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북경(1)
기본적으로 화산파는 북송 시절 진단노조(陳摶老祖) 진희이 선생이 송태조 조광윤과의 대담 끝에 면세의 권리를 얻어내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화산파에 난립하던 도관의 숫자는 무려 스물셋. 게다가 그 외에도 소수의 숫자로 명맥을 이어가던 도맥 역시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작금의 화산파 역시 화산파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친 상태였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도맥은 몇 가지 갈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화산파는 내부는 결혼을 하지 않는 출가도사와 결혼을 할 수 있는 재가도사가 혼재되어 있었는데, 옥녀봉의 도사들이 대표적인 재가도사에 해당됐으며 현재 화산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자하기공의 일맥은 대표적인 출가도사에 해당됐다.
강아현은 그러한 재가도사 집안의 아이로 화산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의 어머니인 능라나찰 소여향은 영민했지만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화산금정 강진은 달랐다.
그는 단순한 연단사가 아니었다. 강진은 아주 오래전, 천축에서 달마 대사가 진기의 운용법을 가져오기 전, 금단을 통하여 인간을 초월하려던 도교 일맥의 적통이다. 무엇보다 그는 그 일맥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첫 손에 꼽힐만한 천재였다.
이미 단환을 통한 초월은 실패한 것이라고 모두가 판단하는 이 시대. 인간을 초월하는 방법은 달마대사가 전했던 진기에 있다고 모두가 믿는 이 시대에 그것을 부정하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인간이 범상한 인간일 리 만무했다.
그리고 강아현은 그런 아비 밑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유, 불, 선의 경전을 두루 익혔다. 아마 화산파의 삼대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학문에 능한 이를 꼽으라면 강아현 이상 가는 이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그녀는 ‘검술’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조만간 결혼적령기에 들어서는 화산파의 가장 아름다운 재가도사이기도 했다.
“확실히 아현이 너라면······. 하지만 난 당분간 강호를 돌아다닐 생각인데 괜찮겠어? 너 아직 한참 본산에 남아 무공을 수련해야 할 시기잖아.”
“뭐야? 일류 찌끄래기는 아직 한참 무공 수련에 전념할 때라 뭐 그런 소리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옥녀진결을 수련하기에는 이곳만 한 곳도 없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옥녀진결은 자하기공만큼은 아니니까. 게다가 보다시피 나는 내공의 ‘양’만으로 따지자면 준형이 정도를 제외하면 화산파에서 제일이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워낙에 이것저것 잘 먹었으니 말이야. 그러니 나도 당장은 가만히 앉아서 토납을 하는 것보다 몇 년 정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견문도 넓히는 게 훗날을 위해서도 더 좋을 거라는 판단이야.”
운호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뭐? 내가 여자라서? 설마 그런 고루한 생각을 하는 거야? 난 여자이기 이전에 도사이고, 또 강호인이야. 무엇보다 네가 원하는 수준의 학문을 익힌 사람이면서 적당한 무공까지 갖추려면 사숙님들 중에서 찾아봐야 할 텐데 혹시 어르신을 모시고 강호를 돌아다니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장문인께 따로 말씀을 드려볼게.”
사숙들을 모시고 강호행이라고?
운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헌데 소여향 사고님과 강진 사숙께서도 허락을 하신 거야?”
“당연하지. 내가 설마 아빠랑 엄마 허락도 없이 나섰겠어? 그런 건 걱정도 하지 마.”
* * *
강진이 소리쳤다.
“아니, 과년한 처자가 시커먼 남정네랑 단둘이서 강호행을 할지도 모르겠다니!!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말이 안 될 건 또 뭐에요.”
“다······,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여보, 20년 전을 좀 떠올려 봐요. 당신 지금 그러는 거 우리 아버지랑 똑같은 거 알아요?”
당시 홍매당의 후계자였던 능라나찰 소여향은 성격에 문제가 조금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긴 했지만, 그 미모와 무공으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신붓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화산파 홍매당의 유일한 후계자이기도 했다.
