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14화 (114/288)

114화

북경(6)

흑참가포 조충이 사라진 이후에야 자세를 바로잡는 운호를 바라보며 오혁이 묘한 웃음을 보였다.

“이거 아무래도 조 대인이 장난을 쳤나보군. 너무 마음 쓰지 말게. 그만큼 백소협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니까.”

“마음에 들었다고요?”

“아,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백 소협이 금의위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설혹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꼭 좋은 뜻은 아니니까.”

좋은 뜻만은 아니다.

오혁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하지만 혹참가포 조충이라면 금의위에 유일한 초절정으로 차기 대총관이 유력한 고수다. 헌데 금의위에 들어갈 의사가 있더라도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꼭 좋은 뜻이 아니다?

궁금증을 풀 시간도 없이 오혁이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내 얼른 어르신께 보고를 드릴 터이니. 귀한 물건들이 많으니 구경이나 하고 있게나. 함부로 건드리지는 말고.”

“네. 알겠습니다.”

거대한 응접실. 하지만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광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국 각지, 아니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진귀한 물건들이 그 거대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조(前朝)는 세계제국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거대 제국이었다. 그 당시에 들여온 진귀한 물건 가운데는 수천 년 전 서방 제국에서 사용하던 귀한 물건까지 있을 정도다. 대충 봐도 연원을 알기 힘든 물건들은 아마도 그런 종류의 물건들일 것이다.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머리 뒤에 쟁반을 받친 사내와 그 사내 앞에 엎드린 수많은 군중이 그려져 있다. 아무래도 저 쟁반은 부처의 그것과 비슷한 두광(頭光)이 아닌가 싶었다.

그 옆에 또 다른 그림 역시 머리에 하얀 천을 두른 커다란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작은 사람이었다. 큰 사람의 몸 주변에 거대한 불꽃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것 역시 불교의 신광(身光)과 동류로 보인다.

서양의 탱화라고 해야할까?

‘저 먼 서양 이국 땅에도 부처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역시 우화등선이나 성불은 그 표현만 다르지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것이라는 뜻일까?’

운호의 시선이 벽과 탁자에 놓인 기묘한 형태의 무구들로 옮겨졌다.

날이 바짝 선 녀석들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의 흐름에 삭아서 이제는 병기라기보다는 유물의 의미가 더 강해 보인다. 개중에는 화려한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그 자체로도 귀해 보이는 물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저건?

운호의 시선이 파검의 외침을 따라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흐음, 역시 검사라서 그런가? 검에 관심을 보이는군.”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운호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않았‘던’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이 순간에도 운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운호의 몸이 빠르게 돌아갔다.

“최염 태감을 봬옵니다.”

“호오, 내가 최가라고?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확신하는 게냐? 내가 그냥 지나가던 도둑이면 어쩌려고?”

“천하에 어느 도둑이 감히 현음명 최태감 댁 담벼락을 넘겠습니까. 게다가 세상에 최염 태감 말고 또 누가 있어 이런 신위를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클클클, 무공만 제법인 줄 알았더니, 혓바닥도 아주 훌륭하구나.”

분명 앞에 뚱뚱한 노인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호의 기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과연 이게 사람이긴 한 걸까?

‘이자가 바로 현음명 최염······.’

운호가 지금까지 접해본 초절정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감각을 전해주었다.

물론 종류는 조금씩 달랐다. 권신이나 무신에게서는 마치 자연재해와 같은 압도적인 감각이 전해졌고, 종남의 태을검선이나 무당의 분신양검에게서는 저 뒷산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은 탈속함이 전해졌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고수들을 통틀어 현음명 최염이야말로 가장 이질적이며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감각을 전해주었다. 그는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은 지금까지 운호가 살펴보던 그림이나 무구들과 같은 무기물과도 같았다.

“그래, 본관이 너를 보자고 한 까닭은 이번 무한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듣기 위해서다.”

“하문하시면 성심성의껏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이를 통해서 비교 대조할 이야기들이다. 굳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었다.

운호가 경험한 바에 의하자면 저 마교의 대제사장 실로 터무니없는 괴물이다. 인간 한계에 다다른 절정의 고수조차 그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초절정. 그 이상의 고수만이 의미를 갖는다. 그 날 역시 우화등선한 파검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대체 몇이나 됐을까?

하지만 강호무림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초절정의 고수가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하다. 그날 한구부에 모였던 초절정 고수는 구파와 칠대세가 전체의 사 할에 육박한다. 더욱이 질적으로 따진다면 남은 초절정 고수를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날에 감히 비할 수 없다.

사상십이신(四相十二神)

황실의 수호신.

그들 가운데 운호가 직접 목격한 것은 현음명 최염과 혹참가포 조충뿐이다. 하지만 운호가 파악한 바에 따르자면 그들은 저 천무십칠성에 뒤지지 않는 고수들이다.

만약 그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진배없다.

-흐음

최염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앞서 화산파를 마중 나왔던 조 태감의 가짜 수염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정밀한 가짜 수염이다. 절정고수인 운호의 눈으로 봐도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마교의 수괴가 진정으로 그런 신위를 발휘했다는 말이냐?”

“네. 모두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일입니다.”

“그렇다면 파검이 정말로 우화등선을 했단 말이지······. 마교의 수괴는 우화등선하는 파검의 공격을 버텨냈고······.”

기분 탓일까? 최염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치 그 서늘함이 착각이었다는 듯, 최염이 자애롭게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 대단한 현장에 있었군. 게다가 파검이 우화등선하기 직전, 자네의 몸을 이용하다니. 실로 보기 드문 기사야. 그래, 열일곱에 절정의 경지에 오르려면 그 정도 기연은 있어야지.”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 하지만 때론 운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실력이지. 저기 저 녀석처럼 말이야.”

