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111화 (111/288)

111화

북경(3)

강아현이 탄성을 내질렀다.

운호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눈치챈 거야?”

북송 시절 진단노조(陳摶老祖) 진희이 선생이 송태조 조광윤과의 대담 끝에 면세의 권리를 얻어낸 것이 벌써 오백 년도 더 된 일이다.

물론 당시에는 스물세 개의 도관과 그보다 훨씬 많은 도맥들이 각자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백 년. 그래, 같은 화산파라는 이름 아래 무려 오백 년이다.

아예 다른 봉우리에서 가장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홍매당조차도 이제는 공유하지 않는 무공이 없다. 물론 대대로 홍매 당주는 옥녀진결을 익힌 이 가운데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 옥녀진결 조차도 오백 년 전의 그것과 똑같은 옥녀진결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수렴진화.

같은 환경에 놓인 생물은 서로 다른 종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형태나 기능을 보인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비슷한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화산파의 무공들 역시 이와 비슷했다.

긴 시간 동안 같은 울타리 안에서 서로 교류했다. 화산의 기운을 어떤 식으로 더 잘 받아들이는지에 관한 연구를 공유했으며, 서로의 무공을 나눴다. 걸출한 천재가 등장하여 하나의 무공이 비약적 발전을 하면, 다른 무공들 역시 차용 가능한 부분을 차용하며 발전했다.

“같은 점이 전혀 없어.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전혀 다른 문파의 무공이라도 이토록 그 추구하는 바가 극단적으로 겹치지 않는 무공은 찾기 어려워. 그런데 화산파의 팔대 검술은 그 중 무려 셋이 그런 형태야.”

“셋이 아니야. 넷이지.”

“넷?”

검집에 들어가 있던 운호의 검이 그의 몸을 타고 스르릉 흘러나왔다.

-습

한 번의 들숨.

지금까지 강아현을 상대하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기해혈 깊숙한 곳의 모든 진기가 일 점에 모여든다.

-후우.

한순간 핏기 사라진 얼굴로 날숨을 내뱉으며 납검했다.

강아현의 눈이 커졌다.

‘제대로 보지 못했어······.’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운호가 단순히 검을 한차례 뽑고, 다시 납검하는 것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강아현은 일류의 고수다. 그녀의 동체시력은 운호가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하지만 그 동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극한의 쾌검.

“이건 뭐야?”

“광음검(光陰劍).”

“광음검? 하지만 그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식용 검술에 가깝잖아.”

“그걸 제대로 펼쳐냈을 때 나오는 형태야.”

“설마, 너 그러면 지금 그 쾌검이 그 복잡한 초식을 다 펼쳐낸 결과라는 거야? 단순히 한번 휘두른 게 아니라?”

“어.”

“맙소사······.”

놀람의 연속.

그저 사선 베기 한 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쾌검이었거늘, 방금 그 복잡한 초식을 죄다 펼쳐냈다고?

“어쨌든, 네 말은 그러니까 그 광음검까지도 일치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그 말이네?”

“그래.”

무려 넷이다.

같은 문파를 대표하는 여덟 개의 검술 가운데 네 개가 서로 겹치는 것 없이 이토록 이질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확실히 네 말처럼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건 분명해 보이네. 그게 목운평 조사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근데 그러면 대체 무슨 의도로 팔대 검술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두신 걸까?”

“나는 이걸 일종의 지도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

“지도?”

보통의 무공은 하나의 길을 꾸준히 갈고 닦아 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이상은 운과 재능의 영역이다. 당연한 일이다. 일단 절정까지 오를 수 있는 안정적인 길을 확보한 무공이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명문의 무공이라 할 만하니까.

