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북경(4)
중원 무림의 최강자는 누구인가.
“헤헤헤, 그야 당연히 최 공공 어르신 아니겠습니까.”
이제 막 열 선너살 남짓 돼보이는 어린 환관의 이야기에 두툼하게 살이 오른 늙은 환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늙은 환관의 정체는 최염.
전전대 황제부터 벌써 삼대째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관으로서 모든 환관의 우두머리인 사례감의 태감이다.
현 황제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업어 키운 그를 아부(亞父)라 부르며 마치 아비처럼 공경했다. 그야말로 무불소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다만 그런 높은 무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실로 두툼한 지방으로 가득했는데 이는 그가 환관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익힌 무공의 특성에서 기인했다.
애당초 남성의 하물은 양기의 근원이다. 그렇기에 그 하물을 거세한 환관의 경우 보통의 남자에 비하자면 양기가 매우 부족하다. 양기란 본래 굳건한 것이니, 사내의 근육 역시 그 양기에 기인한다. 따라서 환관들은 보통의 사내에 비해 근육이 부족하고 살이 찌기 쉬운 체질로 변하는데, 최염 역시 그러했다.
“하여간 요사스러운 혀로다. 쯧.”
아이가 내심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름을 델 수도 없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다른 사람의 이름, 예컨대 저 북방의 팽야천이나 남방의 백기. 혹은 서방의 영보와 같은 이름을 댄다면 최염은 자신의 목을 뎅겅 자르고도 남을 위인이다.
“이번 사건으로 천하제일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해졌다.”
“이번 사건이라시면······.”
“멍청하기는. 지금 본 공공이 말할 사건이 뭐가 또 있겠느냐. 당연히 무한의 사건이지. 무신을 필두로 하여 천무십칠성 가운데 여섯. 게다가 반돈아 청우와 수건아 청공이라면 마찬가지로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다. 보고가 모두 사실이라면 천하제일인은 마교의 대제사장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마교의 수괴는 강호인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어 물러났다고 들었습니다. 그 상처가 치유되려면 족히 이십 년은 걸린다고 하니, 이제는 감히 공공의 무공을 따라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최염의 나이 올해로 여든셋.
무공을 대성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고, 그 권세는 천하에 제일이라 자부할만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생명에게 찾아오는 노화. 그리고 죽음이라는 숙명은 피할 길이 없었다.
“창위 가운데 파검의 우화등선을 직접 목격한 이가 몇이라고 했었지?”
“열셋입니다. 하오나 당시 창위들은 백공공의 명대로 한구부의 경계 지점에 있었던 터라 갑자기 나타난 빛기둥과 오색구름을 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우화등선인지는······.”
“멍청한 소리!! 마른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갑자기 몰려들고, 하늘과 땅을 잇는 빛의 다리가 생겨났다. 그 정도면 우화등선이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가 명령한 일은 어찌 됐느냐?”
“대부분의 채권을 헐값에 사들였고, 주변도 적당히 압박을 넣었으니 추가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유일한 변수는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강과 그의 수족이나 다름 없는 한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역시 무림맹주에 등극한 남궁벽의 폭주를 견제하려면 여기에 그렇게 큰 신경을 쏟을 수는 없을 겁니다.”
“누가 그런 쓸데없이 세세한 내용이 알고 싶다고 했느냐?”
“한 달. 앞으로 한 달이면 해룡방의 기둥뿌리까지 다 회수하고, 공공께서 원하는 것을 손에 쥐실 수 있을겁니다.”
“그래, 화산파는?”
어린 환관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이, 아무래도 화산파는 아직 그 청자 배의 주요 인사가 둘이나 살아있고, 아시다시피 그 장문인이라는 작자도 여간내기가 아닌지라······.”
“혁아.”
-짜악!!!
최염의 두툼한 손바닥이 혁이라는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순식간에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코에서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고작 그따위 변명이나 지껄이라고 너를 내 곁에 뒀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규화보전(葵花寶典)은 본래 완전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북송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던 당시 그 원본 비급이 분실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황실에 내려오는 규화보전은 피난을 내려온 이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불완전한 무공이 돼버렸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워낙에 뛰어난 무공이었고, 지난 삼백여 년 동안 꾸준히 개량된 만큼 천하의 절학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최염이 한탄을 이어갔다.
“아쉽게도 규화보전의 원형은 천하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삼백 년 전 규화보전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이가 다름 아닌 화산의 도사였다. 그리고 그 도사가 화산으로 돌아가 만들어 낸 무공이 바로 자하기공이니 자하기공이야 말로 규화보전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니겠느냐.”
“마, 맞습니다!!”
“이미 규화보전을 대성한 내가 자하기공을 제대로 살핀다면 보전의 잘못된 부분을 찾는 것은 여반장일 것이다.”
“당연하지요!! 공공께서는 금세 신선의 경지에 오르실 수 있을 겁니다.”
최염이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디 나에게만 좋은 일이겠느냐. 너 역시 이제 고작 열여섯 아니더냐. 그러니 너도 내가 온전하게 만들어낸 규화보전을 부단히 익혀 신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헤헤헤, 그렇게만 된다면 소인에게는 그야말로 삼생의 영광이지요. 하지만 천하에 그런 성취를 얻을 수 있는 분이 공공 말고 또 있겠습니까. 소인이야 그저 어디 가서 크게 두들겨 맞고 낭패를 보지 않는 수준만 된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혁이 납죽 바닥에 엎드렸다.
