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십년지약(1)
공자의 제자 자공이 말하기를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 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세치 혀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강호의 소문이란 그와 같다. 무한혈사에 대한 이야기가 강호 전역에 퍼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네들 소식 들었지?”
“소식? 무슨 소식?”
“왜, 거 있잖여. 마교의 대제사장이 무한에서 벌였다는 혈사 말이여.”
“아, 그거. 들었지. 거기 모인 높은 양반들이 아주 싹 쓸려 나갔다던디?”
“그려, 그 뭐냐 천무십칠성부터 구대문파랑 칠대세가의 정예 무사들까지. 거서 죽은 사람만 이백 가깝다고 하더라고.”
“뭐여? 구대문파에 칠대세가의 정예라면 최소 일류라는 거 아니여?”
“일류는 무슨. 내가 듣기로는 절정고수가 아니라면 장원에 발도 못 디딜 정도였다는디.”
“절정? 절정이라면 저기 대흥문의 문주가 절정 아니여?”
“에이, 그 양반은 절정까지는 아니지.”
“뭔 소리여. 나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디. 휙 하니까는 확 하고 쩌그 백현루 이층을 그냥 뛰어넘어부렀어.”
“그려? 백현루 이 층을? 그러믄 절정인가?”
절정의 고수는 흔치 않다.
어지간한 촌민이라면 평생 동안 한 번도 볼 일이 없는 것이 절정의 고수다. 중원의 인구수만 물경 삼억을 넘는다. 그 가운데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는 기껏해야 이삼천 남짓. 그나마도 그 삼분지 일은 저 북쪽의 장성과 남쪽 대월국과의 경계에 모여있다.
-쾅!!
“자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절정 고수 삼백이 눈빛 한 번에 모조리 묶여 있었다고?”
“모용 가주. 진정하시게.”
“진정?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사술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절정 고수 삼백을 묶어두는 수법? 설마 지금 나를 바보로 생각하는 건가? 게다가 그런 술수가 있었다면 그냥 남병(南兵)을 뭉개고 올라오면 그만이지. 왜 굳이 무한에 몰래 잠입을 한 거란 말인가.”
삼백.
물경 삼백이다. 전 중원 절정 고수의 십 분지 일. 이만한 고수에 당시 모여있던 초절정 고수의 면면을 합치면 북직례의 황성조차 우습다. 헌데 그런 고수들이 고작 마교의 마두 여덟명을 피해 달아났다고? 그 과정에서 초절정 고수가 무려 일곱이 사망하고?
“모용 가주. 불식 간에 아버지를 잃은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지 이해하네만 지금 상황ㅇ······.”
모용황이 남궁강의 말을 끊었다.
“이해? 지금 자네 이해라고 했나? 자네 혹시 그곳에 모였던 초절정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무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잊은 건가?”
남궁강이 입을 다물었다.
모용황은 본래 똑똑한 친구였다. 비록 아버지인 무신 모용강의 그늘에 오래 가려지긴 했으나, 그는 저 요녕 땅의 왕가나 다름없는 모용 세가를 이끌 능력이 충분한 사내다. 수많은 정황과 증거가 대제사장의 초월적인 무위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에 있던 사람의 숫자만 물경 사백이 넘고, 살아남은 이의 숫자가 삼백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가 강호의 중진이며 명숙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그의 아비인 남궁벽은 몇몇 부분에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긴 했지만 워낙에 해온 일이 일인 양반인지라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모용황이 저러는 것은 진짜로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호사가들이 떠드는 음모론 따윈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타오르는 복수심. 폭발할 것 같은 그 마음이 향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궁강은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비밀을 모용황에게 털어 놓았다.
“이십 년.”
“뭐?”
“우화등선한 파검 대협이 그렇게 말씀하셨네. 아쉽지만 그것이 한계였다고.”
“자, 잠깐만. 파검이 우화등선?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리고 이십 년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모용황은 똑똑한 친구였다.
그렇기에 이번 혈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소문 가운데 허(虛)와 실(實)을 구분하여 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파검의 우화등선은 명백히 허(虛)에 속했다. 차라리 무당의 벽산진인. 혹은 화산의 청우진인이나 청공진인이 우화등선을 했다고 하면 조금은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헌데 남해의 해적왕 파검 좌부원이 우화등선이라니.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남궁강이 자신이 봤던 모든 것을 설명했다.
파검 좌부원이 보여줬던 그 놀라운 무학과 무신 모용경의 장렬했던 최후를.
“그곳에 남았던 종남의 장문인인 순양검 적하 진인. 그리고 우리 창궁대의 무사들을 비롯한 열일곱의 절정 고수가 똑똑히 들은 이야기일세.”
“그래서 이십 년······. 그 뜻은?”
“당장 추측하기로는 마교의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고, 그 부상이 족히 이십 년은 갈 것이라는 뜻이겠지.”
모용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 당장 사람들을 모아야지. 마교의 대제사장이 그토록 무서운 존재라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 아닌가.”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대체 뭐가 문제인가? 재물? 재물이라면 우리 모용이 얼마든지 더 내놓겠네. 본래 한혈마 사백두에 건량 일만 근과 육포와 어포로 삼천 근을 내놓기로 했었지? 거기에 여력을 쥐어짜내면 한혈마 삼백두는 더 내놓을 수 있을걸세.”
남궁강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단순히 재물이 문제가 아니네.”
“그렇다면?”
“십만대산.”
“십만대산? 그거라면 어차피 우리가 쳐들어가기로 했던 곳 아닌가. 조금 넓긴 하지만 남병(南兵)과 대월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감당 가능한 일 아닌가.”