반면 화산금정 강진은 딱히 가진 것도 이룬 것도 없던 조금 솜씨 좋고 용모 수려한 홍매당 소속의 연단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둘의 혼인이 성사된 것은 어디까지나 능라나찰 소여향의 강력한 주장 덕분이었다.
당시 소여향의 아버지는 며칠을 앓아누웠지만 강진을 납치하여 가출까지 한 딸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능력이라도······.”
“아니, 능력은 운호 그 아이도 빠지지 않죠. 아니, 빠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죠. 열일곱에 절정의 고수라니. 솔직히 당신도 대단하긴 했지만······.”
뒷말은 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리고 강진 역시 그녀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래, 그래. 열일곱에 절정이라니 참으로 대단하지. 하지만 그래도 우리와는 다르지 않소. 우리 때는 당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인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장문인의 명 아니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딸이 장문인의 명이라고, 그리고 내가 단지 장문인의 명이라고 그걸 순순히 허락할 거라고요?”
“하지만 우리 딸은 이제 고작 열일곱······.”
“제가 당신과 가출 했을 때도 열여덟이었죠.”
* * *
제국 황실에서 격년으로 개최하는 초제(醮祭)는 제국의 공식적인 행사다. 그리고 화산파 장문인은 그 초제의 가장 중요한 손님 중 하나다. 덕분에 장문인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 나온 운호는 지금까지 강호의 행사를 위하여 나왔던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운호가 강호에 나왔던 것은 총 세 번이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경험은 모두 그리 나쁘지 않았었다.
당연한 일이다. 화산은 부유한 문파였고 그런 만큼 여행 경비가 없어 노숙을 해야 하는 등의 일은 없었다. 저자를 떠돌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호강이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경비가 있다고 하여 항상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가운데는 객잔이 없는 마을도 존재했고, 날씨에 따라 목적했던 거리만큼 이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역참(驛站).
물론 이전 왕조처럼 제국은 물론이거니와 제국 바깥의 영역까지 역참을 운용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고 자부할 수 있었던 전대 왕조에서도 일 년 예산의 이 할을 그 역참 유지에만 사용했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제국 역시 제국 내부에 주요 도시의 역참 정도는 충분한 수준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말은 몇 시진을 끊임없이 달릴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최고 속도로 달리는 것은 천하의 명마라고 해도 기껏해야 십 리 남짓이다. 보통 사람을 태운 말은 관도 팔십 리 정도를 한 시진에 걸쳐 적당한 속도로 달린다.
그렇기에 무림의 고수들이 빠르게 이동할 때는 그렇게 반 시진 정도 말을 타고, 나머지 반 시진은 말과 함께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식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역참을 사용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다.
한 시진 동안 말을 달리고, 역참에 들러 말을 교환했다. 보통의 군사라면 약간의 휴식을 취했겠지만 이번에 장문인과 함께하는 화산의 제자 가운데 누구 하나 고수가 아닌 이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하루에 일곱 시진 이상 말을 달렸다.
게다가 식사와 숙소 역시 관에서 미리 양질의 것을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제공했다. 화산파 일행으로서는 그저 말을 달리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편안한 일정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무려 이천삼백 리를 고작 닷새 만에 주파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북경까지 약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역참. 얼굴에 새하얀 분칠을 한 뚱뚱하고 늙은 사내가 그들을 마중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마찬가지로 얼굴에 분칠을 한 사내 십 수명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기파가 매우 희미하고,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동작이 일반인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찝찝하다.
강아현이 운호의 귀에 속삭였다.
‘동창이야.’
‘동창?’
확실히 동창이라면 저런 기파가 이해가 갔다.
동창이라 함은 좋은 말로는 황실의 보이지 않는 칼. 그리고 속된 말로는 제국 곳곳에 퍼져 몰래 정보들을 수집하는 황제의 번견이다.
