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강호행(1)
남궁강은 무한에 모인 칠대세가와 구대 문파의 수장들. 그리고 거기에 개방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협의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림맹이라 부를 만했는데 이전의 무림맹들이 일시적인 협력체계로 단기간에 물자와 인원을 차출하여 빠른 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하고 해산하는 형태였다면 이번의 무림맹은 단기적인 목표가 아닌 중장기적인 목표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였다.
“본좌 역시 이번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중차대함을 절감하고 있네. 그러니 그만큼 무거운 마음으로 맹주직을 수락하겠네.”
남궁벽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아들 남궁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였다면 저 자리는 모용경이 차지했을 것이다. 모용경이 아니더라도 저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갖춘 이는 많았다. 문제는 이번 사태로 인하여 너무 많은 고수가 사망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사안이 사안이다. 무림맹을 대표하려면 적어도 천무십칠성 정도의 이름값은 필요했다.
“맹주라, 무리일 것 같구나. 우선은 몸을 추슬러야 하고 개인적으로 그 마교의 괴물에 대해 호기심이 아주 잔뜩 생겨서 말이다. 제대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구나.”
“그거라면 맹주 자리에 올라서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맹의 자원을 이용한다면 개방만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아서라. 누굴 바보로 아느냐.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연합이다. 맹주 자리에 올랐다고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냥 속 편히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최고다.”
개방의 걸왕 소진평은 단칼에 거절했다.
“사제들이 귀천했다. 게다가 설명을 들어보니 그 악적의 무공이 실로 천외천의 경지더구나.”
화산의 권신 청무 진인 역시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점창과 아미를 비롯한 여러 문파들 역시 초절정의 고수가 죽지 않았을 뿐, 문파의 정예가 삼 할 이상 사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더했다. 소림이나 팽가, 무당과 같이 초절정의 고수가 참가한 곳은 제자들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 외에 초절정 고수가 참가하지 않은 문파들이 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절정의 고수들을 더 과하게 파견했다.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워낙에 거리가 멀었던 곤륜 정도였다. 하지만 곤륜이야 본래 서장과 투닥거리는 것이 일상인 곳이라 이번 일에도 그리 큰 도움은 주기 힘든 곳이니 큰 의미는 없다.
게다가 남궁벽 본인이 무림 맹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사실 남궁세가 역시 피해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 남궁벽은 이번 회합에 참가할 예정이 아니었던 관계로 그들 역시 문파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창궁대 전원이 이번 회합에 참가했다. 게다가 가문의 직계인 남궁혜가 사망했다. 손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현재 남궁가의 가장 큰 수입은 안휘성의 막대한 농지에서 나오는 지대가 아닌 한상. 즉, 소호에서 시작하여 남경까지 이어지는 장강의 물류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하여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흔들림을 인식한 장강의 수채들이 슬금슬금 움직임으로써 그 물류망이 크게 흔들렸다. 즉, 남궁세가 역시도 지금은 가문을 추스를 상황이지 절대 외부로 세력을 투사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남궁벽의 의지는 완고했다.
가문 유일의 초절정 고수이자 가장 큰 어른이다. 비록 경제권을 장악한 남궁강이 현재 가문의 실세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나오는 아버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분간은 최대한 사고만 치지 못하게 막아보는 수밖에······.”
“네, 장인어른. 미력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남궁강의 옆에 선 제갈첨의 한쪽 어깨가 허전했다. 또한 그 안색 역시 파리했다. 당연한 일이다. 일류의 고수라고 해도 한쪽 어깨가 날아가고 그만한 출혈이 있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용하다. 아마도 마교 대제사장의 심검이 조금만 더 늦게 풀렸더라면 아마 그의 사인은 과다 출혈이 됐을 것이다.
현재 무한에 모인 무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와 같았다.
게다가 제갈첨이야 애당초 자신의 재능이 무공으로 끝을 볼만한 재능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비교적 그 실망감은 덜했다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일순간 신체의 결손이 생겨 무위가 하락했을 때 생기는 정신적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래도 어찌 됐건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남궁강이 저 멀리서 강호의 명숙들에게 연거푸 술을 권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 * *
오래간만에 돌아온 화산은 여전했다.
찌를듯한 산악의 기세도, 어지간한 경공의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기암절벽들도. 그리고 그 사이사이 조금씩 푸르름을 보이는 나무들까지.
하지만 그 산을 바라보는 운호 자신은 여전하지 않았다. 이미 설명으로 들어 알고 있었던 하지만 느낄 수는 없었던 산의 ‘정기’라는 것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화산여립(華山如立)이라. 화산의 기세가 꼿꼿하긴 하구나.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했다. 이런 기세의 산악에 어울리는 무공이라면 응당 날카롭고 아름다운 검공이어야 하거늘, 어째서 저 누워있는 숭산(嵩山如臥)에나 어울릴법한 그런 형태인지 말이다. 네 무공을 보니 이제야 화산에 어울리는 무공 같구나.
‘어르신, 이렇게 대낮에 마음껏 말을 걸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목운평 조사님께서는 정말 급한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그러지 않으셨는데요.’
