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십년지약(2)
남궁강의 이야기처럼 모용황 역시 모용세가를 완전히 수습한 것은 아니었다. 요녕의 모용세가는 작은 왕국이었고 무신 모용경은 그 왕국의 절대자였다. 근 팔십 년 동안 번성했던 모용세가다. 모용경의 핏줄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주변의 세력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다만 모용황은 모용경에게 공인받은 후계자였고 그 자신의 무력 역시 모든 후계자 가운데 발군이었기에 별다른 잡음 없이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경우 잡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 확실히 나도 숙부님들과 방계 가문을 추스르려면 약간의 시간은 필요하겠지. 미안하네. 내가 경황이 없어 너무 흥분을 했던 듯하이.”
“아닐세. 충분히 이해하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느데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가문의 일을 처리해야 했으니, 얼마나 경황이 없었겠나.”
“휴, 그러게나 말일세. 아버님은 사람이 너무 좋으셨어. 덕분에 가문에 앉아서 꿀만 빨면서 배때기에 기름만 붙은 늙은것들이 자신들이 무슨 공신입네 하는 개소리를 지껄인다니까. 정작 북방에 끌려가서 개고생한 건 우리인데 말이야. 이런 걸 보면 가주 자리를 맡아 이토록 잘 해내고 있는 자네가 참으로 존경스러워진단 말이지.”
남궁강이 고개를 저었다.
“나야 자네와는 많이 다르지. 아버지도 살아계시고······. -으드득.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는 자네 아버지와는 좀 많이 다르니까.”
“아······.”
모용황이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보니 그 화산의 어린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사실 파검 선배의 우화등선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었던터라 좀 묻힌 감이 있긴 했지만, 절정 고수도 감히 끼어들 엄두가 안나던 싸움에 끼어들었다니. 그것도 고작 열여섯살짜리 아이가 말일세.”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 생일이 지나 이제 열일곱이긴 하지만. 뭐 그거야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그게 그러니까······.”
* * *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 거냐? 다시 말해 보아라.”
운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당시 있었던 일들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들이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호가 보인 모습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모습이었는지는 운호 스스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할까?
하지만 그러자면 벌써 햇수로 5년 전, 증무진인과 처음 만나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꺼내야 했다. 또한 대체 왜 그것을 지금까지 속이고 있었는지, 나쁘게 해석하자면 이것은 기사멸조(欺師滅祖)의 대죄로 볼 수도 있다. 증무진인과의 만남을 사실대로 고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기이한 이야기였으며, 태사조인 증무 진인의 의지였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운호는 답을 알고 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지금 운호의 곁에는 너무 울창해서 어지간한 나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숨겨줄 수 있는 광대한 숲이 하나 존재했다.
“파검 대협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이. 다?”
“네, 그 모든 일이 전부 다.”
완벽했다.
당시 그 현장에서 그 장면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검 좌부원이 인간을 초월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과 연결된 상서로운 빛기둥과 인세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던 그 그윽한 내음새. 그리고 사람이 별빛이 되어 승천하던 그 모습까지.
사람의 상식으로 물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이치가 통하는 범위까지인 법이다. 그리고 우화등선은 명백히 사람의 이치를 벗어난 곳에 위치한 일이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남궁강에게 운호가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절정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제가 최근 화두로 삼던 것이 있었는데, 여러 초고수분의 싸움을 지켜보던 중 우연히 작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성취.
남궁강이 운호를 바라봤다. 앳되다. 얼마 전에 생일을 지났다고 했던가? 어쨌거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아들보다 여전히 두 살이나 어리다. 열아홉에 절정을 넘보는 것도 경이로울진대 열일곱에 아예 절정이라니.
하지만 이번 혈사에서 운호가 해낸 일은 절정에 오른 것을 ‘고작’으로 만들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남궁강이 운호를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래서?”
“파검 대협으로부터의 전음이 있었습니다.”
“전음?”
“네. 사실······. 제가 이번 일이 있기 며칠 전 파검 대협과 짧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당시 파검 대협께서는 저와 남궁 형님. 그리고 종화 소저에게 작은 가르침을 내리셨었는데 그때 제가 파검 대협의 가르침에 얻은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남궁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최대 주주로 있는 한상 소유의 주루에서 아들이 거하게 외상을 긁었고, 그의 아비가 파검 좌부원과 다툰 날이 아니던가.
그보다 남궁 형님이라······. 아들 녀석의 반응도 그렇고······. 생각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 가까운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침 제가 딱 적절하겠다며 저를 부르시더니 저항을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지금 연이은 싸움으로 잠시 몸을 움직이기 어려우시다며 제 몸을 좀 쓰시겠다고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 알겠다고 했습니다.”
남궁강이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 파검은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그 시점부터 운호가 갑자기 싸움에 끼어들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아마도 그 마교 수괴와의 싸움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으셨고, 그것을 소화시키기까지 시간을 버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깨달음으로 마교의 수괴를 처단하려고 하셨던 거죠.”
