 전체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해석만을 여쭙는 것인데요. 어차피 형님이 이걸 어디 유출하실 것도 아니고 말이죠.”

    “흐흐흐, 과연 그럴까?”

    “흐흐흐, 네 과연 그럴 듯 합니다.”

    “쯧, 재미없기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구나.”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몇 가지 막히는 부분들에 대하여 의견을 나눴다. 그렇게 비급의 제대로 된 해석이 이어지자 파검 역시 입을 열었다.

    -오호라, 이제 말이 되는구나.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그래, 얼핏 추측되는 부분이 있다. 자세한 동작은 오늘 밤 보여주도록 하마.

    파검은 맨땅에서 일가를 이뤄낸 검의 대종사다. 비록 살아있을 적의 번뜩이는 창의성은 모조리 잃어버렸지만, 그 견식만큼은 여전했다.

    부상자들로 인하여 그리 빠르지 않은 이동속도는 문제였지만 적어도 난풍검(亂風劍)의 해석에 관해서는 운호와 아현 둘이서 머리를 맞대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진행됐다.

    “후, 조금 편하게 가는가 싶었더니.”

    “왜? 무슨 일이야?”

    운호의 한숨과 함께 무리를 이끌던 해랑검 공조가 소리쳤다.

    “적습이다!! 모두 자세를 갖추어라.”

    화살을 날리며 기습해왔던 낭인 무리와는 달랐다. 저 멀리, 자신의 기세를 거칠게 자랑하며 접근해온다. 그 기운의 강대함이 사뭇 놀랍다. 절정 가운데 이만한 기운을 뽐내는 이를 떠올려본다. 쉽지 않다. 종남의 장문인 순양검 적하. 혹은 화산 일대 제자를 대표하는 고수인 외당주 굉명 정도? 이대 제자의 범주를 넘어섰다 평가받는 현무자조차 저만한 기세를 뿜어내지는 못한다. 그야말로 초절정의 경지를 한 발 앞에 두고 있는 고수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은 그 마지막 한 발자국을 떼는 일이지. 거기까지 간 고수가 어디 한둘이더냐.

    하지만 그런 고수 조차 절세의 경지에 올랐던 고수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일까? 파검이 코웃음을 쳤다.

    인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부상자는 가장 안쪽으로, 낭인들을 가장 바깥으로. 그리고 해랑검 공조가 가장 앞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남해의 신니께서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도적놈들을 징치하는데 거리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머리를 파르라니하게 깎은 늙은 비구니가 거대한 석장을 쥐고 나타났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일반적인 노인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펑퍼짐한 가사로도 숨겨지지 않은 장대한 기골. 각진 얼굴에는 고집이 가득하다.

    “도적놈이라니요? 대체 누구를 찾아오신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군요. 아, 혹시 여기 이 낭인들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라면 이미 그 나름의 대가를 치뤘습니다.”

    “흥, 모르는 척 의뭉 떨지 말아라. 이 자리에 도적놈이 너희 해룡방 말고 또 있더냐.”

    크게 호통치는 비구니를 바라보던 남궁철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남해 보타암의 명정신니다.”

    “명정신니요? 아니, 보타암에서 대체 왜?”

    -내가 살아있을 때는 감히 보타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던 계집 주제에!!

    남궁철이 운호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서둘러 해랑검 공조의 곁으로 다가갔다.

    “보타암과 해룡방의 관계 때문이지.”

    “뭐야? 설마 아현이 너도 아는 이야기야?”

    “당연하지. 보타암과 해룡방의 악연은 강호에서도 유명하잖아.”

    보타암 명정신니의 제자가 협행을 위해 남해의 해적단을 소탕하다 사망했는데, 훗날 명정신니가 직접 출두하여 제자의 복수를 하고 보니, 그 해적이 해룡방에서 무공을 사사한 자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남해는 본래 해적과 어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보타암의 제자를 죽인 아이는 해적도 아니었다. 아비가 해적이었다고 하여 어찌 그 자식까지 무작정 해적으로 몬단 말이냐.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까지 묻겠다는 자들이 동생을 죽였다. 자기 죄의 댓가로 죽은 아비의 원한은 모르겠으나 아무 죄가 없는 어린 동생의 원은 갚는 것이 당연하다.

    명정신니가 소리쳤다.

