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보물(5)
“운호야, 이거 정말 괜찮을까?”
강아현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사람들을 지켜봤다. 낭인들의 습격으로 죽은 해룡방 사람들의 숫자는 일곱. 하지만 일행의 숫자는 오히려 마흔 가깝게 늘어나 있었다.
“글쎄, 남궁형님이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 * *
“보상?”
“그야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 환단이나 비상약 가진 거 다 내놓고, 뭐 그런 게 없으면 은자라도 내놔야겠지.”
“하······, 하지만!!”
“혹시 그대들은 머릿속이 꽃밭이기라도 한 건가? 설마 남궁가의 후계자를 건드리고 아무 일도 없이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지금 난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걸세.”
“기회라니?”
가볍게 호흡을 정돈하는 운호의 옆자리. 남궁철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야 당연히 이곳에서의 일을 이대로 끝낼 기회지.”
“이대로 끝낸다고?”
“하, 정말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한다면 여기서 돌아간 자들은 후환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남궁철의 말에 낭인들이 술렁거렸다.
비록 대부분 북방에서 달자들을 상대로 싸우던 낭인들이지만 그들 역시 강호인이다. 아니, 북방에서 싸웠기에 칠대세가의 무서움을 더 똑똑히 알고 있다. 요녕땅에서 모용세가는 왕가나 다름없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이다.
저 뒤편 군중 사이에 묻힌 누군가가 소리쳤다.
“젠장, 우리가 누군지 알고······. 게다가 우리가 몇 명인데 이걸 다 기억하겠다는 거냐.”
남궁철이 그 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어디 궁금하면 시험해보던가. 내 별호가 왜 안수해원인지. 사시장원이 무슨 의미인지 똑똑하게 알려줄 테니까.”
“네 말은 어떻게 믿지?”
“나는 남궁 세가의 소가주다. 네놈들처럼 잃을 것 없는 낭인들과는 다르지.”
지금 굳이 저렇게 자극을 해야 할까? 고작 낭인들의 돈 몇 푼 때문에?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에 그 의문은 빠르게 해소됐다.
“뭐? 돈이 없다고? 그렇다면 몸으로 때우면 되겠군.”
“네? 몸으로 때우다니요?”
“어차피 낭인이잖아. 흐음, 그래. 완전히 무보수로 부려먹는 것은 너무 가혹하니 반값을 쳐주지. 기한은 이 주. 남궁 세가에 도착할 때까지다.”
“하······, 하지만.”
낭인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대충봐도 이들은 지금 위험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자신들을 습격했던 이들을 고용한다? 대놓고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왜 고민이지? 이건 너에게도 좋은 제안 아닌가? 어차피 이번 무림맹 때문에 내려왔잖아. 잊지 말라고. 지금 무림맹주가 누구 할아버지인지 말이야.”
“······.”
“아, 참고로 우리 남궁세가는 고용한 낭인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그들을 습격한 낭인의 숫자는 백에 육박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번 사건으로 죽은 이의 숫자는 스물 남짓. 이들 대부분은 북방에서 무림맹 창설 소식에 한몫 단단히 챙겨보겠다고 내려왔다가 공을 친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금전적으로 상당히 쪼달리는 이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남궁철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거절한다.”
적룡창 배규.
그는 금전을 지불하는 것도, 그렇다고 그들에게 반값으로 고용되는 것도 모두 거부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해룡방 일행에게 고용된 낭인의 숫자는 서른넷.
그들을 습격한 낭인의 사 할이 합류한 셈이었다.
* * *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네, 우리를 공격했던 자들입니다. 대체 무엇을 믿고 그러신 겁니까.”
“그야 당연히 돈이지.”
“돈이요?”
“그래, 돈. 어차피 저들이 우리를 공격한 이유 자체가 돈 아닌가. 그걸 충족시켜준다는데 고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하면······.”
“다른 마음이라니. 감히 저자들이 어떻게!! 여기에 화산파의 삼대 제자이자, 황실 금의위 북진 교위. 소신검 운호대협이 계신데 누가 감히 소신검을 상대하겠어.”
남궁철의 짓궂은 놀림에 운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황이 급박하여 자신도 모르게 외쳤던 말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말이었다. 어디 영웅기담에나 나올법한 고루한 대사 아닌가.
“다음부터는 형님이 어떤 위기에 처했다고 해도 다시는 달려오지 말아야겠습니다.”
“어허, 동생. 그러지 말게. 이 형이 농이 좀 지나쳤네. 그보다 다른 마음은 아마 품은 자들이 있을거야.”
“네?”
“누군가 뒷배가 있지 않고서야 감히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고작해야 낭인 나부랭이들이 핍박할 리 만무하지. 하지만 만약 우리가 저들을 저렇게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은 그대로 그 뒷배의 수작에 의해 다시 우리를 노리는 검으로 변했을 거야.”
운호가 조금 놀랐다.
고작 낭인들의 그런 행동만 보고 뒷배가 있음을 짐작한단 말인가? 과연 대문파의 후계자라 다르기는 다르구나.
그런 운호의 표정에 남궁철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농이다. 농이야. 거, 아무리 나를 믿는다고 해도 그렇지 얼굴에 너무 다 써놓는 거 아니냐?”
“농이라고요? 하지만······.”
“어찌 사람이 고작 그런 것만 갖고 그런 추측을 한단 말이냐. 그렇다면 그야말로 억측이겠지. 그저 한참 바쁠 동생이 이 우형을 멀리서 불원천리 찾아왔기에 무언가 사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이다. 아니 그러냐? 자, 그러면 이제 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대체 무슨 일이냐.”