“자네 말에 벌써 세 가지 문제가 있다네.”
“세 가지?”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은 광서성 남단의 거대한 산맥이다. 그 길이만 하더라도 물경 650리가 넘어간다. 산맥의 길이가 섬서성을 횡단하는 것에 가깝다는 뜻이다. 실로 광대한 넓이다.
어려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십만대산의 절반은 제국이 아닌 대월국의 영역에 걸쳐 있다. 대월국은 표면적으로는 제국에 조공국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독립국가로 대월국의 최고고수인 완정염 같은 경우 남병을 총괄하는 사상(四象)의 일인인 광서대장군 백기와 동수를 이루는 고수라고 알려져있다.
“무엇보다 십만대산은 기련산맥의 남단과도 맞닿아있네. 그 말인즉 섣불리 건드리게 되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이지.”
“하지만 그 부분은 이미 해결됐던 것 아닌가?”
“그래, 해결됐었지. 하지만 그 해결의 주체가 대력금강 공조 대사였다는 점이 문제일세. 어떻게 알았는지 대월국에서 난색을 표하고 나왔다네.”
“아니, 어찌 이만한 중대사에 고작 사람 하나가 죽었다하여 그리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단 말인가.”
모용황이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와 별개로 그 자신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억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집단과 집단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집단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하물며 그 사람이라는 것이 보통 사람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은 초인이다. 이러한 초인들의 개인적인 친분이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는 무신 모용경이 사망한 이후 개판이 되고 있는 모용세가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고작 사람 하나가 아니야. 자네도 이런 일에 결정권자들 간의 개인적인 친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지 않나. 무엇보다 이번 일로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 가운데 무려 일곱이 사망했네. 그들로서는 이제 우리를 믿기 힘들다는 뜻이겠지. 우리가 마교를 패퇴시켰다고 알렸지만, 안방에서 그 많은 고수들이 사망했으니······.”
“그렇다면 남병은?”
“아쉽게도 그쪽도 마찬가지야. 광서대장군과 친분이 있던 사람은 단악도 팽대협이었네. 게다가 그쪽도 대월국에서 먼저 협조를 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입장이야.”
“그거라면 내가 중앙에 끈이 좀 있네. 그걸 이용한다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나라고 중앙에 끈이 없겠는가. 하지만 사상(四象)은 그런 관리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닌 것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전대 모용가주님 정도라면 또 모를까······.”
모용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네. 두 가지는 잘 알겠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는 대체 무엇인가.”
“십만 대산의 기운이 심상치 않네. 유례를 알 수 없이 막대한 수준으로 음기와 마기가 승하고 있다고 하네. 덕분에 지금 북쪽 기련산맥에 은거하던 마교와 상관없던 마두들 까지도 모두 십만 대산으로 밀려오고 있어.”
“허······.”
참으로 갑갑한 이야기였다.
바로 얼마 전만 하더라도 마교의 뿌리를 뽑을 것처럼 기세를 올리던 정파 무림의 꼴이 참으로 우스워졌다.
“또한 몇몇 문파에서 발을 빼고 있네.”
“뭐라고? 발을 뺀다고? 대체 어째서!!”
“더 이상의 피해는 곤란하다는 뜻이겠지. 이번 일로 문파에 내려오던 무공이 실전된 곳도 있다네. 사부와 제자가 함께 왔다 모두 봉변을 당한것이지.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사부가 죽은 제자는 상승의 무학을 배울 스승을 잃었고, 제자가 죽은 사부는 자신의 무학을 이을 미래를 잃었네. 복수심은 뜨겁지만······. 현실은 차갑지.”
당장 천무십칠성 가운데 여섯. 이전에 죽은 검선까지 일곱이 사망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문파를 대표하는 얼굴들이며 문파 최고의 어른들이고 그 문파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력이었다.
“하지만!! 그 20년이라는 말 대로라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 아니던가. 초절정 고수 넷의 합공을 웃으며 받아넘기고,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검조차 견뎌내는 괴물이 자기의 힘을 되찾는다면 대체 무슨 수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바꿔 생각한다면 우리에겐 아직 20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것 아니겠나.”
“시간?”
이십 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긴 시간이다.
통상적으로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고수들이 절정에 오르는 것은 마흔 즈음. 그 가운데 특출난 몇몇이 삼십 대에 절정에 오르고, 또 그 가운데 특출난 몇몇이 환갑을 전후하여 초절정의 경지를 밟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이 가장 약한 시점이네. 하지만 대제사장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제외한다면 고수의 숫자, 자원. 환경. 그 어떤 걸 생각해봐도 우리가 부족한 것은 없어. 시간은 저들의 편이지만, 동시에 그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의 편이기도 하네. 문파를 추스르고, 고수를 양성하고, 대월국과 광서대장군부를 설득하기까지 무려 이십 년이라는 넉넉한 기간이 있다는 뜻이야.”
그럴싸하다.
하지만 모용황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남궁강의 이야기에 결정적인 허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는데 이십 년이라는 말은 그 대제사장이라는 괴물이 가장 약한 시점이 지금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괴물이 다시 그런 위용에 가까워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또한 상처라는 것이 어디 자연적으로만 낫는다던가? 매화신단이나 대환단, 태청단과 같은 영약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빨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 그 이십 년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우화등선한 파검 대협의 일방적인 이야기였으니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겠지. 그러니 그 이십 년을 모조리 사용할 생각은 없네. 단지 그 시점이 절대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걸세. 솔직히 말해 모용세가도 지금 당장 전력을 동원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십 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십 년이야.”
“그거면 되겠나?”
남궁강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