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강호행(4)
백수한이 자신도 모르게 쭈뼛 걸음을 멈춰섰다.
절정이라고 했던가?
오래간만에 본 운호 사형은 몰라볼 만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본래도 일류의 고수로 종종 저릿저릿한 기운을 뿜어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그것을 넘어섰다. 가끔 특강을 주관하는 일대 제자들이나 보여주는 그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백수한은 방계다.
그의 본가인 백가장은 섬서성 연안부 연천현이라는 곳의 지주로 인근에서는 그래도 제법 방귀 꽤나 뀌는 집안이다. 하지만 그의 본가에도 삼대조 할아버지 이후로 절정 고수는 없었다. 하지만 특별히 그의 가문이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애당초 연안부 전체를 통틀어 절정 고수라고는 오직 셋. 본래 절정의 고수란 그토록 귀하다.
장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그는 화산의 속가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을 자랑하는 태정문의 막내다. 태정문은 현 단위가 아닌 부 단위로 세력을 떨치는 문파였고 무려 삼 대 째 절정 고수를 배출했다. 물론 태정문의 절정고수는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었지만, 직계인 장호에게는 그저 할아버지일 뿐이다.
그 덕분에 절정고수에 대한 감각 역시 백수한과 크게 달랐다. 장호가 쭈뼛쭈뼛거리는 수한을 잡아끌고 운호 앞에 섰다.
“사형, 소문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추······, 축하드립니다!!”
운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제법 친해진 모양이로구나.”
“아, 네. 몇 가지 일들이 좀 있었습니다.”
장호가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과 무관하게 운호의 시선이 백수한에게 향했다. 운호가 보기에 두 사람의 조합은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저것은 그래, 마치 운호 자신과 이준형이 어울리는 모습이나 다름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교육되지 못한 아이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다.
잘못된 어른에게 배워 물든 것일까? 아니다. 서열을 만드는 것은 본능이며 단지 그 서열에 짐승과 같은 물리적인 힘만이 아닌, 사회적인 힘. 그 부모의, 그 집안의 힘이 포함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호는 저 기수 먹이사슬의 최정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집안이야 이준형의 비화문보다 조금 부족했지만 보여주는 재능은 형인 장굉을 뛰어넘어 이준형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반면 백수한은 한미한 집안, 그나마도 방계였다. 물론 사고무친의 고아였던 운호보다야 나은 신세라지만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본인의 재능 역시 평범하다. 물론 한미하다고 해도 무가의 자식이었던 만큼 무공의 입문이 운호처럼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백수한은 과거의 운호보다 크게 좋은 상황이라고 보긴 힘들다.
그런 두 사람이 저토록 친밀하게 붙어 다닌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그저 아이들끼리 친하구나.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전 이준형과 그의 관계 역시 외부에서 지켜볼 때는 딱히 문제가 있는 관계가 아니었던 것처럼 저 아이들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데 쭈뼛거리는 수한과 그렇지 않은 장호의 모습을 보면 혹시나 하는 마음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침 먹으러 갈 시간인데 무슨 일이냐. 늦으면 음식이 부족할 수도 있을 텐데? 혹시 미리 자리를 맡아주는 아이가 있기라도 한 거냐?”
운호의 말에 장호가 절래절래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이제 애들도 쉽게 그런 짓 못 해요.”
“못 한다고?”
“네, 준형 사형이 아침 식사를 식당에서 하시거든요.”
“준형이가 거기서 아침을? 그러면 설마 걔가 다른 아이들 그런 짓 못 하게 혼내기라도 하는 거야?”
왜일까?
분명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한 편으로는 거부감이 생겼다. 본인이 어릴 때는 아무렇지 않게 운호에게 대신 줄을 서게 시킨 주제에 이제는 또 고아하게 정의의 사도인 척을 한다는 건가?
하긴 생각해보면 그때도 주로 장광에게 그런 더러운 일은 맡긴 채 자신은 한 발 뒤에서 이득만 취하곤 했었다.
백수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특별히 막으시는 건 아니에요. 그저······.”
“그저?”
“도착한 다음, 그냥 제일 뒤에 줄을 서세요. 다른 아이들이 먼저 드시라고 양보를 해도 항상 사양하시고요.”
“제일 뒤에 줄을 선다고?”
“네, 준형 사형이 직접 그렇게 줄을 서니까, 대신 줄을 서게 시키던 녀석들도 감히 그런 짓을 더 할 수가 없게 된거죠.”
정작 줄을 서야 할 때는 남에게 맡기더니 인제 와서?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까 전과같이 심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중한 아침밥도 포기하고 나에게 온 이유가 뭐야?”
“여기 수한이가 사형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에게? 뭔데?”
“그게 그러니까······.”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백수한. 그 옆에 선 장호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뭘까?
“사형께서는 내공이 아닌 검을 선택할 때 무슨 마음이셨나요?”
“응?”
조금 뜬금없는 질문.
장호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이참. 사형.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사형을 너무 존경해서요. 원래 이렇지 않은데 혓바닥이 좀 굳은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장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백수한이 처한 상황. 그가 내렸던 선택. 이준형의 조언. 그리고 현재 고민하는 부분까지.
