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보물(6)
“운호야!!!!”
“그 입 다물거라.”
“그 입 다물거라. 운호야아아!!!”
“이 놈이 감히!!”
-쾅!!
파검의 검이 사납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사실 모든 일의 시작은 파검의 입놀림이었다.
‘여기 화산파의 삼대 제자이자, 황실 금의위 북진 교위. 소신검 운호가 나의 의형과 강호의 은인인 파검 대협의 후예를 도우러 왔다. 누가 감히 나의 검을 상대하겠느냐!!’
40년 전 자신이 한참 전장에서 활동할 때도 쉽게 하기 힘든 낯부끄러운 말이다. 게다가 강호의 은인이라니.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낄낄 웃던 파검에게 운호가 던진 말이 바로 저 ‘운호야!!!’였다.
이미 우화등선 하여 세상의 명리를 초탈하였으니 특별히 가족에 미련은 없다. 라고 말하던 양반이 딸내미가 조금 위험해지는 것 같아지자마자 ‘운호야!!’를 외쳤으니 그 역시 부끄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렇듯 낭인들과의 일전은 두 사람에게 씻기 힘든 부끄러움을 남겼다.
파검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가 북방에서 달자들과 싸우던 시절 주로 사용하던 가장 실전적이며 거친 형태의 파랑검이다. 바닥을 내려찍은 장검이 마치 본래 바라던 것이 그것이었다는 듯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빠르게 쇄도했다.
“웃차!! 너무 뻔합니다.”
운호의 몸이 반 바퀴 돌았다.
하지만 그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손을 벗어나 파검의 몸을 찔러 들어갔다. 몸 뒤에 숨겨져있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검.
-챙!!
파검 역시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그 검을 막아냈다.
“뻔한 건 너도 마찬가지지.”
두 사람이 검을 맞댄 지도 벌써 오 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과거 증무진인 목운평과 검을 나눌 때는 종종 운호 자신, 혹은 운호 자신의 미래와 검을 나누는 느낌을 받았었다.
동일한 내공, 동일한 검술을 나누는데 다른 것이라고는 오직 경험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파검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운호와는 전혀 다른 검술을 사용했다. 화산의 검술은 아주 오랜 시간, 도가의 철학 위에 쌓아 올려진 전통 있는 무학에 증무진인 목운평이라는 희대의 천재가 더해진 결과물이다.
그에 반해 파검 좌부원의 무학은 검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시골 문파의 그것을 바탕으로 좌부원이라는 천재가 사선을 넘나들며 수없이 많은 실전을 통하여 완성한 검술이다. 그 궤가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단순한 횡베기조차도 사뭇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힘을 주는 지점, 순간, 주로 사용되는 근육. 모든 것이 다르다. 어느것이 더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과 환경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화산에서 나고 자란 검술과 남해의 거친 파도에서 태어나 북방의 엄혹한 바람을 쐬고 자란 검술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완벽하게 다른 궤적을 가진 검술들이 지금 운호와 파검의 격검을 통해 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동작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이미 수만 번의 고련을 통하여 완벽하게 익은 동작이다. 그의 근육이, 기맥이, 신경이. 그리하여 정기신 일체가 그 동작을 수행하기에 최적화되어있다.
그저 운호는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파검이라는 시대의 거인이 어떤 길을 걸어 어떻게 성장하여 그 끝에 다다랐는가. 다만 지금 몽원경의 파검은 그 끝을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운호의 머릿속에서는 별빛이 되어 떠나가던 파검의 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지금의 파검과 그 별빛이 되어 떠나버린 파검 사이에는 거대한 결락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 거대한 결락은 운호의 압도적인 이해력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다는 점 정도다.
-콰아앙!!!
강철과 강철의 부딪힘.
파검의 얼굴에 흥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목운평과는 다르다. 몽원경에서 목운평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생각해보니 감정을 보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권태, 혹은 분노였다. 이것은 혼원단의 약효 덕분일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백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백(魄)에게 풍화되지 않은 마지막 감정은 분노뿐이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막상막하의 싸움.
운호의 매농검이 빈틈을 드러냈다. 일곱 번째 수에서 그것 이상의 이득을 찾아올 수 있는 길이다. 파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검은 감각적이며 즉흥적이다. 매농검이 파둔 함정을 언제나 성큼성큼 치고 들어온다.
검격이 이어진다.
수확의 시기다. 저릿한 손끝으로 운호의 검이 파검의 심장을 노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희뿌연 액체가 운호의 얼굴을 향해 날아온다.
침이다.
명가의 검객에게는 그야말로 기겁할만한 행동이었지만 파검은 거리낌이 없다. 우화등선을 하던 시절의 파검을 생각하면 이럴 것 같지 않았는데, 젊은 시절, 절정 지경의 파검은 조금 달랐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놀랍다. 절정이라 함은 어딜 가건 제법 크게 행세하는 고수라는 뜻인데, 저자의 삼류들이나 할법한 행동을 함에 꺼리김이 없다니.
심지어 그냥 얼굴에 맞아주고 공격을 계속 하기도 힘들다. 침이 향하는 방향이 실로 절묘하다. 눈을 감던지, 고개를 흔들어 피해야 한다. 결국 검 끝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철푸덕
머리를 살짝 움직여 이마로 받아낸다. 쓸데없이 내공이 실린 침방울이 제법 따갑다. 그 사이 파검은 가슴에 스친 검흔을 남긴 채 절묘하게 몸을 돌려 운호의 검을 피해냈다. 이제 또 다시 파검의 공격이 이어진다. 돌아나온 몸의 회전력을 그대로 활용하여 운호의 왼쪽 머리를 노리고 검이 날아든다.
