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십년지약(6)
“그래도 이제 벌써 세 번째 만남인데 조금 더 친절하게 해주시면 안됩니까?”
“친절은 무슨. 잔소리하지 말고 덤비기나 해라.”
생전 파검의 마지막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보다 약 20년 정도. 더 젊어 보이는 외양이다. 아마도 저것이 그가 기억하는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일 것이다.
-쾅!!
젊은 시절 파검은 낭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북방에서 원제국의 잔당과 벌였던 서른일곱 번째 전쟁에서는 터무니없는 수준의 공을 세워 장군 자리를 제안받았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다.
당시 그는 파검(波劍)보다는 파검(破劍)이라는 별호가 더 어울릴만한 무공을 선보였었다. 본래 검이란 소모품이다. 전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무림의 고수들이야 잘 제련된 검을 내기로 보호해가면서 싸운다지만 전장에서는 그 한 톨의 내공조차 아깝다.
“무엇보다 군 소속으로 싸울 때 좋았던 점은 무기가 공짜였다는 점이지. 게다가 부족하면 주변에 널린 놈 주워 쓰면 그만이었으니까. 대충 보니 네 녀석도 산에 틀어박혀서 경문이나 외우는 거로 강해지는 유형은 아닌 것 같은데. 북방의 전쟁터에 한 번 가보는 걸 추천한다. 이런 실전을 모방한 가상과는 다른 진짜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후읍
운호가 크게 호흡했다.
포원공 이단공에 이어 절정. 갑작스럽게 상승한 경지인 만큼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완벽하게 운호와 동일한 무공을 사용하던 증무진인과 달리 파검의 검술은 그야말로 파격(破格).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무초식의 경지가 이런 것인가? 싶은 수준이었다.
“참으로 말이 많으십니다. 증무 태사조님은 말 한마디를 아까워하셨는데 말이죠. 좀 괜찮으신 겁니까?”
“흥, 백 년을 넘게 묵어 사라지기 직전이었던 백(魄)과 이제 막 땅에 떨어진 이 몸이 같을 수는 없겠지. 게다가 나는 이미 만들어진 공간에 슬쩍 세들어 온 것이니 더 부담도 없고 말이야.”
“그런 거라면 조금 더 자세히 설명도 좀 해주시고 그러는 건 어떻습니까?”
-부웅
파검의 검이 운호의 이마를 스쳤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한줄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또 그런 쪽으로는 효율이 워낙에 엉망이라서. 게다가 한정된 힘이다. 다하는 순간 나도 그 양반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거고. 아낄 수 있을 때 아껴둬야지.”
“공과격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그거 어차피 저를 통해 조금씩 충전되는 거 아닙니까?”
“공과격은 무슨. 누가 도사 아니랄까봐 참으로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놨구나.”
사실 이상하기는 했다.
본래 도가의 공과격이란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를 공덕과 죄과로 분류하여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수에 의거하여 화복(禍福)이 결정되는데 이는 수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리고 현재 화산에서 운영하는 공과격 역시 그것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점수 제도다. 하지만 증무진인이 말하던 공과격은 그와 너무 달랐다.
운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증무진인 목운평이 공과격의 공격이 증가했다고 할 때가 어느 때였는지. 처음에는 그저 운호 자신의 성취에 달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영향력라고 해야겠죠?”
“잘 알고 있군.”
중요한 것은 운호 자신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운호의 행동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 그리하여 그 행동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백(魄)이란 결국, 생전 그 사람의 행동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쉽게 흩어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증무진인이나 파검의 경우가 특별하다고 봐야 했다. 우화등선을 할만큼 고등한 영혼이기에 인세에 이토록 강력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한계는 존재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 언젠가 흩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는 것이 증무진인이 말했던 공과격, 파검이 말하는 영향력이다.
“그렇다면 제가 전 중원에 이름을 날릴 만큼 유명해지면 그 영향력이라는 것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까?”
“글쎄.”
운호의 매농검이 파검을 유혹했다. 하지만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유혹이 너무 매력적이라 사로(死路)인 걸 알더라도 가고 싶어지기는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계산은 나보단 네가 나은 것 같단 말이지.”
오히려 방비를 단단히 굳힌 곳을 거침없이 힘으로 파고 들어온다.
-쾅!!
동일한 힘. 동일한 내공.
그렇기에 일 점 공격에 모든 힘을 쏟은 파검의 검이 운호의 검을 크게 튕겨냈다. 파검의 검이 능숙하게 운호를 위협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영향력. 그래, 네가 전국에 이름을 떨칠 만큼 영향력을 쌓으면 제약에서 벗어나느냐고 물었지.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게 아무래도 너라는 매개체를 거쳐 전해오는 거라 그런지 효율이 굉장히 엉망이야. 게다가 거리의 영향도 상당히 받는 것 같단 말이지.”
무초식이라고 하여 무조건 더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초식이라는 것은 어느 특정한 동작을 가장 효율적인 근육과 기맥을 활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정형화해둔 틀이다. 무초식은 자유롭지만 그만큼 그 틀에서 벗어나 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던진 고수가 아닌 이상에서야 모든 동작 하나하나에 최선의 위력이 실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본래의 파검은 그러한 고수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운호와 같은 절정의 경지다. 동작 곳곳에 파탄이 드러난다.
지금처럼!!
운호의 검이 파검의 허벅지를 스쳤다. 그 일격에 파검이 잇몸을 드러내며 흉폭하게 웃는다.
