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십년지약(4)
그것은 노골적으로 진득한 욕망이었다. 어찌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운호 역시 그 진득한 욕망을 읽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호는 자신의 사부가, 저 공야찬이라는 인물이 싫지 않았다.
운호의 시선에 공야찬의 하얗게 센 옆머리가 보였다.
기본적으로 구파의 무인들은 저자의 사람들보다, 혹은 속세의 무인들보다 노화가 늦다. 당연한 일이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심신을 수양하니 저자에서 악다구니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천천히 늙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화산의 무인들은 특히 더 천천히 늙는다. 자하신공의 영향이다. 그렇기에 공야찬은 더욱 눈에 띈다. 공야찬의 노화는 화산파라는 특이성을 떠나 그가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며 청정도량에서 수양하는 도인임을 고려했을 때 이례적으로 빠르다. 거의 저잣거리의 속인에 비할만하다.
운호는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다.
첫째 이유는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육체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을 들 수 있었다. 현종자 공야찬은 화산의 이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임무를 수행한 제자다. 이는 지난 잔살비마의 혈사로 그의 사부가 사망한 덕분에 그를 비호하는 직계가 없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야찬 스스로가 자처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덕분에 그는 이대 제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공과격을 쌓을 수는 있었다.
두 번째로는 공야찬이라는 사람이 받는 정신적 압박감이다.
운호는 검종의 무공을 잇는다는 이유로 그만한 재능과 결과에도 불구하고 사문에서 상당히 많은 차별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야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대 제자 가운데 흔치 않은 절정의 고수였음에도 그 대접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렇기에 사부는 아마도 강함에 집착했을 것이다. 공과격에 병적으로 집착한 것 역시 그의 일환일 것이다.
결국 무림은 무(武)로써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세계다.
검종? 기종?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강함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운호는 그 강함을 알고 있었다.
융통무애하며 천지와 하나 되는 감각. 공야찬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 영역이다.
하지만 머리에 새치만이 아니다.
공야찬 사부의 몸은 절정에 이르러 이미 인간의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것은 순간에 불과하다. 인간의 몸이란 결국 늙기 마련이다. 사부의 몸은 이미 노쇠화의 징조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본인도 그것을 잘 알 것이다.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일종의 도약이다. 물론 검종의 특성상 한 순간의 번뜩이는 깨달음으로 경지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술로써 도를 이룬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억지로나마 잠시 그 길을 밟아봤던 운호였기에, 지난 몇 년동안 공야찬과 검술을 연마해왔던 운호였기에 지금의 공야찬이 그 영역에 발 딛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아니, 노골적으로 말해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울지가 뻔히 보였다.
그렇기에 저 욕망은 저열하다기보다는 처절했다. 저것은 마치 운호 자신이 화산에 정식제자로 남기 위해 보였던 노력과 흡사하다.
운호가 공야찬의 욕망을 모두 읽었음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장 지금부터 기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그것이 그저 그때의 기억에 의존한 내용이고, 사문의 가르침에 충돌하는 부분이나 혹은 오류 등이 있을지도 모르니 사부님의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공야찬이 활짝 웃었다.
“그래!! 당연하지. 그야 사부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더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선은 몸을 잘 추스르고, 서둘러 기록에 들어가도록 하자꾸나.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강진 그 녀석이 너에게 전해주라는 약을 깜빡할 뻔했구나.”
공야찬이 운호에게 최악의 맛을 자랑하는 강진 표 벽곡단을 한 보따리 안겨주었다.
이번 여행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던 터라 준비해둔 벽곡단이 슬슬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비록 수명을 갉아먹는다는 중대한 결점이 있긴 했지만 증무진인이 직접 선단(仙丹)이라고까지 극찬한 단약이었다. 이런 일로 복용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십 년······.
운호는 파검 좌부원의 마지막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또한, 증무진인의 그 아쉬운 한탄 역시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나의 마지막 정도까지는 도달해주기를 바랬건만······. 이것은 그 이하다.
운호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파검 좌노사의 경지를 말했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대화를 통해 유추해봤을 때, 마교의 수괴와 증무진인은 안면이 있어 보였다.
140년 전 우화등선을 했다고 알려졌던 증무 진인과 안면이라니······. 게다가 기생(寄生)이 아닌 환신(換身)이라는 말도 묘하다. 정말 마교의 수괴는 자신의 이야기처럼 이천 년을 살아온 것일까?
그 악몽과도 같았던 무공들이 기억났다. 이십 년 후에는 다시 그 끔찍한 무공을 상대해야만 한다.
최소한 초절정. 마교 수괴 앞에서 그 이하는 그저 무력한 개미처럼 쓸려나갈 뿐이다.
아니, 아니다.
초절정으로도 부족하다. 파검 좌부원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었다. 무신 모용경 역시 거의 그 경지에 근접한 무인이 분명했다. 지금 남은 천무십칠성 전부를 모은다고 해도 그만한 힘을 만들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이야 다 그렇다 치더라도 파검 좌노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우화등선이다.
증무진인이 말했다.
허락이라기보다는 의무이며 목적이고 이렇게 나와 자신이 마주하는 이유라고.
그렇기에 오직 운호 자신뿐이다.
“동생!!! 동생 있는가!!”
문밖에서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 이곳 남궁세가에서 저런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남궁철이다.
“어? 공사숙께서도 계셨었군요.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사숙?”