-부웅
운호가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몸을 눕혔다. 코끝을 스쳐가는 검극이 날카롭다.
미처 피하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나부낀다. 동시에 운호의 발끝이 바닥의 모레를 흩뿌렸다. 마찬가지로 내공이 실려 기세가 제법 날카롭다.
-퍼버벅
하지만 파검은 피하지 않는다. 표피에 박힌 모래알들이 몽실몽실 핏방울을 만들어냈다. 공세를 잡은 파검은 마치 파도가 끊기지 않는 것처럼 그저 공세에 공세에 공세를 이어간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딪히고 부딪히고 부딪히는 격검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싸움을 결정지은 것은 다름 아닌 내공이었다.
-쾅!!
“헉헉, 젠장할. 여기까지다. 오늘은 그만하자.”
파검이 먼저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 쥐꼬리 같은 내공이로구나. 이래서야 뭐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겠군.”
피로 물들어있던 파검의 전신이 어느새 멀끔하게 치유된다. 그 비정상적인 모습이 이곳이 현실이 아닌 몽원경임을 인지하게 했다.
“나도 이런저런 지원 못 받고 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뭐 기껏해야 십칠 년 정도인가? 내가 갓 절정에 올랐을 때의 절반도 되지 않는구나.”
“그래도 똑같은 조건이잖습니까.”
“똑같은 조건은 무슨. 적은 내공으로 최대한 효율을 발휘하게 설계된 무공과 그렇지 않은 무공의 차이지.”
“하지만······.”
“아, 됐다. 그놈의 증무 진인 이야기라면 꺼내지도 말아라. 그 양반이야 무공 자체가 너와 완전히 같은 거 아니냐. 그러니까 오히려 너보다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었겠지. 뭐, 어쩌면 체질 자체가 너와 비슷했을 수도 있고. 게다가 덕지덕지 제약은 또 뭐 이리 많은지.”
과거 증무진인과의 비무에서 그 끝은 보통 운호 자신의 몸에 검이 꽂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무의 육 할 정도는 이렇게 파검의 내공이 다하여 끝나고 있다.
“어쨌거나 이걸로 87승 61패로군요.”
“헛소리. 네 놈의 비루한 내공 덕분에 내 절세의 신공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 못 한 것을 어떻게 패배라고 한단 말이냐. 네 놈의 검이 나에게 제대로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 몸의 61승 무패라고 봐야지.”
“아니, 그게 어떻게.”
운호가 눈을 떴다. 절묘한 순간이었다.
“하, 이 양반이 진짜······.”
다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유치함에 운호가 피식 웃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가볍다.
이것 역시 증무진인과 함께 수련할 때와 다른 점이다. 초반에는 조금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확실하게 느낀다. 몽원경에서 얻은 상처, 혹은 사망은 현실과 완전히 무관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 그곳에서 얻은 상처는 현실의 운호에게 흔적을 남긴다.
과거 증무진인과의 비무는 거의 대부분 운호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지, 아니면 그 사망으로 끝났기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검과의 비무에서는 거의 6할 가깝게 그런 일 없이 비무를 끝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를만한 부상을 입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차이는 확연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정신적인 피로인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혼백의 상처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파검 좌부원의 말에 따르자면 그 역시 이 공간의 단순한 사용자일 뿐이라고 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선계에 오를 당시의 그 역시 깜짝 놀랐을 뿐,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덧붙였다.
자소공으로 토납을 하고, 포원공으로 운기를 했다. 어느 순간 강아현 역시 조용히 옆에 와서 수련에 동참했다.
자소단의 약효 덕분일까? 청정도량이 아닌 관도 근처의 황무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왕성하다. 이대로라면 이십 년 내공 수위까지는 금방 달성할 듯싶었다.
“운호야.”
“응?”
“요 며칠 계속 막히던 부분 있잖아. 그거 풀어낸 것 같아.”
“풀었다고? 어떻게?”
난풍검은 지극히 난해한 검결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글자의 해석만 어찌어찌해낼 수 있다면 광음검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제법 큰 문제가 존재했다.
증무진인 목운평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광음검을 깨달을 때는 목운평의 세세한 지도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목운평이 던져준 사소한 이야기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목운평이 운호의 몸을 사용하여 펼쳤던 그것이 아니었다면 운호는 여전히 광음검의 오의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풍검은 거기서 한 술을 더 떴다.
그들은 비급을 잡고 씨름을 하는 것으로 글귀만으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한 문파에서 무공이 실전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아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중원의 한자는 표의문자다. 글자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글자에 너무 다양한 의미가 담겨버렸다는 점이다.
게다가 운호가 믿었던 다른 구석인 파검 좌부원은 놀라울 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화산의 무학은 도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좌부원은 경지를 넘어선 고수였다. 그런 좌부원이 처음 난풍검의 비급을 보고 했던 말은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비급에 왜 기러기가 나오고 구름이 나오는 거냐?’였다.
그렇게 거의 며칠째 같은 부분에서 도무지 진도를 나가지 못하던 상황.
강아현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그게 말이야······.”
“너 설마?”
운호의 질문에 강아현이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답하려는 찰나.
“그래, 동생아. 바로 그 설마가 맞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옥면검룡. 사시장원. 안수해원검. 모두 나를 일컫는 말이지.”
남궁철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