화산의 대부분 무학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강아현이 익힌 옥녀진결과 같은 몇몇 무공은 대성하면 초절정의 경지를 보장한다. 물론 옥녀진결을 대성했던 사람은 삼백 년 전 옥녀진결을 재창안 했던 자하낭랑을 제외한다면 전무했지만, 어쨌든 옥녀진결과 같이 초절정을 보장하는 무공은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하물며 자하기공은 팔단공에만 올라도 초절정을 보장한다. 그야말로 인세에 보기 드문 신공이다. 물론 그 팔단공에 오르는 것이 보통의 사람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세월, 혹은 인세에 보기 드문 영단을 요구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너도 알다시피 술(術)로써 도(道)에 이르는 것은 공(功)을 쌓아 도(道)에 이르는 것과는 조금 달라. 그리고 내가 기공이 공이라면 검술은 술이라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너도 알다시피 목운평 조사님은 검술로써 우화등선을 하셨다고 알려진 검선(劍仙)이야. 즉 술로써 도에 이르신 분이지. 내가 생각했을 때, 이 화산의 팔대 검술은 그분이 술로써 도에 이르렀던 길을 남겨둔 일종의 지도가 아닐까 싶어.”

“그러니까······, 내가기공이 일단공에서 이단공으로 단계별로 상승하는 것처럼 검술을 그렇게 여덟 개로 쪼개두셨다. 뭐 그런 이야기야?”

“응, 아마도.”

“하지만 왜 굳이 그걸 여덟 개로? 차라리 하나의 검술로 묶고 그것을 수련하게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심지어 이 검술들은 서로 연관점이 하나도 없잖아. 어느 하나를 익혔다고 다른 검술을 익히는데,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뭣하러 굳이 이런 극한의 비효율을?”

강아현은 납매검을 일정 수준 이상 익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매농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자운검 역시 운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지도란 무릇 어디로 가는 길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납매검부터 자운검까지. 강아현이 알고 있는 화산의 검술들은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서로 다른 도착점을 향해 가는 별개의 무공이다.

“바로 그 점이 핵심이야.”

“그 점이 핵심이라고?”

“우리 화산의 팔대 검술 가운데 온전히 전해지는 검술은 셋. 비급으로나마 전해지는 검술이 또 셋. 그리고 실전된 검술이 둘이잖아.”

“그렇지.”

“어쩌면 실전된 검술 둘 가운데 하나는 실전된 게 아닐지도 몰라.”

“실전된 게 아니라고?”

“응, 그러니까 그 여덟 번째 검술이 진짜 완성된 술(術)로써 도(道)에 이르는 검술이고. 그걸 완성했던 사람은 우화등선한 목운평 조사님밖에 없는 거지.”

“그러면 나머지 일곱 개의 검술은?”

“내가 생각할 때 그 일곱 개의 검술은, 여덟 번째의 검술을 익히기 위해 몸에 익어야 하는 기본공이 아닐까 싶어. 그러니까 목운평 조사님이 본인의 검술을 창안하기까지 지나왔던 과정을 가장 쉽게 풀이해둔 지도가 되는 거지.”

“기본공이라고?”

순간 강아현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대체 이 녀석이 뭐라는 거지? 기본공? 이 녀석이 말하는 기본이 내가 알고 있는 그 기본이 맞는 건가?

“응, 기본공.”

“운호야. 설마 지금 네가 말하는 기본공이 그러니까 자소공 같은. 그런 공부의 기초가 되는 그걸 말하는 거니?”

백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현은 열이 뻗쳤다.

체질로는 이준형에게 치이고, 초식에 대한 이해도로는 백운호에게 치여 조금 색이 바랜 감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어디 가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재능과 오성을 가진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은 그녀다. 화산파만한 대문파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자질이다.그녀보다 앞선 것은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광양지체. 그리고 열일곱에 절정에 오른 괴물뿐이다.

그런 그녀가 팔 년째 대성하지 못한 검술이 납매검이고, 아직 그 위력의 반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검술이 매농검이며 혀를 내두르는 것이 자운검이다. 하나하나가 평생에 걸쳐 수련해야 할 검술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헌데 그런 검술들이 기본공이라고?

“물론 기준은 조금 다를 거야. 애당초 사조께서 남긴 그 이름도 모를 여덟 번째 검술은 그 진의를 알아내는 것만으로 자하기공으로 치자면 팔단공에 들어서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까.”

“초절정을 담보하는 검술이다. 그런 말이로구나. 하지만······, 검술의 초식이라는 건 결국 형이잖아. 형을 익히는 것만으로 어떻게 초절정이······.”