문제는 그 파탄이라는 것이 어떤 순간에는 마치 의도적으로 노출시킨 약점이었던 것처럼 대단한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흡사 매농검과 같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매농검이 엄밀한 이성 위에 쌓아 올린 탑이라면, 파검의 저런 공격은 본능의 번뜩임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파검과 증무진인의 가장 큰 차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
허벅지에 운호의 공격을 허용한 파검의 오른손이 벼락처럼 쏟아졌다.
대제사장과 싸우던 당시, 인간의 규격 너머에서 보여주던 움직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백히 운호가 낼 수 있는 최대치를 넘긴 힘이다.
-서걱
운호의 오른팔 하박이 완전히 잘려나갔다.
-쿨럭
동시에 파검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검은 망설임 없이 운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너무 얌전해. 비등한 상대라면 손해를 좀 보더라도 이거다 싶은 순간에 쏟아부을 줄도 알아야지. 아, 물론 너무 실망할 건 없어. 너만 그런 건 아니야. 구대문파니, 칠대세가니 하는 곳에서 나온 애송이들은 대부분 다 그랬으니까. 오히려 넌 그놈들에 비하면 제법 과감한 편이야.”
“하지만 선배보다는 부족했다. 그거네요.”
“당연하지. 내가 북방에서 구른 기간이 몇 년인데. 고작 열일곱짜리가 이걸 따라오면 그건 그것대로 섭섭하다고. 아무튼, 대충 봐도 네 무공은 화산파의 다른 샌님들처럼 산에 틀어박혀서 숨만 쉰다고 늘어나는 종류의 무공은 아닌 것 같은데. 북방으로 가보라는 내 조언 무시하지 말고 잘 고민해보라고. 실전을 경험하기에는 최고의 무대니까. 뭐 지원이나 보수도 빵빵하고 말이지.”
* * *
“장호, 너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무슨 소식은 무슨 소식이겠냐. 당연히 운호 사형 소식이지. 이번에 무한 혈사에서 어마어마한 공을 세우셨다고 하더라. 절정지경에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
“에이, 그건 좀 너무 헛소문이다. 아무리 운호 사형이라고 해도 이제 열여섯인데 절정 지경이라니.”
“아냐, 얼마 전에 생일 지났으니 열일곱이시지. 그리고 난 왠지 운호 사형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서, 아쉬워?”
백수한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너무 아쉬워 하지 마. 준형 사형도 그러셨잖아. 운호 사형은 정말 일억에 하나 나올만한 재능이라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공에 집중하는 게 더 맞다고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한테 맞는 옷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건 그렇지만······. 그것도 화산에 본산 제자로 남을 수 있을 때 이야기지. 현종 사백 말씀처럼 3년 수학하고 무림에 내려가 생활하는 데는 차라리 검술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잖아.”
“또, 또. 그런다. 준형 사형이 뭐라고 그러셨는지 벌써 잊은 거야?”
“아득히 먼 훗날의 것을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하는 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멍청한 짓이라고. 운호 사형은 그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건 설사 내가 본산에 남지 못하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남궁철이 오지랖을 부렸던 그 수업 이후, 수한에게는 장호라는 친구가 생겼다.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 둘 사이가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몇 가지 사건들이,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십 년 인생에서 아주 중대했던 사건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호는 이준형을 매우 열렬하게 따르게 됐다. 물론 그럼에도 무공은 꿋꿋하게 검술을 고집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검종이 아닌 기종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 것은 누구보다 운호를 닮고 싶어 하던 수한 쪽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검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그것도 파멸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하지만 준형 사형의 그 말대로라면 내가 검술을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포기하는 것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멍청한 것이 아닐까?”
“어? 잠깐만. 뭐지? 뭔가 완전히 헛소리 같은데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얼빠진 농을 주고받으며 사당에 쌓인 먼지를 마른 걸레로 꼼꼼하게 닦아냈다.
“수한아.”
“어?”
“이건 내 생각인데, 너 그렇게 고민이 되면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물어본다고?”
“어, 운호 사형 돌아오면 물어보면 되잖아. 어느 게 좋은 선택일지 말이야. 준형 사형 말대로라면 운호 사형도 입산 초창기에는 너와 비슷한 고민을 하셨던 거잖아. 그러면 사형께 물어보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운호 사형께?”
“어, 장문 사조님과 장로님들이 떠난 것도 벌써 이 주 가깝게 됐으니 이제 슬슬 돌아오실 때도 됐잖아.”
수한이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할 일도 많고, 이제 정말 중요한 일들을 하실 분인데 내가 귀찮게 구는 게······.”
“귀찮기는. 어차피 너한테 그거 대답해주는 거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텐데. 운호 사형 돌아오시면 아침 자소공 수련이나 검술 총론 수업 때 한 번 물어보자. 어느 게 좋은 선택일지.”
“그럴까?”
* * *
종화가 무표정하게 검을 움켜쥐었다.
사조가 죽었다.
함께 생활하던 사백, 사숙들이 죽었고, 함께 수련했던 사형, 사제, 사매들이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그녀가 의식조차 하지 못했단 순간에 말이다.
모두가 다 그랬어. 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운호는 달랐다. 그녀는 감히 이해할 수도 없었던 그 마교의 수괴와 당당하게 싸우던 운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분했다.
또한, 자신과 함께 미묘한 감정싸움을 벌이던 남궁혜의 허망한 죽음이 떠올랐다. 그 아름답던 아이가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관리하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멍청하기는.”
들고 있던 검으로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썩둑 잘라냈다.
“이십 년······.”
방심을 깨달았던 열일곱 처녀가 다시 철혈의 무인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