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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99화 (99/288)
  • 99화

    십년지약(3)

    “이걸로 천무십칠성의 시대도 끝이야 끝!!”

    마치 계집처럼 요사스러운 화장을 한 사내가 단언했다.

    그 말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사내가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마치 사천왕상을 닮은 몸과 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멍청한 얼굴이었다.

    “글쎄······. 그럴까?”

    “흥, 당연하지.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헛소리였어. 천무십칠성이라니. 그런 식이면 우리는 사상 십이신 이십팔수 정도는 해야 맞는 말이지. 그깟 무림인이 뭐가 대수라고.”

    “이십팔수라니······. 물론 예비 인원이 있긴 한데, 그래도 아무리 탈탈 털어봐도 이십팔수까지는······.”

    “아이 참, 이 곰탱아.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 대체 누가 그걸 곧이 곧대로 듣냐. 나는 우리 숫자가 열여섯이니 그보다 하나 더 많게 열일곱으로 하겠다는 그 뻔한 심보가 아주 괘씸하단 말이야.”

    “그래도 강호를 대표하는 문파가 구파와 일방. 그리고 칠대세가였으니까······. 그걸 다 더하면 열일곱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

    “틀린 말이 아니기는. 그전까지 십대 고수니 뭐니 잘만 뽑던 자들이 갑자기 열일곱을 뽑은 건 누가 봐도 우릴 의식한 거지. 하여간 천무십칠성인지 뭔지 하나둘씩 나가떨어질 때야 그 자리를 누군가로 대신 메웠지만, 이렇게 됐으니 아예 명칭 자체가 바뀌겠지?”

    “글쎄······.”

    사내는 불과 삼 년 전 사부와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천하제일인이냐고? 허허, 글쎄다. 벌써 20년 전인가? 내가 아직 한창 피가 끓던 시절에 요녕 땅의 지배자라는 모용경과 한바탕 싸운 적이 있었지.”

    “그래서요? 어떠셨습니까? 소문처럼 쓸만하던가요?”

    “반 수. 내가 반 수 차이로 밀렸다.”

    “네? 사부님이 밀리셨다고요?”

    “이 녀석이?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느냐. 내가 진짜 천하무적이었다면 진작에 저 몽골과 여진의 달자 놈들을 싹 쓸어버렸겠지.”

    “아니, 그거야······.”

    “경지 맛 좀 봤다고 교만해지지 말아라. 건국 당시 태조께서 무림의 세력들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사내의 사부는 참으로 강한 인간이었다. 아마도 무극(武極)이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닐까?

    헌데 그런 사부를 상대로 승리를 했다니.

    물론 그 모용경이라는 작자는 이번 사태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에 따르자면 천무십칠성 가운데는 그 모용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가 무려 둘이나 더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십삼 년 전이면 사부도 이제 막 초절정에 올랐을 때이니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얼추 지금의 사내 자신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찌 됐건 확실한 것은 요즘 제국군 사이에 퍼진 분위기와 달리 무림의 무공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사내가 여전히 우둔한 얼굴로 수더분하게 웃으며 답했다.

    “뭐, 그건 우리 백공공 나으리가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을까요?”

    “흥!! 이 곰탱이가 어울리지도 않게 아부를 하는구나.”

    * * *

    소리와 빛이 사라진 깊은 공동.

    적막함이라는 단어조차 어둠 속에 파묻힌 그곳에 어둠과 하나된 사내가 있었다. 굴강(屈强)이라는 단어를 사람의 형상으로 빗어낸다면 이런 모습일까?

    권신 청무 진인.

    이미 그의 얼굴에 화산에서부터 삼백 리 길을 단박에 달려 역천검귀를 처단하면서 생겼던 내상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청무진인이 지금까지 복용한 영단이 대체 얼마인가.