“그래서 실전이 된 게 아닐까 싶어. 앞선 다른 검술의 비급들만 봐도 목운평 조사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는 그리 소질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거든. 아마도 본인의 오성이 워낙 뛰어나서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심지어 초절정이 아니면 제대로 활용도 못 할 검술이었던 거지.”

실제로 목운평이 남긴 검술이 불친절한 것은 사실이었다.

절정에 오르기 전에는 복잡한데 위력은 좀 부족하다 느꼈던 자운검의 초식들이 절정에 올라 이기어검을 활용하기 시작한 순간, 복잡한 만큼 압도적인 위력이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다른 검술들 역시 그런 식으로 이뤄져있을 것이다.

“하아······. 결국 어른들의 말이 맞았네. 정말로 검종의 길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면 가서는 안 되는 길이구나.”

“글쎄. 하지만 자질을 따지는 건 기종의 무공도 마찬가지야. 내가 기공에 전념했다고 생각해봐. 으······. 끔찍하다. 끔찍해.”

“하긴, 지금 운호 네 내공이 십오 년 정도 되지? 말하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긴 하네. 고작 십오 년 내공으로 이기어검이라니······.”

“응, 나름대로 토납과 조식에 힘을 쓰는데도 그러네. 그래도 얼마 전 자소단을 하나 더 먹었으니 당분간은 조금 더 빠르게 늘어나긴 할 거야.”

“확실히 포원공치고는 그만한 속도면 나쁜 게 아니긴 한데······.”

실제로 내공의 수위만 따지자면 운호는 여전히 일류인 강아현보다도 낮았다. 아마 자하기공을 익힌 광양지체의 이준형과 비교한다면 그의 칠 할도 채 되지 못할 것이다.

“뭐, 포원공이 조식을 통해 진기가 쌓이는 속도가 많이 느리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가장 안정적이고, 즉각적이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런 속도면 차라리 자하 신공 쪽이 더 나은 거 아니야?”

“난 중원 곳곳을 돌아다닐 생각이라서. 아무래도 화산에 틀어박혔을 때 가장 효율이 좋은 자하 기공은 좀 그렇지. 게다가 자하 기공은 일단 발동이 걸리면 몰아치긴 한다지만 좀 너무 묵직하고 느리잖아.”

“글쎄다. 그것까지 다 고려해도 자하 신공이 더 나아 보이는데?”

운호가 잠시 턱을 긁적였다.

그가 익힌 포원공은 오직 기해혈을 중심으로 진기를 단단하게 뭉치는 조금은 원시적인 형태의 내가 공부였다. 하지만 다른 기혈을 그저 통로로만 사용하는 만큼 그 수발이 자유롭고 휘몰아치는 속도 역시 가볍고 빠르며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자하 기공은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의 주요 기혈에 작은 규모의 단전과 비슷한 것들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덕분에 저장 가능한 진기의 총량도 높아지고, 조식을 통해 진기가 쌓이는 속도 역시 포원공에 비해 매우 빠르다.

하지만 어찌 됐건 그 기혈에 쌓인 기운들은 어디까지나 저장된 기운에 불과하다. 결국 모든 움직임의 시작은 기해혈을 기점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즉 기혈에 쌓여있던 기운이 더해질 때마다 더 강맹해지고, 더 사나워지는 것은 맞지만, 그 더해지는 순간순간의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아현이의 말처럼,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역시 자하기공을 익히는 쪽이 더 이득인 것은 사실이다. 괜히 자하기공에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다. 자하기공은 현 강호에서 가장 발전적인 형태의 기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종의 어른들이 그를 괄시해서였을까? 아니면 사부가 처음 그에게 권했던 것이 포원공이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운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알다시피 내가 체질 상 기공에는 재능이 좀 없잖냐. 자하기공은 입문만으로도 한세월이 걸릴 텐데. 그렇게 시간 낭비해가면서까지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더라고.”

“흐음······. 그래?”

“자자, 어쨌든 이제 설명은 충분히 된 것 같으니. 난풍검(亂風劍) 복원에나 힘을 좀 써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