“하여간, 묘하게 주제 파악은 잘하니 미워할 수가 없는 놈이로다. 그러고 보니 재능 하니 떠오르는구나. 최근 크게 소문이 도는 화산의 아이가 네 또래라고 했지?”
“네, 저보다 한살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데리고 와보거라.”
갑작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혁은 최염에게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뒷걸음질로 방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공공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방문 밖으로 걸어나온 그에게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한 내관이 다가와 물었다.
-짜악!!
“네 눈에는 이게 지금 괜찮아 보인다더냐? 멍청한 놈 같으니. 당장 가서 얼음 주머니나 준비해오거라. 그리고 그 화산의 아이. 그 아이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하고.”
“화산의 아이라 하시면?”
-짜악!!
“소신검 말고 요즘 유명한 화산의 아이가 또 있더냐.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라.”
“네, 주의하겠습니다.”
* * *
“네? 누구요?”
“사례감의 오 소감(少監)께서 부르십니다.”
“오 소감이라면?”
“사례부 태감(太監)이신 최공공 어르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저를 왜?”
거듭되는 운호의 질문에 양쪽 뺨이 팅팅 부은 환관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소협, 지금 이유가 중요합니까?”
“네?”
“제국을 이끄는 사례 태감 어르신을 보필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부르시면 이유를 묻기 전에 일단 의관을 정제하고 곧바로 달려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운호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관리들이 강호인을 겉으로야 대접해주지만, 그 속에는 깔본다더니 이 환관이 보이는 행태가 딱 그 꼴이다. 심지어 운호는 황실의 초대를 받아 온 화산파 일행 중 하나다. 소감 소리를 듣는 것 보면 아주 말단은 아니지만, 그래봐야 중간 관료다. 물론 운호 역시 화산의 삼대 제자에 불과하긴 했지만, 본신의 실력이 벌써 절정으로 어디 가서 절대 무시 받을 위치가 아니다.
심지어 그 본인도 아니고, 고작 심부름꾼 따위가 이유 불문하고 달려가는 것이 예의라며 호통을 칠 위치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물물은 본디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井水不犯河水). 하물며 지금 화산은 황실의 초대를 받은 손님인데, 종이 주인이 초대한 손님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예의라니. 북경에서는 예의라는 단어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쓰이나 봅니다?”
“지······, 지금!! 종이라고 했소? 감히!!”
“뭘 또 그리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온 중원의 천하 만민이 황제 폐하의 종인 것을요. 아닙니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운호의 이야기에 얼굴이 퉁퉁 부은 내관이 차마 뭐라 답하지 못했다.
“게다가 보다시피 저는 강호인 아닙니까. 황실에서 저희에게 허락한 장소는 딱 이 저택뿐인지라, 제 마음대로 함부로 나다닐 수가 없군요. 혹시라도 필요하시다면 직접 찾아오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황실에서는 화산파의 도사들에게 이 저택을 숙소로 지정해줬다. 게다가 본래 북경은 무창부성이나 한양부성과 마찬가지로 허가증이 없는 강호인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다만 당연하게도 이것은 지금처럼 초제를 위해 초대된 구파의 무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엄밀히 따지자면 그저 편의를 위해 눈을 감은 것에 가까웠다.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다면, 화산파의 무인들 역시 이 저택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열일곱 살.
비록 절정 고수로 강호에 이름이 났다고는 하지만, 고작 열일곱 살이다. 심지어 열일곱에 그만한 무공을 가지려면 얼마나 무공에 일로정진했겠는가. 내심 운호를 순진할 것이라 여기던 내관이 단박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소협, 아무래도 소인이 소협께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놈의 입이 문제입니다. 입이 문제야.”
-찰싹, 찰싹.
서른이 넘은 환관이 방정맞게 자신의 입을 찰싹찰싹 두드리는 꼴은 우습다기보다는 애처로웠다.
“제가 이렇게 사죄드릴 터이니 부디 왕림해주시면 안되시겠습니까? 오 소감께서는 태감의 최측근으로 사실상 사례감의 실무를 거의 다 담당하고 계십니다. 절대 소협을 경시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워낙에 바쁘셔서 소인에게 소협을 모셔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허면 그 바쁘신 분이 대체 무엇 때문에 저를 부르신 거란 말입니까.”
운호의 질문에 내관이 한 걸음 쓱 접근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것이······.”
“그것이?”
“이건 어디까지나 그저 소인의 추측입니다. 높은 분의 뜻인지라, 절대 확실한 것도 아니고요.”
대체 무엇이 불안한지 좌우로 고개를 한 번씩 돌려가며 침을 꼴깍 꼴깍 삼키는 내관을 보고 있자니 운호 역시 정말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겠구나하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사례 태감 어르신께서 소협을 직접 보겠노라 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례 태감께서요?”
“네, 오 소감께서 사례 태감 어른을 만난 직후에 소협을 찾았으니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운호 역시 사례 태감이 자신을 직접 보고 싶어한다는 말에는 제법 크게 관심이 동했다. 물론 그가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음명(玄陰冥) 최염.
그는 황실을 대표하는 사상(四象) 가운데 하나이며, 파검과 무신을 비롯한 강호의 최강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 어쩌면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