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93화 (93/288)

93화

천중일검(2)

운호가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기의 흐름이 놀랍다. 포원공과 닮았지만 같지 않다.

무엇보다 머리의 백회혈(百會穴)과 양발바닥의 용천혈(涌泉穴)이 활짝 열려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하여 천지간의 기운이 무한하게 순환한다. 초절정에 다다른 고수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융통무애(融通無碍)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다.

하지만 그 놀라운 경지조차 단지 저 마교의 대제사장을 상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불과했다.

순간순간 마교의 대제사장의 시간축이 어긋났다.

그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묘한 위화감만이 느껴질 뿐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태사조는 종종 이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

지금처럼!!

운호의 몸이 갑작스럽게 반 바퀴를 돌아나가며 허공에 검기를 흩뿌렸다.

-쿠과광!!

대제사장의 오른발이 검신을 두들겼다. 일격에 기혈이 뒤틀린다. 적어도 다섯 호흡. 하지만 청우와 청공이 그 빈 자리를 메꿨다.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 이치를 넘어서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운호는 천재였다.

천하에 둘도 없는 오만한 천재 증무진인 목운평이 직접 천하를 언급할만한 자질을 지녔다. 심지어 그 자질이라는 것은 다른 이들에 비해 축기의 속도가 지극히 느린 그의 체질을 감안했음에도 그러했다.

몇 차례를 목격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놀랍게도 운호는 지금 목운평이 보여주는 무학을 ‘이해’했다.

지금 목운평은 저 가면인을 완벽하게 예측하여 그것으로 그의 감각 밖에서 파고드는 가면인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몽원경에서 운호와 증무진인이 펼쳤던 대련과 같은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개념이 같다고 하여 그 난도가 어찌 같을까. 그것은 마치 고양이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여 그 습성이 비슷한 호랑이를 상대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몽원경에서 운호와 목운평은 상대의 무학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그 수준 역시 동일하다. 하지만 지금 저 대제사장은 어떠한가.

절정의 경지에서도 보이지 않던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그리고 그 희미함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다. 저 고통의 가면을 쓴 마교의 수괴는 그런 존재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 파국으로 이어질 만한 적수를 상대로 한 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무학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지대하면 이럴 수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몽원경에서 증무진인과 보낸 세월이 벌써 사 년을 꽉 채웠다. 태사조는 항상 광오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운호는 그것을 한때 천하제일의 자리에 있었던 남자의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은 증무진인 목운평이라는 사람 자체의 기질이다. 어마어마한 자기 확신. 그리고 그 확신에 어울리는 놀라운 재능. 재능이 먼저인가, 아니면 성정이 먼저인가.

목운평이 움직이는 운호의 몸이 납매검의 초식을 이어갔다.

납매검은 본래 합리성을 근간으로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고수 간의 싸움에서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곧 간파되기 쉽다는 특성을 지닌다.

하지만 목운평의 납매검은 달랐다. 그리고 지금 운호는 그것을 실감했다.

헤엄을 치지 못하는 짐승의 효율과 헤엄을 칠 수 있는 짐승의 효율은 다르다. 헤엄을 칠 수 있는 짐승이라면 강을 돌아가지 않고 강을 건너간다. 거기에 창공을 거니는 날짐승이라면 어떻겠는가. 지형 지물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날아갈 뿐이다.

절정, 그리고 초절정이 그와 같다.

운호는 바로 어제까지 몽원경에서 목운평과 검을 나눴다.

그곳에서 목운평은 운호가 펼치는 납매검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합리적인 검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절정의 벽을 두드리는 이의 합리성이었다.

하지만 절정 고수의 합리성은 그와 다르며 초절정의 합리성은 더하다. 하물며 지금 무공을 펼치는 이는 스스로 천하제일을 자처하는 이였으며 술로써 도를 이룬 사내다.

운호의 합리성을 넘어선 검들이 연거푸 펼쳐졌다.

여기서 대체 왜 이런 식으로 공격을 이어가는 것인가? 하는 것들이 그다음 상대의 대응을 보면 가장 적절한 초식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태사조가 보는 시야라는 것은 대체 얼마나 드높은 것인가. 하지만 그저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정수리의 백회와 발바닥의 용천을 통하여 천지간의 신령한 기운이 몸을 오간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알고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지금 이것은 역천(逆天)이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몸을 지배하고 있으니 천리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행위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마도······.

공과격(功過格)

태사조가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공과격이 만들어낸 조화가 틀림없다. 몽원경에서 태사조는 항상 공과격의 부족함을 한탄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번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역천이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단번에 목숨이 날아갈 위기였지만, 동시에 지극한 무학의 이치를 깨달을 흔치 않은 기연이었다. 운호의 머릿속에 지금의 모든 공방이, 진기의 운용이, 근육의 움직임들이 차곡차곡 저장됐다.

걸왕의 뼈마디가 욱씬했다. 단순한 관용적 표현이 아니었다. 방금 일격을 받아내는 것만으로 그의 늑골에 금이 갔다.