    천하에 다시 없을 영약인 매화신단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복용한 영단의 가격만해도 장원 네댓 개는 너끈하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

    그의 콧구멍을 따라 흘러나온 부드러운 기운이 어두운 공동안을 가득 메웠다. 자하(紫霞)라함은 전설상에 신선들이 사는 궁전을 뜻한다. 지금 이 공동안을 가득 메운 진기가 그러했다.

    청무진인의 몸이 서서히 석 자 높이까지 떠올랐다.

    상서로운 서기가 번뜩인다.

    공간이 녹아내리고 하늘이 노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침내!!

    아니, 부족하다.

    비현실적으로 녹아내리던 공간이 본래의 어둠을 간직한 석실로 돌아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석실이 어둠을 되찾았다.

    청무진인이 깊숙한 날숨과 함께 눈을 떴다.

    빛이 없던 동굴 안에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

    “어렵구나······. 어려워. 정말 길이 있긴 한 것일까?”

    어울리지 않는 한숨.

    신공의 완성은 오직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뜻일까? 한 걸음, 아니 어쩌면 반 걸음.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물잔을 넘치게 하는 것이 한 방울의 물이지만 동시에 한 방울의 물이 더해지지 않은 물잔은 영원히 넘칠 수 없는 법이다. 이렇듯 도무지 자하신공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은 찾을래야 찾아지지 않았다.

    이미 기경팔맥을 가득 메운 내공은 정순하기 그지없다. 자하기공 구단공에 이르러 그 끈끈함이 이제는 고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양적인 누적이 거듭되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질적 변화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현재 청무 진인의 성취는 그야말로 인간의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석년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던 백운진인의 그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지.

    인간으로 태어나 종의 한계를 벗고 탈인의 길에 접어드는 것은 지난하기만 하다.

    청무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까지 여기에서 숨을 쉰다고 성취가 느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요 며칠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대공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던 터라 억지로 그 불안을 억누르기는 했지만, 이대로 계속 억누르는 것은 해가 될 성싶었다.

    무엇보다 권신 청무진인은 그 성취가 인간의 끄트머리에 닿아 있는 고수다. 그런 고수의 직감이란 단순히 직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리는 천기가 담겨있다. 물론 그것보다는 단순히 대공의 직전 찾아온다는 심마(心魔)일 확률이 더 높았지만 말이다.

    수련동의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하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햇빛이 오랜 시간 빛을 접하지 않았던 그의 눈을 두들겼다. 하지만 이미 초극을 두드리는 그의 신체는 그것조차 그저 여실하게 받아들였다.

    “사형!!”

    “청허로구나.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울상이더냐.”

    “사형들이!! 사형들이!!”

    “청우와 청공이?”

    등골을 타고 쫙 올라오는 소름.

    설마 며칠 전부터 느끼던 그 불안감이 단순히 깨달음의 순간을 방해하려는 심마가 아니었던 것인가?

    “귀천했습니다!!”

    마흔 즈음의 청수한 중년인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청허의 나이 올해로 여든. 그 팔십 년의 세월 가운데 청우와 청공과 함께 보낸 세월이 물경 칠십 년이다. 수도 없이 다투고 화해했다. 그것은 여기 운대봉에 은거를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가족이요, 형제다. 그리고 그것은 권신 청무 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휘청.

    인간의 한계를 넘어 등선의 길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도 정(情)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청무 진인이 아직 탈인(脫人)의 길에 접어들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그의 거대한 몸이 한순간 휘청하더니 수련동 입구의 거친 석벽을 움켜쥐었다. 그 손길 앞에 오랜 세월을 버텨온 바위가 마치 모래알처럼 바스라졌다.

    “누구의 짓이더냐!!”

    “마교!! 마교입니다.”

    “마교?”

    -으드득

    창천에 해가 떠 있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청무 진인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는대로 상세히 이야기 해보거라.”

    “그게 그러니까. 무한에서 회의를 개최하는 찰나에 마교의 수뇌가 나타나 그만······.”

