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보물(3)
절정의 고수는 귀하다.
구대문파나 칠대세가와 같은 거대 호족 집단이 아닌 이상 서너 명만 모여있어도 부성 단위에서 지배 문파를 자부할만하고 작은 현 단위에서는 하나도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낭인이란 무엇인가.
결국 돈에 자신의 무공을 파는 자들이다. 제국의 정세는 아직 불안하고 그렇기에 무공을 팔만한 곳은 널려있다. 북방과 남방, 서방까지. 하지만 그렇기에 절정의 낭인이란 성립하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하나의 현 단위를 지배할만할 무인의 몸값이란 대체 얼마일까? 그것은 최소한 그가 어디 시골 현에 내려가 문파를 만들고 왕노릇 하는 것 이상의 보상이다. 제국은 물론 부유하다. 하지만 동시에 세 개의 전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제국의 부유함으로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제국에서는 그들에게 단순히 금자를 내미는 대신, 일정 이상의 돈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할 다른 것을 내민다.
관직.
부를 획득한 인간이 추구하는 바로 다음 단계인 명예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훌륭한 정책이다. 그들이 말년에 낙향하여 가문을 열 때 낭인 출신의 누구누구인 것과 어딘가 장군 출신의 누구누구인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사 관직에 오르지 않더라도, 지부단위를 지배하는 강호의 거대 문파들이 천금을 주고라도 모셔가려는 것이 절정의 고수다. 문파의 호법이나 봉공 자리를 제의하고, 현 단위 문파에 정착을 돕는다. 이처럼 절정의 고수가 낭인으로 떠돌 이유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어디 세상 일이라는 것이 이치대로만 돌아간다던가.
어디에나 반골은 존재하며, 평생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는 이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 좌하랑이 상대하고 있는 적룡창 배규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부웅
“참으로 우습구나. 그대만 한 무공을 쌓아올린 이가 하는 짓이 고작 도적질이라니!!”
좌하랑의 호통에 붉은 창을 든 호안의 노인이 손에 쥔 창을 크게 내지르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돈에 무공을 판다. 그것이 낭인 아니던가.”
길게 찔러오던 창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가벼운 흔들림으로 창대에 매달린 붉은 수실을 춤을 춘다. 가벼운 시선의 교란. 하지만 좌하랑 역시 절정의 무인이다. 고작 저런 수법에 현혹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저런 가벼운 현혹들이 쌓이고 쌓여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이 또 고수들간의 싸움이다. 적룡창 배규는 오랜 시간 전장을 떠돈 고수답게 이러한 잡기들에 능숙했다.
또한, 좌하랑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눈앞의 배규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습격한 낭인의 숫자는 물경 백에 달했다. 물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이류에 불과했고 설사 일류라고 해도 질적으로 해룡방의 무사들이 훨씬 훌륭했다. 하지만 해룡방의 무사들은 긴 여정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고, 전투 자체가 낭인들의 기습으로 시작됐다.
“컥!!!”
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에게 무공을 지도받던 제자 하나가 단말마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좌하랑의 검이 더욱 사납게 배규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배규의 창은 그런 좌하랑의 검을 능글맞게 받아냈다. 물론 순수하게 무공으로만 따져도 좌하랑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 배규다.
“어이쿠!! 이거 손속이 상당히 사납군.”
하지만 전장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판국에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그는 낭인이었고, 낭인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자신의 몸이었으니까.
해룡방의 대제자인 해랑검 공조 역시 손이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명문 정파 가운데는 무당의 천강북두진(天罡北斗陣)과 같이 다수의 하수가 고수를 상대하는 비법을 가진 곳이 제법 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낭인들에게 그토록 정교한 연수합격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십수 년 함께 밥을 먹고 같은 무공을 익힌 이들 간에나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무공만 익힌 무사가 아니었다. 저 거친 북방에서, 혹은 음흉한 남방이나 메마른 서방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실전을 경험한 이들이다. 반쯤은 병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만큼 기초적인 형태의 손발을 맞추는 방법 정도는 익숙하다.
일류 무사 둘과 이류 무사 세 명을 하나의 조로 묶어 총 네 개 조가 번갈아가며 해랑검 공조를 상대했다. 고작 여덟 명의 일류 무사와 열둘의 이류가 절정 고수 하나를 감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상하는 이들 역시 종종 나왔지만, 그때마다 예비되어 있던 새로운 인원이 축차 투입된다. 절대적인 인원의 우위가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랑검 공조의 몸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조심해라. 여기 이 도련님은 괜히 죽였다가는 뒤끝이 안 좋을지도 모르니까.”
-부웅!!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을 도련님이라 외친 남궁철의 검이 더러운 낭인의 몸을 가로로 크게 갈랐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내장과 핏물은 감히 그의 몸을 더럽히지 못했다.
“이 망할 놈이?”
지금 죽은 자와 나름의 친분이 있던 낭인 하나가 크게 소리쳤지만, 감히 남궁철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파열검 우돈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것은 모두 저 남궁세가의 도련님 때문이다.
본래는 준비해온 화살로 조금 더 타격을 줄 생각이었다. 물론 군에서 사용하던 복합궁이 아닌 조잡한 목궁이었기에 일류 이상의 고수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 없었지만, 저들은 군대가 아닌 호족 집단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도 존재했고, 부상자의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행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날아든 화살 여섯 개가 좌하랑의 검에 막히는 바로 그 순간. 저 남궁세가의 도련님은 그녀의 뒤에 숨는 대신 앞으로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나는 현 무림맹주 검왕의 손자이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강의 아들인 남궁세가의 소가주. 사시장원, 안시해원검 남궁철이다. 어떤 도적놈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나를 해할 자신이 있다면 또 한 번 활을 쏴 보거라. 네놈들이 여기서 무엇을 얻어가건 간에 감히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남궁 세가의 적법한 후계자의 목숨을 해한 인간의 말로가 어찌 될지는 네 놈들의 비루한 상상에 맡기겠다.”