    “해적인 아비가 벌어온 식량을 먹고 자라나, 해적이 될 아이였다. 국법으로도 그런 아이들은 씨를 뽑아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신니, 그 일은 파검 대협이 보타산을 오르는 것으로 이미 다 끝난 일이잖습니까.”

    “다 끝나? 누구 마음대로. 게다가 너는 또 누구더냐? 행색을 보아하니 해룡방의 망종은 아닌 것 같은데?”

    남궁철이 포권례를 했다. 언제나 느끼지만 입을 다물고 저런 행동만을 보여줄 때는 정말이지 명가의 자제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안수해원검. 남궁철이라고 합니다.”

    “남궁세가? 흥, 이 일은 보타암과 해룡방간의 문제이니 남궁세가에서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럴리가요. 강호의 은인인 파검 대협의 가문이 곤란에 쳐했다고 하는데, 그 은혜를 입은 남궁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흥, 파검이 강호의 은인이라니. 그야말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로구나. 뭐 얻어먹을 것 없나 구경 갔다가 얼떨결에 말린 거겠지.”

    남궁철이 고개를 저었다.

    “일의 경위야 무슨 의미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결과이지요. 그보다 보타암과 해룡방의 은원은 파검 대협이 홀로 보타산에 오른 것으로 끝났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습니까?”

    명정 신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헛소리.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검 좌부원 개인과 보타암간의 은원이었다. 해룡방과 보타암의 은원은 별개다.”

    “억지십니다.”

    해랑검 공조의 외침에 명정 신니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억지? 억지는 파검 그 작자가 보타암에 올라와서 했던 짓이 바로 억지다. 너희는 억울해 할 것이 없다. 그 작자가 말하지 않았더냐. 주저리주저리 대의를 떠들어봤자 강호의 논리는 힘이라고. 그래, 그때는 우리 보타암이 힘이 없어 당했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 해룡방은 어떤지 한 번 보자꾸나.”

    그야말로 묵은 원념으로 가득한 외침.

    ‘노사,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니······,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나선 건 저쪽이 먼저였다. 한 대 맞았으니 갚아줘야지. 게다가 그쪽에서 먼저 일대 제자들을 모조리 꺾으면 사과를 하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설마 일대 제자들을 모조리 때려 눕히셨던 겁니까? 설마 사람들을 상하게 한 건 아니시죠?’

    -크흠, 아니 다른 계집들은 몰라도 명화는 좀 힘든 상대였던지라······.

    ‘죽이셨던 겁니까?’

    -아니, 그냥 팔만 하나······.

    ‘왼팔?’

    -아니 오른팔······.

    아, 이건 어떻게 말을 해도 무조건 싸움이 이뤄질 수밖에 없겠구나.

    운호가 각오를 굳히고 검을 쥐었다.

    “아현아, 넌 보타암과도 해룡방과도 아무런 은원이 없으니 끼어들지 마.”

    “뭐라고? 하지만!!”

    운호가 아현의 대답을 듣는 대신 몸을 날려 남궁철 옆에 섰다.

    명정 신니의 시선이 잠시 운호를 훑었다. 저 아이가 바로 소신검인가? 인상적이다. 강호의 소문은 칠 할은 걸려들어야 했지만, 저 소신검이라는 아이는 오히려 소문보다 더하다.

    남궁철이 명정 신니에게 물었다.

    “신니, 그래서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설마 여기서 해룡방을 몰살이라도 시키실 요량입니까?”

    “흥,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하지만?”

    명정 신니의 잔혹한 눈빛이 해랑검 공조. 그리고 저쪽에 모여있는 해룡방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 해적 놈과 동문수학 했던 자들이 모두 자결한다면 아직 어린아이들의 목숨 정도는 살려주마.”

    “신니!! 그 무슨 잔혹한 말씀입니까.”

    “업어 키운 제자는 해적의 손에 죽어버렸고, 그 복수를 했다는 이유로 나의 사매 가운데 무려 여섯이 무공을 잃었으며 보타암의 현재이자 미래였던 명화 사저는 검을 쥐는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내가 잔혹하다고?”

    ‘영감님?’

    -크흠, 아니 거 너무 옜날 일이고. 약한 애들은 잘 기억이 안나서······.

    파검이 보타암에 오른 것은 유명했지만, 그 자세한 내역은 강호에 알려진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처참했던 그 결과에 남궁철을 비롯한 해룡방 사람들 역시 적지않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궁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이대로 어느 한쪽이 끝날 때까지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디 불가의 자비를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바로 그때 명정 신니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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