그렇듯 은밀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조직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기파를 숨기는 데 능숙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절정 고수인 운호의 눈에는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조공공. 오래간만입니다.”
화산파 장문인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하하, 이 년 전에는 제가 북방에 일이 있어 장문인을 뵙지 못했었지요. 때문에 백가 그 아이가 실례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어릴 적에 거세하여 변성기가 찾아오지 못한 사내가 억지로 호탕한 척 웃는 모습이 사뭇 기괴했다. 저래서야 기파를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외양에서 이미 자신이 내시임을 드러내는 꼴이다. 아마도 강호에 암약할 때는 무언가 특별한 수단을 동원하겠지?
“아닙니다. 재작년 백공공께서도 실로 대단히 환대를 해주셨었죠.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공공만큼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요.”
“이거 이거, 화산의 장문께서 본 공공 얼굴에 이토록 금칠해주시니 이번 북경행에도 제가 아주 바쁘게 뛰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려.”
“그게 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 참, 운호야!!”
장문인의 부름에 운호가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려 곁으로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인사드려라. 이분은 사례감의 태감이신 조 충규 대인이시다. 조공공, 이쪽은.”
“아!! 알고 있습니다. 이거, 이거 장문인에 이어 제가 오늘 아주 귀한 사람을 맞이하는군요. 이번 무한 사건에서 이름을 떨친 소영웅 아니십니까. 지금 황실에서도 아주 소문이 자자합니다.”
“백운호라고 합니다.”
운호의 시선이 조 태감에게 향했다.
새하얀 얼굴에 가짜 수염. 그리고 비대한 덩치. 무공을 익힌 것일까? 그의 뒤에 서 있는 호위들에게서는 희미한 기파와 동작에서 약간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조 태감에게서는 그런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무공을 익혔다면 최소한 운호 자신과 동급, 혹은 더 수준 높은 고수다.
“백 소협. 앞으로 잘 부탁하네. 내가 감이 상당히 좋은 편인데, 아무래도 백 소협과는 이래저래 자주 만날 것 같군.”
조 태감이 호탕하게 웃으며 운호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의 통통한 손에는 굳은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난풍(亂風)이라. 지금까지만 봐서는 이거 환검(幻劍)의 일종 같은데?”
지난 닷새.
하루에 일곱 시진 이상 말을 달리는 여정은 생각보다 고됐다. 물론 절정의 경지에 오른 운호에게는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강아현은 이제 막 일류에 발을 걸친 열일곱 살짜리 애송이다. 그 이동의 시간 중에 비급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렇지.”
“환검이라면 매농검과 비슷하려나? 난 매농검이랑 영 궁합이 안 맞았는데 말이야.”
“글쎄, 내가 대충 훑어본 바로는 매농검과는 조금 다를 것 같더라.”
매농검은 허와 실을 이용하여 싸움의 국면 자체를 조정하려는 목적을 가진 검술이다. 그런 만큼 굳이 분류하자면 환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받은 난풍검은 그와는 매우 달랐다. 지독하게 복잡한 초식을 통하여 상대를 현혹한다. 어찌보자면 이 검술은 본래의 자운검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단, 자운검이 그 복잡한 과정을 통하여 위력을 극대화했다면, 난풍검은 그 복잡함 자체를 초식으로 옮겨뒀다는 차이 정도다.
“근데 이거 빈공간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게다가 중간중간 그런 글자로 유추된다는 부분도 너무 많고.”
“그래도 어쨌든 화산의 검술이잖아. 이미 익혔던 검술과 통하는 부분이 있을거야.”
“그럴까? 화산파의 검술은 서로 다른 문파에서 수집해온 검술이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당장 납매검, 매농검, 자운검만 보더라도 완전히 그 철학도, 논리도 다른 검술이고 말이야.”
운호가 웃으며 답했다.
“글쎄. 그런가?”
“뭐야? 운호 혹시 너 뭐 아는 거라도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