    무한에서 화산까지 밤낮없이 말을 달린다고 해도 사흘.

    자세한 정보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략의 이야기만 듣더라도 그 상황의 심각함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 자리에서 천무십칠성 가운데 무려 다섯이 죽었다. 청허와 청공까지 하면 초절정의 고수만 일곱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죽거나 크게 다친 절정의 고수가 이백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군문에서 부대 전멸의 기준을 삼할로 잡는다. 물론 무림의 기준은 군문과 다르지만 무림에서도 이만한 피해라면 전멸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그래서?”

    “지금 장문인을 비롯한 사질들이 한구부에 도착한 지 제법 됐을 것이니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서편으로 전해질 겁니다.”

    “아니!! 상황이 이토록 위중한데 아이들만 보내 어찌하겠단 말이더냐. 나를 부르든지, 아니면 직접 내려갔어야지!!”

    “그것이······, 수련동에서 느껴지는 사형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던지라. 게다가 마교의 악적들 역시 당분간은 쉽게 준동하지 못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적의 수괴도 십수 년은 요양이 필요한 상처를 입혔고, 제사장으로 추정되는 마인들도 여섯이나 참살했다고 합니다.”

    청무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마교의 팔대 제사장이라는 이름이 떠돈 지도 벌써 수십 년이다. 우리가 천무십칠성이라 하여 초절정에 오른 고수가 열일곱이 다가 아닌 것처럼. 그들 역시 그럴 확률이 농후하지 않더냐. 안 되겠다. 너는 화산을 지키거라. 내 당장 그 아이에게 달려갈 테니.”

    -쾅!!

    청무진인이 강하게 땅을 박찼다. 마치 포탄과 같은 굉음.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은 허공중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한구부으로 달려온 사람은 청무진인만이 아니었다.

    문파에 남아 이번 회합의 결과를 기다리던 초절정 고수들. 혹은 초절정 고수를 파견했던 문파의 중진들이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한구부로 몰려왔다.

    * * *

    “몸은 좀 괜찮으냐!!”

    “사부님!!”

    화산에서 헤어진 것이 고작 두 달 전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많은 일이 있었다. 운호는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지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부의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느껴지는 기도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운호 자신의 수준이 올라간 덕분일까? 이전과 같은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중에는 그들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과연 그들의 말이 옳구나. 절정······.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절정이라니······.”

    “운이 좋았습니다.”

    “겸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본디 강호에서는 운조차 실력인 법이지.”

    “그나저나 아이들 수업은 어쩌고 이렇게 내려오신 겁니까?”

    “수업은 무슨!! 아무리 본문에서 후대의 교육을 중요히 여긴다고 해도 지금 상황이 이런데 어찌 그것에만 집중하겠느냐. 그보다 몇몇 소문에 의하자면 네가 초절정의 무위를 보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역시 허황된 헛소문이었구나.”

    “그것이 그러니까······.”

    운호가 남궁강에게 했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사부인 공야찬에게 전했다.

    “우화등선이라······. 허, 파검 좌부원이라······. 본종의 대종사셨던 증무태사조님만큼이나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로구나. 실로 대단한 기연이다.”

    “네, 특별히 파검 대협의 무공을 전수 받은 것은 아니지만,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제 몸을 이용하여 본문의 검술을 펼치는데 그것이 실로 대단했습니다.”

    “검을 이용하여 우화등선한 신선이다. 그런 조화야 이상할 것도 없지. 그래, 그래서 그 당시의 검술은 모두 기록해두었느냐?”

    “그것이······, 제가 얼마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경황이 없던지라 아직······. 하지만 워낙에 충격적인 일이었던 터라 모두 제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해두고 있습니다.”

    운호의 답을 들은 공야찬의 눈이 번뜩였다.

    “운호야. 본래 사람의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면 풍화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네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그것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마땅히 기록으로 남겨둬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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