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십년지약(5)
감추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해야 할까? 아니면 감춰야 할까? 또 만약 감춘다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고, 무엇을 숨겨야 할까. 순간적으로 운호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렇게 생긴 잠깐의 침묵.
먼저 입을 연 것은 권신 청무진인이었다.
“사별 삼일이면 괄목상대라더니. 고작 몇 달 만에 실로 놀라우리만큼 달라졌구나. 우화등선했다더니······. 파검 그 녀석의 도움 덕분인 게냐?”
“파검 대협의 도움은 맞지만, 이번 사건의 그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약간의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구나.”
한 사람은 사문의 가장 큰 어른이자 명실상부한 무림 최강의 고수 중 하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번 행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음에도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으며, 결국 자신의 내공 절반을 잃게 된 의인이다.
굳이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기사멸조의 대죄를 추궁당할까 봐? 운호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사부에게 곧바로 고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런 허황된 꿈을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기사멸조의 대죄로 몬다? 지금 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문파의 내밀한 이야기에 관련한 일이더냐? 확실히 개방의 방주인 소 선배 앞에서 그런 걸 떠들면 여기저기 다 소문이 나버릴 것 같긴 하지······.”
“예끼!! 그게 무슨 개소리냐. 정보를 유통하는 사람일수록 정보의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건 내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앞으로 다시 찾아올 재액에 관련된 일 아니더냐. 게다가 앞으로 20년 후면 말코 네 녀석은 몰라도 나는 아직 창창하게 살아 숨 쉴 때니 만수무강 하려면 미리미리 알아둬야지.”
“소 선배,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것 같은 꼴을 하고 참으로 욕심도 많구려.”
두 절대고수가 농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운호가 결단을 내렸다.
“증무 태사조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증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걸왕이 잠시 옆통수를 벅벅 긁었다. 평소였다면 비듬이 눈처럼 소복하게 쌓였겠지만 깔끔하게 감긴 머리에서는 좋은 향기만 풀풀 풍겨났다.
“증무 태사조라면. 천중일검 목운평 사조님을 말하는 것 아니더냐. 백운 태사조님 이전 화산파를 대표하던 검객이셨지.”
“아, 아!! 기억났다. 당시 백 세가 넘으셨던 무당의 시조 장삼봉 진인께 도전장을 내밀었다던 그 천중일검 목운평!! 당시 장삼봉 진인께 직집 사사하였던 무당의 일대 제자 일곱이서 펼친 천강북두진을 사백 초 만에 깨트렸지만, 아직 자신의 무공이 장삼봉 진인에게는 닿지 못했다며 스스로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운호도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무당파의 시조 장삼봉이라니.
새삼 증무진인이 얼마나 옛날 사람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면 설마 그 고금제일인은 장삼봉 진인을 말씀하셨던 건가?’
청무 진인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가는구나. 네게 재능이 있는 것은 알았다만, 그걸 감안 해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취가 매우 놀랍다 했더니, 목운평 사조의 절기가 네게 이어진 것이었구나.”
“아, 하긴. 화산의 제자가 어울리지 않게 검을 휘두른다 했더니. 분명 백 년 전만 하더라도 화산도 검의 명가로 유명하긴 했었지. 끊어진 절학을 물려받은 새로운 고수라. 헌데 그렇다고 해도 조금 이상하단 말이지. 그때 네가 보여줬던 무공과 기도는 지금과 완전 달랐어. 게다가 그 마교의 수괴가 너를 지칭했던 그 말······.”
아미타불의 화신.
“그리고 너도 분명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를 다 알아듣는 것처럼 굴었단 말이지······.”
“아미타불의 화신? 운호야,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잠깐의 망설임.
운호가 입을 열었다.
“사실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증무 태사조님께서 그자와 한차례 붙은 적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뭐라고? 아니, 증무 태사조라면 거의 백오십 년 전에 우화등선하신 분이 아니더냐. 헌데 그분께서 그날 무한에 나타났던 마교의 수괴와 싸운 적이 있다고? 그렇다면 대체 그자의 나이가 몇이란 말이더냐.”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청무진인이 의아함을 표했다.
걸왕이 운호를 대신하여 답했다.
“그자의 주장에 따르자면 자신이 저 서역의 석가모니불이 입적할 때 곁에 머물렀다고 하더구나. 뭐 그 말까지는 허황한 이야기라고 치더라도 무언가 특별히 오래 사는 비법이 있다고 봐야겠지. 마찬가지로 본인 주장에 따르자면 자신이 아라한이라고 하던데? 아미의 연화사태에게 물어보니 그게 반선과 비슷한 경지라고 하더구나. 그 날 보여준 위용을 생각하자면 뭐 맞는 말 같기도 하더구나. 우화등선하는 신선을 상대로 버텨내려면 적어도 반선 정도는 되야 격이 맞겠지.”
“마도(魔道)를 통해 반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말인가? 허어, 어찌 그런 일이······. 원시천존, 원시천존.”
“그 비법이라는 것, 제가 조금 들은 것이 있는 듯합니다.”
“들었다고?”
“네, 분명 환신(換身)이라고 하였습니다.”
“몸을 갈아탄다고?”
걸왕이 잠시 이마를 찌푸린 채 고민했다.
그 사이 청무 진인이 다시 운호에게 물었다.
“증무 태사조께서 마교의 수괴와 싸운 적이 있다는 것은 대체 어찌 알게 된 사실이더냐? 그리고 초절정의 무공을 보여줬다는 말은 또 무엇이고?”