운호가 황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남궁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현음명 최염이라······.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거물이로구나. 게다가 혹참가포 조충이라니. 네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어찌 가는 곳마다 그런 거물들과만 엮인단 말이더냐.”
-흥, 거물은 무슨.
운호가 대답 대신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우선 네게 해야 할 말은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구나.”
“우선해야 할 말이요?”
“고맙다. 운호야. 그 상황에서 혹참가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무리 절정에 올랐다고 해도 삼대 제자의 입장에서 장문인을 호종하던 중 마음대로 강호행을 결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참으로 고맙구나.”
“고맙기는요. 형님이 제 처지라도 똑같게 행동했을 거 아닙니까.”
남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 목숨이 걸린 일이라도 꼭 달려오마.”
“아니, 굳이 목숨까지 걸고 달려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저보다 한참 약하신데, 괜히 형님 목숨만 날아가고 저는 무사히 자력으로 탈출할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운호의 가벼운 농에 남궁철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휴, 형님. 농입니다. 농.”
“아니다. 농이라니. 맞는 말이지. 남궁세가의 소가주 따위가 어찌 감히 화산파의 삼대 제자이자, 황실 금의위 북진 교위. 소신검 운호대협을 돕는단 말인가.”
“아, 형님!!”
* * *
“멍청하기는!! 그래서 그 인원으로 그냥 물러났다는 말이더냐? 심지어 적에게 인원을 보태줬다고?”
“아니, 애당초 남궁세가의 소가주만 하더라도 예정에 없던 인물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소신검이라니. 그걸 어떻게 감당하란 말이냐.”
“흥, 그래봐야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 아닌가.”
적룡창 배규가 답했다.
“솔직히 일대일로 싸운다고 해도 자신이 없다. 내공의 깊이에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니 장기전으로 가면 필승이기는 하겠지만 글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을까?”
“흥, 적룡창 배규라는 이름이 제법 높다고 들었는데. 허명이었나? 엄살이라니. 실망이군.”
“엄살이 아니다. 뭐 내 이름값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확인해봐도 좋다. 하지만 단기전. 일대일 대결로 한정 짓는다면 그 애송이는 절정 가운데서도 상위다.”
“그래서 지금 설마 포기를 하겠다는 말인가?”
사내의 공격적인 질문에 배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본관의 귀에는 네 엄살이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래서? 내가 포기하면 대안이라도 있는 건가?”
“흥, 감히 강호의 무뢰배 주제에 본관을 겁박하는 건가? 하여간 강호인들이란.”
“겁박이라니.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혹시라도 대안이 있다면 당장 그 대안과 내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절정의 고수 셋에 남궁세가의 소가주. 게다가 그만한 숫자라면. 어지간한 부성 단위 문파도 쉽게 건드리기 힘든 규모다. 혈운검의 부상이 회복되기 전에 몰아쳐야 한다.”
스스로를 본관이라 칭하던 사내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봐야 답은 하나다. 이번 일의 하달이 어디서 내려왔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건 무조건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좋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성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말은 굳이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그쪽만큼 나도 보상이 간절하니까.”
* * *
강호의 지배자는 구대문파. 그리고 칠대세가다. 그들은 본산뿐 아니라 그들의 속가 문파들을 통하여 사실상 중원의 강호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 넓은 중원 무림에 어찌 문파가 그들뿐일까.
절강성은 구대문파나 칠대세가로 분류되는 거대 문파가 없다.
해룡방이 고작 몇십 년 만에 그만큼이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파검의 이름값도 이름값이지만 그 덕분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주인 없이 그저 떨어져 있는 눈먼 돈은 드문 법이다. 해룡방이 어딘가의 재화를 빨아들여 성장했다는 말은, 누군가가 그만큼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그 간악한 해적놈들을 징치해야해요.”
“아미타불. 어차피 파산하여 본문도 뺏기고 쫓겨난 자들 입니다. 이제 와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사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니요.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가요. 스스로야 상인이라 자칭하지만 사실 해적이나 다름없던 자들에게 보호비를 걷던 작자들이에요. 지금이야 힘이 부족하여 물러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때 다시 징치하면 그만이지요. 어차피 파검도 그렇게 갔겠다. 이제 사매를 막을 자가 누가 있단 말입니까.”
“그야 지금이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파검의 무공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전해졌어요. 물론 그 망할 작자가 우화등선했다는 헛소문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사저와 내가 입적하고 그 작자들이 돌아온다면 어쩐단 말입니까.”
“그거야 아이들이 알아서 할 문제죠. 사매도 참 별 걸 다 걱정하는군요.”
“사저!!!”
늙은 사매의 빼액 하는 외침에 마찬가지로 늙은 사저가 휙 돌아 누워버렸다.
“어차피 다 순리대로 흘러갈 일이에요. 사매도 괜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여기 구들로 와서 등이나 지지세요. 뜨끈한 것이 뼈마디가 아주 녹아내리는 것 같네요.”
“그 구들장 누가 해준 건지나 기억하시나요? 당연히 기억하실 리가 만무하겠죠. 그걸 기억하신다면 거기서 한가롭게 등이나 지지고 계실 수 없을 테니까요. 아무튼 사저가 말린다고 해도 저는 그 악적들을 징치하러 갈 겁니다.”
“아미타불.”
남해 보타암.
비록 구대문파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아미파와 함께 꾸준히 여중제일인을 배출해온 절강의 명문.
보타암의 명정신니가 제자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