괜찮다. 괜찮아. 이거 뭐 영향력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미미한 수준이다. 그 양반이야 워낙에 쪼들렸으니 이런 거라도 아껴보려고 했던 것이고. 나야 뭐.
돌이켜보면 목운평 조사는 정말 강력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거세한 좋게 말하자면 일종의 구도자, 나쁘게 말하자면 강박증 환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좌부원은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자유로웠으며 그 어느것에도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목운평 조사가 가장 많이 공과격을 투자했던 무공의 전수에 소극적이었다.
‘그럴 힘으로 저 검술이나 좀 더 상세히 지도해주시면 안 됩니까?’
검술? 검술이라면 매일 밤 그렇게 열심히 검을 나눠주는 거면 충분한 거 아니더냐.
‘아니, 사조님은 그보다 더······.’
그거야 그 양반이고. 게다가 애당초 난 화산파 검술 따윈 모른다. 내가 만났던 화산파의 검객이라는 놈들은 죄다 얼치기였다. 그렇다고 내 검술을 알려주랴? 화산파 놈이 남해 해룡방의 검을 익혀 무엇 하려고?
화산의 검술을 익혀 그것을 집대성하고 그것을 체계화시켰던 천중일검 목운평은 자신의 무공을 후대에 전달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삼류 시골 무관의 무공을 기본으로 자신의 무공을 완성했던 좌부원의 사정은 조금 달랐다.
‘솔직히 귀찮으신 것 아닙니까?’
멍청한 소리. 당초 절정이면 이미 일가를 이룬 고수다. 그쯤 되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야지 주입식으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해줄 때는 이미 지났지. 그 양반이야 뭐 친절함이 과했지만 난 아니다. 설마 운호 네 녀석 소천중일검(小天中一劍)이나 소파검(小波劍)이 되고 싶은 게냐? 뭐 지금 네 별호가 소신검(小神劍)이라니 계속 그렇게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남이 깔아둔 길로 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 길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무극(武極)에 한없이 가깝더라도 결국 그 길은 그 사람에게 가장 어울렸던 길이다. 물론 처음부터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이 남겨둔 길을 통하여 기고, 서고, 뛰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서 뛸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스스로 궁구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절정의 경지란, 일가를 이룬 고수란 그런 자격을 갖춘 경지다. 적어도 파검의 생각은 그러했다.
“고생했다. 드디어 집이로구나. 그러면 일단 짐을 풀고 저녁에 장문인을 찾아뵙거라.”
“네? 장문 사조님을요?”
공야찬의 말에 운호가 의아함을 표했다.
한구부에 머무르던 당시 장문인과는 이미 한 차례 만남을 가졌다. 당시 장문인은 운호의 경지를 보고 깜짝 놀란 기색을 보였을 뿐, 별다른 말은 남기지 않았다. 그저 몸조리를 잘하라는 의례적인 덕담을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화산으로 귀환하자마자 가장 먼저 보자고 하다니.
“그곳에서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굉명 사숙에게 이미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지만, 너의 이야기도 듣고자 하시는 것 같더구나. 또한 앞으로 너의 거취도······.”
“제 거취라고요?”
“보통 네 나이에는 일류에 이르는 것도 힘든 일 아니더냐. 그러니 보통 이립까지는 사문에서 오직 무공 연마에만 힘을 쓰기 마련인데 네 무위가 이미 절정에 이르렀으니 전례가 없는 일인 만큼 위에서도 고민이 많겠지. 예상하건대 다른 장로님들의 부름도 많아질 것이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야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물론 대부분 장로님은 검종은 술(術)이라 재능이 없으면 닿지 못한다며 경계하던 분들이다. 여전히 강경한 분들이야 네가 다른 제자들에게 안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하실 수도 있겠다만, 결국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武)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따로 만난다면 아마 대부분 장로님이 너에게 호의를 베풀 것이다. 그러니 뜯어낼 수 있을 때 최대한 뜯어내거라.”
그런 공야찬의 말에 좌부원이 흡족함을 표시했다.
-큭큭큭, 이 녀석 이거. 산에 사는 고리타분한 놈들과 다르게 제법 재밌는 놈이로구나.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검종의 무학이 기종의 무학처럼 시간의 흐름이 무조건적인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무려 십칠 세에 절정의 경지다.
커다란 변수만 없다면 초절정에 이르러 장기적으로는 천하제일인을 노릴만한 충분한 성취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검종을 홀대했던 화산파의 몇몇 장로들 처지에서는 자신들의 제자들, 그리고 그 후대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과하게 잘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네 나이에 너만한 명성이다. 아마 곳곳에서 너를 원하는 사람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장문께서 뭘 원하냐 물으신다면, 산에서 진득하니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을 청하도록 하거라.”
공야찬이 눈을 번뜩였다.
그 모습에 좌부원이 또 한 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챈 운호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저 속내는 빤히 보이는 거구나.
공야찬이 어리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화산의 이대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강호 경험을 가진 노련한 강호인이었으니까.
단지 검술에 대한 욕망이 그를 조금 앞설 뿐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운호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 * *
저녁 시간.
장문인의 처소로 가는 길.
파검 좌부원이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너도 눈으로 봐서 잘 알겠지만 넌 다른 놈들과 좀 달라. 네 사부 놈 말대로 하면 운호 너, 정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