“그게 그러니까······. 제가 물려받은 것은 증무 태사조의 무공만이 아니라 그분이 남기고 가신 백(魄)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증무 진인이 운호 자신의 몸으로 마교의 대제사장과 맞붙던 그때, 파검이 자신의 몸을 벗어던지고 천상으로 떠나던 그 때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우화등선하여 신선(神仙)이 된 증무 진인이 인세에 머물 수 있었으며, 그토록 많은 제약에 시달려야 했는지를.
엄밀히 말하자면 운호의 몸에 깃든 것은 증무진인의 영(靈)도 혼(魂)도 아니었다. 육을 벗어던진 증무 진인의 영과 혼은 이미 신선들이 거니는 선계로 떠났다. 남은 것은 증무 진인이 남긴 백의 편린 뿐이다.
운호가 그동안의 경험을 담담하게 나열했다. 침상에 기대 무언가를 고민하던 걸왕도 이내 운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건 정말이지······, 믿기 힘든 놀라운 일이로구나. 하지만 네 성취를 보고 있자면 믿을 수밖에 없구나.”
“게다가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괴물이 나온 판국인데 믿지 못할 것도 없겠지. 그나저나 그래서 그 싸움 이후로 천중일검이라는 양반은 어떻게 된 것이냐? 꿈에 계속 나오고 있느냐?”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래도 마지막에 저의 몸을 통해 사용하신 힘이 여력의 전부이셨던 듯합니다.”
그 말에 청무 진인이 크게 탄식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물론 너의 놀라운 성장에는 너의 재능도 있었겠지만, 그 꿈속 세상에서 수도 없이 경험하는 실전 역시 적지 않았을 것을······.”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지. 당장은 힘이 다하여 쉬고 있는 거고, 언젠가 또 나타날지도 모르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쩐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청무 진인이 운호의 양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너무 낙담하지 말거라. 지금 네 나이에 그런 성취 또한 유례가 없는 수준이다. 약관도 되기 전에 절정지경이라니. 석년의 달마 조사나 진무 진인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너의 타고난 재능이라면 앞으로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훗날 대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이십 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구만 대공은 무슨.”
걸왕의 투덜거림이 권신 청무 진인이 답했다.
“소 선배, 그것은 이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니겠소.”
“뭐, 그건 그렇지. 어쨌거나 파검 그 망나니가 마지막에 이십 년이라는 제법 큰 선물을 주고 갔으니······. 아니 잠깐만? 천중일검 목운평 그 양반이 마교의 대제사장과 한 판 붙은 적이 있었다며? 게다가 우화등선을 했고. 그거 설마 마교가 근 백 년 넘게 준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천중일검 선배의 선물이었던 거 아니야? 이거 시기 상 조금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데? 분명 내 사부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마교의 대제사장이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고 들었거든. 그러니까 기록상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게 거의 백오십 년쯤 된 것 같은데?”
“아, 네, 그러고 보니 분명 태사조님이 마지막에 파검 대협이 석년의 자신에게 미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운호의 말에 청무 진인이 나지막하게 도호를 외웠다.
증무진인은 사문의 기록에도 그저 우화등선했다는 글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헌데 그런 사조가 사실 마교의 준동을 백 년 넘게 막아낸 영웅이라니.
“에잉, 그렇다면 파검 그 녀석도 이왕이면 백년쯤 선물해줬으면 이런 귀찮은 일 신경 안 써도 되고 좋았을 텐데. 하여간 마지막까지 늙은이를 귀찮게 하는 구만.”
“노선배도 마음에 없는 소리 하기는. 말년에 할 일도 생기고 좋지 않소.”
“뒷산에 틀어박혀서 팔자 좋게 무공만 연마하던 네 녀석과 달리 나는 마교 아니더라도 할 일 많은 사람이었다.”
“아까 보니 후개도 많이 늙었던데 그런 일들은 좀 물려주고 그러시구려. 그보다 아까 환신이라는 말에 뭔가 생각난 것 같던데 뭐였소?”
“아, 별 건 아니고. 서장 포달랍궁의 활불이 그와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고 들었다. 환신은 아니고 환생이라고 하던데. 한 300년쯤 됐나? 지금 활불이 5대 활불인데 초대 때부터의 기억을 다 간직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그냥 사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런 일을 경험하고 보니 왠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소.”
걸왕과 권신이 대화를 이어갔다.
팔십 년 가깝게 강호를 종횡해온 인물들답게 참으로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하나하나가 강호의 비사라고 해도 될만한 이야기들.
“아차차, 우리가 너를 세워둔 것도 깜빡하고 너무 오랫동안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절거렸구나.”
“아닙니다.”
“아니다. 너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황이 없을 터인데. 가서 볼일 보도록 해라. 아, 나가는 길에 남궁 가주에게 우리가 찾는다는 이야기도 좀 전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운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방문을 통과하는 순간 무언가 기묘한 감각이 느껴진다. 아마도 걸왕이 주변과의 소리를 차단해놨다는 기막(氣膜)인 듯싶었다.
그리고 운호가 나간 방.
걸왕이 물었다.
“거짓말은 없었던 것 같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없었소.”
“뭐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거의 확실하겠지. 네 녀석 타심통(他心通)이야 말로 강호 일절 아니더냐.”
“그런 거창한 것 아닌 거 알잖소. 그냥 경지에 오르며 생긴 육감의 발전 정도지.”
* * *
늦은 밤.
참으로 피곤한 하루였다. 걸왕에게 불려간 이후로도 많은 명숙들이 그를 찾았다. 아마 사부가 아니었다면 이보다 더 피곤한 하루가 되지 않았을까?
운호가 눈을 감았다.
-처······ㄹ썩. 쏴아아아아.
집채만 한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가.
천상으로 떠난 한 무인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입을 열었다.
“늦었군. 얼른 칼이나 잡아라. 피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