운호의 시선이 최염 등 뒤편으로 잠시 향했다.

그곳에는 오혁이 마치 사물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운호는 문득 어째서 최염이 이러한 기질을 뿜어내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최염이 이토록 커다란 권세를 뽐내고는 있었지만, 본래 환관이라는 것은 황궁에서 쓰이는 노비이며 도구와 같다. 왕과 황비의 사생활에 그들은 언제나 함께한다.

기척을 죽이고 죽여 마침내 정물과 같아 지는 것. 그것이 바로 환관이 취해야 하는 자세다. 어쩌면 최염이, 그리고 다른 내관들이 보여주는 무공의 특성은 첩보를 주력으로 하는 동창 무공의 특성이 아닌 환관 무공 특유의 형태가 아닐까?

“하지만 확실히 놀라운 일이기는 하군. 우화등선이라함은 결국 파검이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하늘에 올랐다는 뜻일지인데, 아직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마교의 수괴가 그것을 막아냈다니 말이야. 기생이 아닌 환신이라······. 포달랍궁의 그 놈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본문의 권신 태사조님과 걸왕 노선배께서도 그와 비슷한 추측을 하셨습니다.”

“그렇군. 뭐, 서장에 관해서라면 아무래도 청해대장군부에서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혁아, 지금 청해대장군부에서 황성에 파견 나와 있는 인원이 누구였지?”

“둘째 공자와 그 호위 대장으로 종 천인장이 머물고 있습니다.”

“종가 놈이라면 영보의 막내 제자이니 뭔가를 알고 있긴 하겠구나.”

“당장 불러올까요?”

최염이 고개를 돌려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아라. 안 그래도 팽가와 백가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내가 영보의 막내 제자를 이런 별거 아닌 이유로 굳이 만날 이유가 무에 있겠느냐. 네가 가서 포달랍궁의 그 괴물에 대하여 소상히 물어보고 오도록 해라.”

“네.”

“아, 그리고. 아이야.”

오혁을 향할때는 짜증 가득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또 다시 부드러워졌다.

“네. 태감 어르신.”

“여기까지 오가느라 귀찮았을 터인데 내 특별히 작은 선물을 하나 베풀도록 하마.”

“선물이요?”

운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최염이 도착하기 전 파검이 소리쳤던 검으로 향했다. 최염의 눈빛이 또다시 싸늘하게 변했다.

“그 검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저 멀리 구라파에서 건너온 정답이라는 이름의 보검이다. 선제께서 하사하신 보물로 고작 이런 이야기 몇 마디에 탐낼만한 물건이 아니지.”

“죄송합니다. 감히 태감의 보물을 탐내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너에게 베풀려던 선물은 저런 귀물이 아닌 정보다. 네가 나에게 정보를 주었으니 나도 같은 것으로 되갚음이 마땅하지. 혁이를 따라가거라. 천하에 활불에 관하여 가장 잘 아는 곳은 청해대장군부이니, 종가라면 너희 화산 도사와 거지 놈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운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 *

“이게 대체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무도? 무도는 지금 너희가 벌이는 짓이 무도다. 하늘 아래 지엄한 국법이 있거늘 감히 알량한 무력을 믿고 정당한 재산 행사를 방해해?”

“정당한 재산 행사? 감히 지금 그것을 정당한 재산 행사라고 하는 겁니까? 우리 아버지는 중원 무림을 미증유의 위기로부터 구하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떠나신 분입니다.”

“그래, 참 고마운 분이로구나.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쾅!!

텁석부리 사내가 파검 좌부원의 서명이 선명하게 새겨진 수십 장의 차용증을 책상에 쾅 내리찍었다.

적게는 은자 백이십 냥부터 많게는 금자 천 냥까지.

금자 천 냥이면 은자로는 무려 만 냥.

대문파 입장에서는 그리 큰돈이 아니지만 남해 촌구석 해룡방과 같은 문파에게는 문파 기둥뿌리를 탈탈 털어도 마련하기 힘든 거금이다.

심지어 금자 천 냥이 끝이 아니다. 줄줄이 튀어나온 차용증을 다 더하면 그 금액은 물경 사천 냥을 상회한다.

“여기 보이지? 해룡방의 건물, 땅, 배까지. 섬 전체를 통째로 담보 잡힌 거. 선택 해. 당장 돈을 갚던지, 아니면 그대로 몸만 빠져 나가던지.”

텁석부리 사내의 으름장에 뒤에 서있던 해룡방의 제자 하나가 분기하여 소리쳤다.

“사모님!! 이런 무도한 자의 말을 더는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서 저자의 목을 베어 강호의 도의가 살아있음을 보이겠습니다.”

“어머, 무서워라. 내 목을 베어서 강호의 도의가 살아있음을 보이겠다고?”

-쾅!!

“이봐, 애송이. 네가 지금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해룡방이 천무십칠성의 일좌인 파검이 딱 버티고 서있는 해룡방인 것 같아? 지금 내가 이렇게 점잖게 말로 하는 것도 중원 무림을 미증유의 위기로부터 구하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떠나신 분 체면을 생각해서라는 거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큭

기세 좋게 검을 뽑아들려던 제자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절정 가운데서도 최상위.

고작 상단의 개 따위가 저런 무위라니. 해룡방의 개파조사인 파검 좌부원은 천재였다. 반면 그의 제자들은 범인에 불과했다.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해랑검의 성취는 기껏해야 절정의 초입. 심지어 저 텁석부리가 끌고 온 무사의 숫자가 해룡방보다 더 많았다.

파검 좌부원이 우화등선을 하고 정확히 한 달 보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거대한 빚더미가 해룡방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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