공야찬도 강호에서 구를 데로 구른 노련한 강호인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남궁철의 호칭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제 의동생의 사부이시니 당연히 저에게는 사숙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동생?”
공야찬의 시선이 운호에게 향했다.
“그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하기로 하긴 했습니다만······.”
운호가 잠시 말을 삼켰다.
이전과 다름없어 보이는 남궁철이었지만 그럴 리가······.
잠깐 정신을 놨다 깨어났을 때, 바로 자기 옆에 있던 여동생이 그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시체가 돼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남궁철의 가슴께로 향했다.
보이지 않던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남궁혜의 약지를 태우고 남은 뼛가루가 담긴 목걸이다.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의형제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의형제 맞습니다.”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니 물론 저와 동생의 이야기는 중요하긴 합니다만, 걸왕!! 걸왕 어르신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동생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걸왕 소노사께서 우리 운호를?”
이번 무한 혈사.
초절정 고수 가운데 검왕 남궁벽과 함께 유이한 생존자인 걸왕 소진평이 정신을 차리자 마자 백운호를 찾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걸왕이 머무는 전각으로 쏟아졌다.
* * *
걸왕 소진평은 강호 무림의 최강자 중 하나였다.
특히 삼 갑자에 달했던 진기는 그 양만으로 따지자면 천하무림을 통틀어 손에 꼽을만했다. 하지만 마교 대제사장과의 사투를 끝내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에 충만하던 진기는 반 토막으로 줄어 있었다.
“니미럴······.”
하지만 진기의 소실은 정신을 잃기 전에 이미 각오한 부분이었다. 한 번만으로도 며칠을 앓아누울 절초를 연달아 세 번을 사용했다. 게다가 그 마귀의 공격을 호신강기로 받아낸 게 대체 몇 번이던가.
물론 각오했던 것보다 손해가 더 크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목욕이라니······.”
“사부님, 그게 어쩔 수 없었답니다. 의원들이······.”
“끄응······. 그래, 뭐 네 놈들이 무슨 잘못이겠느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만장일치의 답변을 얻기 어렵지만,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은 만장일치의 답변을 얻을 수 있다.
걸왕 소진평이다.
오죽하면 그가 호신강기를 완성한 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몸의 때가 씻겨 나갈까 걱정돼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때가 지금은 완벽하게 벗겨져 있었다. 때로 완벽하게 보호되던 뽀얀 피부가 공기와 맞닿은 느낌이 참으로 어색하다.
“소 노사님!! 찾으셨던 운호 데리고 왔습니다!!”
얼마 전, 남궁벽 그 망종과 좌부원 그 망나니가 싸움박질하려던 장소에 있던 아이였다. 당시에도 나이에 비해 제법 비범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 열일곱에 절정이라니.
하지만 이것조차 그날 이 아이가 보여줬던 모습에 비하자면 하찮다.
“이 아이와 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자리를 비켜라.”
“네? 사부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얼른 안 비켜?”
소진평의 짜증 한 번에 벌써 육순이 가까운 늙은 후개가 군말 없이 빠르게 물러났다.
“네, 그러면 앞에서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다들 나가지 않고.”
“어이, 공가야. 걱정하지 말아라. 네 제자 놈 잡아먹을 생각 없으니까.”
소진평이 마지막까지 발을 떼지 않던 공야찬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절반이 넘는 진기가 사라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손짓에 실린 부드러운 경력은 절정의 고수를 그 의지와 상관없이 물러나게 했다.
소진평과 백운호.
둘만이 남은 방 안.
침대에 반쯤 몸을 누인 걸왕이 -끄응. 하며 힘을 썼다.
막대한 힘의 운용. 운호가 자신도 모르게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이야, 긴장하지 말아라. 그냥 주변과의 소리를 차단했을 뿐이니. 그래, 이야기는 다 들었다. 좌부원 그 망나니 놈이 한 일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걸왕이 씨익 웃었다.
여기저기 박박 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치아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듯 오염될 대로 오염된 치아가 참으로 검누렇다.
“참으로 핑계 하나 기가 막히게 잘 댔구나. 하긴, 좌가 그 망나니 놈이 우화등선할 줄이야. 대체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일이 벌어졌으니 말하기 귀찮은 것들 짬처리 하기 참으로 좋았겠지. 그렇지 않으냐?”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쯧. 그래, 뭐 수준 낮은 것들이나 멀리서 지켜보던 놈들이야 네 변명에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때 너는 분명 좌부원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걸왕 소진평이 눈을 빛내며 운호에게 힘주어 말했다.
“오히려 좌부원 그 망나니가 너의 꼭두각시였다면 또 모를까.”
잠깐의 망설임.
운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주변과 소리를 차단하셨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그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습니까?”
“클클클, 과연. 열일곱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이 우연은 아니로구나.”
걸왕이 웃음으로 운호의 질문을 긍정했다.
“그게 그러니까······.”
“잠깐. 지금 그 이야기 나도 좀 들었으면 하는데.”
운호와 걸왕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처······,청무 사백조님.”
“끄응······, 네놈은 또 대체 언제.”
“소 선배, 많이 약해지셨구려. 아이들 시켜 몸을 보하는 약이라도 한 첩 보내 드릴 테니 챙겨 드시구려. 그보다 운호야. 지금 소 선배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나도 좀 들어야겠구나.”
권신 청무진인.
이천리 길을 고작 다섯 시진 만에 주파한 절세의 고수가 아무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