화려한 의복. 명문가의 귀티가 줄줄 흘러내리는 외모.
낭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궁 세가의 소가주라고?”
“검왕의 손자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검왕의 손자가 왜 여깄어. 무림맹에서 해룡방 신경도 안 쓸 거라고 그랬잖아.”
“거짓말 아니야?”
“아냐, 진짜 남궁세가 소가주 맞아. 저 주먹코 좀 보라고.”
“그러면 이거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무림맹이 나선 거라면······.”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에 지금까지 모았던 거의 모든 돈을 투자한 파열검 우돈에게 후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하기는. 정신들 차리고 똑바로 좀 보라고. 지금 저기 남궁세가의 무사나 무림맹의 무사가 있는지. 소가주 하나뿐이잖아. 무림맹이 나선 거라면 어째서 남궁세가의 귀한 소공자께서 혼자 해룡방과 함께 하겠어. 게다가 검왕이랑 파검 사이 안 좋은 건 저 북방의 달자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무림맹이 나선다고? 저건 그냥 저 소가주 혼자 어쩌다 저들과 함께하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우리 목적은 해룡방의 남은 재물과 비급이야. 저 공자를 잠시 잡아두고 해룡방 놈들만 얼른 해치우면 그만이라고. 우리 숫자를 좀 보라고. 정말 이걸 물러 날 생각이야? 고작 남궁세가의 도련님 하나 때문에?”
“그런가?”
파열검 우돈의 설득은 강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 모인 낭인의 숫자가 물경 백을 넘어선다. 반면 상대의 숫자는 기껏해야 서른 남짓. 세 배가 넘는 숫자다. 몇 명이서 저 도련님을 붙들고만 있으면 나머지를 처리하는 건 여반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본좌가 혈운검을 잡아두겠다.”
거기에 적룡창 배규의 선언이 결정적이었다.
“대신 화살은 그만 쏘도록 하지. 괜히 도련님 귀한 몸에 상처라도 났다가는 정말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지.”
그리고 삼각의 시간이 흘렀다.
파열검 우돈은 자신의 선택을 크게 후회했다. 명문가의 도련님이니 무공이 제법 훌륭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게다가 무려 검왕의 손자 아닌가.
하지만 남궁철의 무공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벌써 남궁철의 검에 목숨을 잃은 낭인만 여섯. 초반에는 최대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려고 해서 그랬다지만 이제는 악에 받쳐 공격하는 낭인들이 있음에도 남궁철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냥 계획대로 화살을 더 쐈더라도 스치지도 못했겠어. 아니, 오히려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하나 뚫고 시작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남궁 세가의 무공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주 직전으로 내려오는 저 제왕 검형.
제왕검형의 위력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세상에 저런 수법이 존재하다니. 저것은 무공이라기 보다는 사술이나 신통력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 몸이 무거워지고 반응이 느려진다. 덕분에 마치 남궁철의 주변에는 시간 자체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풍경이 벌어진다. 중심에 있는 남궁철 본인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다수의 하수들을 상대하는데 최적화된 무공이다. 그나마 남궁철과 검을 섞을만한 무공을 지닌 것은 일류 가운데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고수들 뿐이다. 파열검 우돈 역시 그 몇몇 고수 가운데 하나였지만, 삼십초 가량 검을 섞은 뒤 뒤로 물러나 이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물러서지 마!! 이제 약관밖에 안 된 애송이다. 아무리 명가의 자제라고 해도 내공의 깊이에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 저런 무위를 보여줄 수는 없다!!”
“보통 멍청함에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네 녀석들의 멍청함에는 그것조차 없구나. 그래, 어디 실컷 부나방처럼 달려들어들 보거라. 내 얼마든지 베어주마.”
우돈의 외침에 남궁철이 호통으로 응대했다.
하지만 그 역시 슬슬 기해혈에 뻐근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또래 가운데 당적할 자가 드문 내공 수위였지만 우돈의 말처럼 그래봐야 약관이다.
-힐끔, 남궁철의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해랑검이나 혈운검. 절정의 고수 둘 중 하나가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힘든 상황이었다. 해랑검의 경우 계속하여 낭인들을 베고는 있었지만 인의 장벽이 너무 두텁다. 힘들다. 혈운검 역시 적룡창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적룡창의 신색이 너무나 평온하다. 저러다가는 오히려
-푸욱!!
‘젠장.’
적룡창의 창끝이 혈운검 좌하랑의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다. 무복이 부욱 찢어지고 옆구리 살이 쩍 벌어진 것이 작은 상처가 아니다.
남궁철이 눈을 반개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얇은 장벽이 보였다. 툭 치면 무너질 것 같은,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시도로도 넘어설 수 없었던 절정의 벽.
지금 이 싸움에서 이것을 넘어설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지금 그것이 아니라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은 딱히 없어 보인다.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래, 운호야. 네가 그랬던 것처럼 이 의형 역시 여기 싸움 속에서 한계를 한 번 넘어보마. 물론 너는 내가 이런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응원해다오.
“형님!!!”
“그래, 운호야. 이 우형을 응원해다오.”
응?
환청인가? 하지만 환청이라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목소리다.
“여기 화산파의 삼대 제자이자, 황실 금의위 북진 교위. 소신검 운호가 나의 의형과 강호의 은인인 파검 대협의 후예를 도우러 왔다. 누가 감히 나의 검을 상대하겠느냐!!”
남궁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