운호의 시선이 다시 수한에게 향했다.
어쩐지 처음 화산에 왔을 때의 자신을 생각나게 해서였을까? 처음부터 이상하게 눈길이 가던 녀석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운호 자신은 화산을 떠나 어딘가 갈 곳이 없었지만, 백수한은 방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개 현에서 지주 행세를 하는 가문이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화산의 속가라고 하면 그래도 그 가문에서는 제법 대우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아득히 먼 훗날의 것을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하는 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멍청한 짓이다. 참으로 준형이 다운 말이로구나.”
“네? 하지만 준형 사형 말씀으로는 운호 사형이야말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포기 하지 않았지. 하지만 동시에 내가 한 것은 도전이 아니었다. 도전은 여유가 있는 자의 특권이지. 마치 준형이처럼 말이다. 나는 그보다는 뭐랄까······. 그래. 떨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봐야겠지.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사고무친의 고아다. 특별히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지. 난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못’한 거다.”
-꿀꺽.
생각보다 훨씬 솔직하고 진지하며 어두운 이야기에 두 사람이 침을 삼켰다.
“워워, 너무 그렇게 어두운 표정들 지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성공한 후에 바라보는 과거의 발버둥은 생각처럼 비참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나의 조언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어디 보자. 사실 내가 수한이 너의 인생을 책임질 것도 아닌 이상에서야 검술을 선택해라, 내공을 선택해라 말을 해줄 수는 없겠구나. 그건 오롯히 너의 선택이고 너의 책임이니까. 다만 한 가지. 네가 도전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조언을 해주고 싶구나.”
“도전을 할 수 있는 여유라고요?”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한은 운호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는 운호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번뜩이는 검의 재능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최악의 경우에도 그를 맞이해줄 고향집이 존재했다.
백수한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표정을 보니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구나. 다행이다.”
“저도 감사합니다!!”
“그래, 궁금한 점이 다 풀렸으면 어서 식당으로 가보거라. 늦으면 부스러기도 먹기 힘들테니.”
“네!!”
수한을 따라 장호 역시 운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로 친한 친구인가? 애당초 운호에게 뭔가를 물은 것 역시 수한에게 필요한 질문이었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약한 아이를 앞장세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 질문 자체가 장호에게는 하등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운호가 등을 돌려 식당을 향해 걸어가던 장호를 불러세웠다.
“아, 장호야. 잠시.”
“네? 운호 사형. 하문하실 일이라도?”
“별 건 아니고. 방금은 네 일도 아닌데 어째서 아침밥도 못 먹을 각오를 하고 수한이를 도운 것인지 궁금해서 말이다.”
운호의 질문에 장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당연히 친구니까요.”
“친구?”
“네, 뭐 이래저래 꼬인 구석도 있고 가끔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친구 아닙니까. 친구를 위해서라면 아침밥 한 끼 정도야 못 먹을 수도 있죠. 아마 수한이 이 녀석도 제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안 그러냐?”
“뭐 그리 당연한 소리를······.”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운호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우정이라니.
운호는 조실부모하고 거리를 홀로 떠도는 아이였다. 그가 살아온 세계는 쉰 밥 한 덩이에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세계다.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 했던가? 건달의 가랑이를 기어서라도 목숨을 보전해야 했다. 그것은 화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호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도 비슷한 사람이 존재했다.
남궁철.
어쩌다 보니 ‘어, 어, 어.’하는 사이에 의형제까지 돼버렸다.
하지만 운호가 그것을 받아들인 데에는 본능적으로 남궁철이라는 사람이 보냈던 감정이 부정적이거나 음흉한 것이 아님을. 정말로 ‘좋은 마음’이 담겨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화산으로 인도했던 그 노도사.
조가촌의 혈사에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았던 진정한 협사.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운호는 자신의 가슴 한구석에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운호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도 저자에서 살아남았으며, 여기 화산의 본산 제자까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그는 사람의 ‘선의’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 말랑한 것을 믿기에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팍팍했다. 무엇보다 이곳 화산에서조차 그에게 순수한 의미에 ‘선의’를 베푼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사부인 공야찬조차도 음흉한 속셈을 숨긴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돌이켜보니 그의 인생에 아무 이유 없는 선의를 베푼 이가 무려 둘이나 됐다.
그렇게 이 순간, 운호는 인간의 행동 원리 가운데 악의와 잇속이 아닌, 선의라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운호에게 생각보다 큰 깨달음이었다.
* * *
둥근 보름달이 서쪽으로 저무는 시간. 저 동쪽 하늘에 이글거리는 붉은 빛이 감돌았다. 태양이 떠오를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옥녀봉 정상에 마련된 작은 공간.
강진이 준비해둔 그 공간에는 밤사이 쌓인 음기가 그득했다. 대연무장에 깔아둔 한옥에 맞먹는 효율이다.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음에도 이런 효과라니. 설마 이것이 진법이라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간의 정중앙.
굳게 딛고 선 바닥에서는 밤사이 쌓인 음기가 올라왔고, 머리 위 백회로는 막 떠오르는 태양의 양기가 쏟아졌다.
화산의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운호는 강진이 내민 혼원단(混元丹)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