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보물(1)
운호가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혹참가포 조충이 씨익 웃었다.
“제법이로군.”
한순간 운호를 압박하던 거대한 기운이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와보라고. 내가 할 말이 좀 있어서 그래.”
“중요한 행사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금의위의 책임자께서 이렇게 마음대로 자리를 비우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 짧은 말에 틀린 사실이 벌써 두 가지나 있군. 자자,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이리 오라고. 내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여덟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조충이 크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압력이 운호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압력에서 난폭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 전체를 부드럽게 압박하며 무릎의 관절을 자극하여 스스로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인간의 신체 전반에 대한 놀라운 이해와 신기에 다다른 놀라운 진기의 운용이다.
-흥, 고작 이 정도로!!
파검이 자신이 당한 일도 아니면서 거창하게 코웃음을 쳤다.
세 걸음.
순식간에 운호가 뒤로 물러난 거리만큼 다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조충의 진기가 꾸준히 운호의 몸을 압박했다.
-어, 설마 너?
설마 이 정도도 파훼를 못하냐는 목소리.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던 운호의 몸이 묘하게 틀어졌다.
십오 년.
내공 수위로만 따진다면 아마 저 흑참가포 조충과는 적어도 너댓 배. 많으면 그 이상도 차이가 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허공을 격하고 있다고 해도, 조충이 운호의 몸에 가하는 힘의 크기는 운호가 낼 수 있는 힘의 총량을 가뿐히 넘어선다.
게다가 조충의 인체에 대한 이해는 엄청나다. 그는 강호에서, 아니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신(拷訊)에 능한 인물이다. 그의 손에 박살 난 인간의 숫자는 적게 잡아 수 백. 어쩌면 천 단위가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것은 결국 운호 본인의 몸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두고 겨루기를 한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운호는 자신의 몸에 대하여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운호의 경지는 단순히 진기를 쌓아 올린 경지가 아니다. 초식에 대한 깨달음, 검술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다.
사량발천근이라고 했던가?
완벽하게 운호의 몸을 통제하던 조충의 기운에 약간의 힘이 더해졌다.
‘이 녀석 봐라? 그래도 절정이라 이건가?’
조충의 오른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손에 힘이 더해진다. 하지만 쉽지 않다.
이것은 몸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는 일종의 수 싸움이다. 분명 조충은 운호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고수였다. 하지만 내공의 불리함이 사라졌을 때, 순수한 수 싸움에서 운호가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은 조충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하게 넘어간다.
납매검의 엄밀한 합리성과 매농검의 효율성. 자운검의 기교가 검이 아닌 운호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펼쳐졌다.
이제는 숫제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심지어 조충이 더 강한 힘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조충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낭패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일인데 이래서야 어떻게 되건 너무 커다란 손해다.
지금 적어도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은 운호와 조충 자신이 벌이는 일을 주목하고 있다. 게다가 굉허와 같은 절정 가운데서도 상위의 고수나 눈치 빠른 녀석들 역시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힘을 더 써야 할까? 하지만 이제와서 억지로 힘으로 잡아당긴다 한들 체면을 구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해룡방!! 파검에 관한 일이다.
조충의 전음이 운호의 귀를 두드렸다.
역시 초절정이다. 허공을 격하고 이런 진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와중에 또 정확하게 전음까지 구사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 기예보다 내용 그 자체가 더 중요했다.
운호가 눈빛으로 그 전음에 답했다.
-천천히 나의 힘에 몸을 맡겨라. 약속하마. 절대 너를 해칠 생각은 없다. 이 많은 화산의 무인들이 우리를 보는 데 설마 내가 그럴 리가 있겠느냐.
운호가 몸에 힘을 풀지 않았다.
-젠장, 그래. 지금 내 코도 석자다. 하지만 해룡방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이다. 단순히 해룡방이 없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정말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다.
운호가 그래서 그걸 대체 왜 나에게 말하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척이면 척이라는 것일까? 혹참가포 조충이 또 그것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네 의형인 남궁철과도 관계된 이야기다.
후우.
운호가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하여 네 걸음.
마침내 혹참가포와 운호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좁혀졌다.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오늘 술시까지 내 집무실로 찾아와라. 거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마. 이렇게 대놓고 눈에 띄게 접촉한 모습을 보인 이상 더 이상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룡방, 그리고 남궁철을 살리고 싶다면 꼭 찾아오도록 해라.’
‘협박입니까?’
‘아니, 사정이다.’
조충이 운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과연 소문대로 무공이 훌륭하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잘 정진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마치 운호에게 한 수 무공을 지도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멋지게 장포를 휘날리며 돌아섰다.
* * *
‘대체 무슨 의도일까요?’
-글쎄다. 이전에 이야기도 그렇고, 하는 짓을 보니 여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더구나.
‘하지만 해룡방, 그리고 남궁 형을 거론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파검이 웃었다.
-강호인이 위험한 거야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더냐. 모두가 다 본인이 선택한 길이다.
냉정한 말이었다. 운호가 잠시 생각했다. 이것은 지금의 파검이 그의 생전 행동 양식만이 남은 백(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의 파검이 이런 사람인 것일까?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파검 대협은 마지막까지 가문을 걱정했습니다. 남궁 형에게 많은 것을 맡긴 이유 역시 그러합니다.’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미련을 떨쳐내고 승천했다. 그러니 나의 미련은 딱 거기까지다.