“그렇다면 네 마지막 그 공격도?”
“네. 제 몸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에는 파검 대협의 알 수 없는 힘으로 마치 천지간의 기운이 제 몸을 떠받드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다면 혹시 그 때 사용했던 무공들은 전부 기억이 나느냐? 중요한 문제이니 솔직히 대답해줬으면 좋겠구나.”
남궁강의 눈이 빛났다.
“네. 하지만 당시 제가 사용했던 무공은 파검 대협의 무공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작은 초식 하나까지 모두 저희 화산파의 검술이었습니다.”
“허면 그 위력이 모두 다?”
“화엄경에 아마 이런 말이 있을 겁니다. 우음수성유 사음수성독(牛飮水成乳 蛇飮水成毒)이라.”
“지학성보리 우학위생사(智學性菩提 愚學爲生死)라.”
같은 원인이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지금의 경우라면 같은 초식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긴······. 파검은 무려 우화등선을 해낸 신선이다.
비공식적인 기록으로야 우화등선을 했다는 도인들이 널리고 널렸다지만, 중원 무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마지막 우화등선은 무려 170년 전.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장삼봉 진인이 127세의 나이로 우화등선한 것을 마지막으로 한다. 심지어 그것 역시 무림최강의 성세를 자랑하는 무당파의 개파 조사이기에 뒷말이 덜한 것이지 그냥 노쇠하여 자연사한 것을 우화등선이라 했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신선이 우화등선 직전 마지막으로 해낸 일이다.
무슨 일이든 불가능할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최고의 변명거리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남궁강의 시선이 운호를 한번 훑었다.
저잣거리에서 자라 화산파에 입산.
12세의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고 본산 제자로 입산. 직후 하산하여 서안에 숨어있던 마인을 참살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후 화산에 방문한 종남의 소검후를 상대로 놀라운 검공을 뽐냈고 종남에서는 지(地)급의 마인을 참살했다. 물론 그 마인이 이미 커다란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종남의 소검후와 그의 아들이 커다란 도움을 줬다고는 하지만 이제 지학을 갓 넘긴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 힘든 활약이다.
심지어 이제는 고작 열일곱 나이에 절정. 통상적으로 구파와 칠대세가의 고수가 절정에 이르는 것은 마흔을 전후로 해서다. 삼십대 초반에만 절정에 이르러도 손에 꼽는 천재라 칭할 만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라고 해도 이십대 초중반이다. 헌데 이 아이는 그런 기록을 무려 십 년 가깝게 당겼다. 이 정도면 그냥 천재라는 말을 떠나 기사(奇事)에 가깝다.
우연일까?
남궁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복잡한 일이 많다. 그리고 그 복잡한 일들 대부분은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상식을 벗어난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탄생한다. 이게 말이 돼? 라는 우연이 의외로 현실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이번 파검의 우화등선처럼 말이다.
그 모든 것들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산(神算)이라 불리던 제갈무후라면 또 모를까. 그렇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인간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뿐이다.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과정이라면 과감하게 그 시작과 결과만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그 사건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본다. 대체 누가 이득을 얻었는지, 누가 어떻게 손해를 입었는지, 거기서 우연은 대체 무엇인지를 추측해보는 것이다.
이번 일은 결과적으로 마교에게도 정파무림에게도 그리 좋은 결과는 되지 않았다. 누군가 이득을 봤다면 제국 황실정도?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파검 좌부원이라는 ‘우연’이 개입한 결과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운호라는 아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 아이는 누구에게 보탬이 됐는가?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교는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이 아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과는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파검 좌부원이 다른 이를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 일이 파검이 우화등선 하기 전 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면 이 아이 역시 그 조각 가운데 하나다.
파검 좌부원의 우화등선이 사람이 계획할 수 없는 우연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그저 우연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혹시 그게 아니라고 해도 황실 쪽의 개입일텐데, 상식적으로 황실이 개입하려면 이보다 편하고 확실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도 널렸다. 당장 그 자리에 십이지신 가운데 서넛만 투입했어도 가장 문제가 될 마교의 수괴를 완벽히 처리할 수 있었다.
“역시 우연이었나?”
그렇게 운호라는 작은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숲에 스스로를 묻는 데 성공했다.
* * *
“형님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우선은 장가부터 가야겠지.”
“네? 이렇게 갑자기 장가라고요?”
남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일모레면 나도 약관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본래 대문파의 후계자라는 게 그런 자리거든.”
“상대, 상대는요? 정해진 겁니까?”
“글쎄······, 물론 이 혼사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닌지라 난관이 많을 것 같긴 하지만. 모른 척 눈을 감기에는 마지막 순간에 받은 게 제법 많아서 말이지.”
“받은 게 많다고요? 잠깐만요. 서······, 설마?”
남궁철이 입가에 특유의 미소를 머금었다.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더군. 남궁가의 가전 무공으로 편입시키던지, 아니면 아들 하나 정도는 좌씨 성을 물려주고 독립시켜도 괜찮다고 말이야.”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