걸왕의 내공은 물경 삼갑자에 달한다. 물론 물 좋고 공기 좋고 기운 좋은 심산유곡에서 정심하게 쌓아올린 진기와 비교하면 난잡하며 혼탁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물경 삼갑자다. 천하에 널린 고수 가운데 이만한 내공을 지닌 이는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두터운 내공으로도 저 가면인의 공격을 온전히 해소하기 힘들다.

“니미럴.”

그의 시선이 대체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럽게 싸움 전체를 조율하고 있는 화산의 어린놈에게 향했다. 소신검이라고 했던가? 제법 유명한 후기지수다. 하지만 그래봐야 절정에도 이르지 못했던 아직 한참 어린 아이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기도, 무위. 어느 것 하나 초절정이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저 기묘한 지휘다.

아니, 이것을 지휘라고 하는 것이 옳기는 할까? 걸왕은 분명 지금까지 하던 대로 싸울 뿐이었다. 청공이나 청허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경지가 경지이니 만큼 서로 방해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그들의 합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의 합공은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동료들의 그것처럼 끈끈하게 변해 있었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저 아이의 조율 덕분이다.

본래 정체를 숨긴 고수였던가? 저 어린 모습은 그렇다면 반노환동? 아니면 특이체질? 그렇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빌어먹을 거지 특유의 호기심은 이런 순간에도 고개를 치켜든다.

하지만 그 호기심보다 더 강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휴식에 대한 갈망이었다. 딱 일각. 아니 반각, 아니다. 그냥 한 열 호흡 정도만 조식을 가다듬으면 좋겠다.

“해적!!”

그들의 뒤편.

새파랗게 젊은 해적 놈은 마치 규방의 처녀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하게 쉬고 있었다.

“거지, 보채지 마라. 아직이다.”

해적을 대신하여 대답한 것은 화산의 어린 녀석 백운호다. 어린놈이 말본새가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제는 저것 역시 저 어린놈의 정체가 반로환동한 노고수라는 증거로 보인다.

-쿨럭

청공과 청허가 맑은 피를 토했다.

공격을 허용한 것이 아니다. 정작 공격을 성공시킨 쪽은 그들이다. 그렇기에 더 최악이었다. 내상이 아니다. 격발시킨 진원이 소진되고 있다는 증거다.

증무진인 목운평이 호흡을 골랐다.

운호는 지금 이 몸을 두고 융통무애하며 천인합일이라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 몸은 감옥과도 같았다. 이전에 저 괴물과 싸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음에도 절망적이었는데, 이래서야······.

그의 시선이 파검을 향했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 화산의 팔대 검술이라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공과격의 엄격한 사슬은 그를 옥죈다. 그렇기에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검술은 딱 광음(光陰)까지다. 무형(無形)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난풍(亂風)까지만이라도 허용이 됐더라면······.

싸움의 직전.

마음의 검을 잃어버린 파검이 현실의 검을 쥐려 할 때 목운평은 그를 막았다.

“아직 아니다. 지금은 그저 똑바로, ‘잘’ 지켜봐라.”

파검은 목운평의 그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지금 저 괴물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파검의 절초인 천하뿐이다. 그러니 다시 마음의 검을 가다듬어라.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괴물의 심장에 그것을 꽂아 넣어라.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심상에 선명하게 새겨넣었던 검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네 명의 초절정 고수와 하나의 괴물이 벌이는 싸움은 거듭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괴물도 파검과 무신의 목숨을 건 공격이 효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전처럼 마냥 그 거대한 마음을 휘두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 이상해······.’

물론 그것을 감안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마음의 검을 쥐었을 때 그의 무학은 한 차원 높은 곳을 유영한다. 가끔씩 저 마교의 수괴는 그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너무 잘 싸운다. 특히 저 아이의 탈을 쓴 괴인이 그러하다. 느껴지는 무위는 초절정의 초입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검술이 범상치 않다. 저것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무언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파검이 밑바닥 낭인으로 시작하여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가 되기까지. 그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고, 수도 없이 많은 기연을 경험했다. 지금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느낌은 바로 그때의 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호의 검이 변화했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던 납매검에 매농검의 무리가 섞였다. 그래도 제법 안정감 넘치는 공방에 군데군데 파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뭐지? 대체 어째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대를 대상으로 저게 대체 무슨 헛짓거리인가. 파검의 이성은 저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싸움에 합류할까?

하지만 그의 감각은 저것 역시 무언가 의도가 있다고 소리쳤다. 그렇기에 섣불리 돕겠다고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잠시도 눈을 돌려서도 안 된다. 지금 저 아이의 탈을 쓴 괴인은 저것을 통해 파검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고 있다.

걸왕이 파검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이 더 날카로워졌고 욕지기가 더 걸쭉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검은 자신의 이성보다 그 감각을 더 믿었다. 투자를 제외하고, 파검의 감각은 그의 신뢰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쿠과광!!

저 멀리 망할 남궁벽 놈이 절정 고수 여럿의 희생 아래 마침내 마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꼴이 보였다. 하지만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 마지막에 무리한 탓에 녀석도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 다른 절정고수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마인을 제거했다면, 그리고 이 싸움에 합류했다면, 인성이야 어쨌건 간에 경지를 넘어선 고수였던 만큼 제법 도움이 됐을 터인데······.

목운평의 검이 반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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