‘좋습니다. 파검 대협이야 그렇지만 전 중원 천지에 유일한 형제가 달린 일이니 꼭 알아봐야겠습니다.’
-뭐, 마음대로 하거라.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해룡방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물며 네 의형이 제대로 나의 무공을 수습했다면 지금쯤 절정의 문을 두드리거나 혹은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녀석은 남궁가, 그 음흉한 놈의 아들이다. 큰 일이 있을 리가······.
있었다.
“네? 파산이요?”
“정말로 이 사실조차도 몰랐던 모양이군.”
-······.
파검이 침묵했다.
그가 어지간히 뻔뻔한 인간이라지만, 강호인이 위험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며 모두가 본인이 선택한 길이라 말하던 인간이었지만 그 모든 원흉이 하늘로 떠나기 전 자신이 벌인 일에 있다는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해룡방이라면 그래도 절강성 남부를 지배하는 거대 문파잖습니까. 섬도 하나 가지고 있고 천이백료(千二百料)에 달하는 거선도 두 척이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문파가 고작 차용증 몇 장에 파산이라뇨.”
“쯧쯧쯧, 이미 강호에 소문이 파다한 일이거늘. 해룡방이 원래 부채가 많던 문파 아니냐. 아마도 파검 역시 그것을 해결할 요량으로 확실한 도박에 전재산을 던진 모양인데 그게 그모양이 되버렸으니······.”
“아니, 대체 빚이 얼마였길래!!”
“당장 일차로 갚아야 했던 비용만 금자 사천 냥. 참고로 이미 섬이며 배, 본산 건물까지 모조리 담보로 잡혀있던 상황이라 추가 대출도 어려웠다고 하더구나.”
금자 사천 냥.
보통 10인 가족이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소출이 나오는 땅 1결의 가격이 금자로 사십 냥이다. 사천 냥이라면 땅만 백 결. 어지간한 장원 몇 채는 너끈히 구매할만큼 큰 돈이다. 헌데 그 돈이 일차로 갚아야 할 비용에 불과했다고?
-아니, 그러니까 무림맹의 승리는 진짜 거의 확실했는데······. 채권이 삼 할만 뛰었어도 빚 다 갚을 수 있었을 텐데······.
파검이 우물쭈물 변명했다.
“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돈을 못 갚아 건물과 전답 배가 넘어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멸문지화의 위기는 무슨 뜻입니까. 아니, 애당초 해룡방과 같은 문파가 돈이 없다고 그렇게 순순하게 가산을 다 넘겨줬다는 것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최염, 그 음흉한 고자 놈의 짓이다.”
“현음명 최염 어르신이요?”
“그 음흉한 고자 늙은이한테 어르신은 무슨. 무공 수집에 눈이 벌게져서 임자 없는 보물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니 제일 먼저 줍겠다고 나선 것이지.”
임자 없는 보물.
그래, 그랬다. 파검 좌부원은 공식적으로 장삼봉 이후 무려 170년 만에 우화등선을 한 무인이었다. 만약 파검 좌부원이 구대문파나 칠대세가의 소속이었다면 이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호에서 지킬 힘이 없는 보물이란 임자 없는 보물이나 다름없다. 물론 해룡방은 작은 문파가 아니었지만, 최염과 같은 이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면 날아갈 허술한 문파에 불과했다.
“중원 사대 상단 가운데 한상을 제외하면 황실 내탕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지. 그리고 그 내탕금을 운용하는 자들이 바로 내관들이고, 내관의 수장이 최염 아니냐. 황실의 정예 무사들이 지원됐다.”
“동창 말씀이십니까?”
조충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만나고 있을 이유가 없었겠지. 금의위다.”
“금의위요? 하지만 금의위라면 조충 대인의 부하들 아닙니까.”
“내가 낮에 말하지 않았더냐. 틀렸다고. 나는 북진의 총관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빌어먹을 음흉한 고자 놈들이 황상 옆에 딱 붙어 그 귀에 속닥속닥해대니······. 본래라면 내가 대총관에 올랐어야 하거늘, 황벽 그 망할 놈이 금의위 대총관 자리에 올랐고, 나를 따르던 아이들은 죄다 외지로 발령이 나버렸다. 지금은 뭐, 명목상 북진의 총관일 뿐. 실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운호의 머릿속에 바로 오늘 낮, 저 멀리서 황족들을 호위하던 건장한 무사들이 떠올랐다. 하나하나가 정예한 무사들이었고, 그 가운데는 절정의 무사들 역시 적지 않았다. 확실히 금의위의 정예 무사들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현재 제 해룡방에 합류한 상태인 겁니까? 그렇다면 금의위가 공공연하게 해룡방을 노리는 것은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제 의형은 남궁세가의 후계자인데요.”
“당연히 금의위가 직접 해룡방을 노리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강호 전역에 우화등선에 성공한 파검 좌부원의 무공이 집도 절도 없이 강호를 떠돈다는 소문이 나돌 뿐이지.”
“그렇다면 쉬지 못하게 만들고 결정적일 때 쳐들어가겠군요.”
“그렇지. 이제 좀 제대로 알아듣는구나.”
“그렇다면 계획은요? 당연히 계획이 있으니 저를 부르셨겠죠?”
조충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