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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91화 (91/288)

91화

무한 혈사(10)

가면인이 쓰고 있던 분노의 가면에는 얇은 금이 길게 가 있었다. 화려한 장포에는 군데군데 찢긴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장포 아래 드러난 하얀 몸에는 상처 하나,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쿨럭

모용경의 입에서 핏덩어리가 쏟아졌다.

걸왕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파검이 이를 악물었다. 시큰거리는 잇뿌리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검은 없었다. 현실에도 마음에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면인을 마주했다.

그리고 운호는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그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천무십칠성은 강호 최강의 무인들이다. 물론 그들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이들 넷이 협공을 저렇게 받아내다니. 심지어 단악도 팽불청은 마인의 일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

운호가 이를 악물었다.

마인의 공격을 받아낸 검은 뒤틀렸고 그 여파를 견뎌낸 몸은 삐걱거렸다. 짜르르한 통증이 전신을 덮쳐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검을 움켜쥐었다.

남궁강은 생각했다.

가능할까?

천무십칠성의 사 인이 함께 했음에도 결과는 처참했다. 이제 남은 초절정의 고수는 청우진인과 청공진인. 그리고 빌어먹을 아버지뿐이다.

냉정하게 말해 세 사람 모두 저기서 일수에 나자빠진 단악도 팽불청에 비해 낫다고 하기 힘들다.

그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삼백의 절정 고수.

그 가운데 벌써 사분지 일이 죽어나갔다. 구파와 칠대세가 정예 무사의 일 할이 죽어 나간 것이다. 더군다나 벌써 초절정 고수 셋이 죽었다.

물론 마교의 대제사장을 여기서 무찌를 수 있다면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죽어도 손해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다. 초절정 고수도 초절정 고수이지만, 여기에 모인 이들은 장차 구파와 칠대세가를 이끌어가야 할 고수들이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났을 때 초절정 고수가 될만한 인재 대부분이 여기에 있다.

남궁강의 시선이 아들에게 향했다.

뛰어난 아이였다.

소싯적의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이 무가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에 반하여, 저 아이의 재능은 그쪽으로도 뻗어 있었다.

딸아이가 남긴 피웅덩이가 눈에 밟혔다.

저것은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참으로 고운 아이였다. 남궁강은 자신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죽는 바로 그 순간 그는 가슴 한구석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것이 자신이 그토록 소원했던 ‘감정’이라는 것이라면 그 소원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남궁강은 결정해야 했다.

미래를 기약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도박을 걸어봐야 할 것인가.

남궁강의 이성과 감정이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남궁강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분노는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동료들이 죽었다. 응징할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분노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적을 응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금.

마교의 수괴는 그들에게 상상을 초월한 무(武)를 보여주었다.

보라.

지금 마교의 수괴가 꿰뚫은 것이 무엇인지를.

무신(武神) 모용경.

세수 여든아홉.

여기 모인 절정 고수 모두가 경지에 오르기 전부터 그는 이미 천무십칠성의 일원이었으며 강호를 대표하는 초절정의 무인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권신과 더불어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무인이었다.

마교의 수괴가 중원의 무(武)의 상징을 파괴했다.

분노는 매우 강력한 감정이지만 아쉽게도 그리 지속력이 좋은 감정은 아니다.

초절정 고수 넷의 공격.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검왕의 공격까지 다섯의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 그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에 경외와 공포를 심었다.

여기 모인 고수 모두가 덤벼든다고 이겨낼 수 있을까? 이대로 덤비는 것은 그저 개죽음이 아닐까?

만약 여기 모인 이들이 정파의 정예 무사들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무기를 내던지고 뿔뿔이 달아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공포가 감돌기 시작했다.

화산의 반돈아 청우 진인과 수건아 청공 진인이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그 공포의 향기를 맡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본래 전쟁에서 가장 피해가 심하게 나오는 순간은 퇴각의 순간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누군가는 나서야만 했다.

“망할······, 오늘 운수가 사나워도 너무 사납구나.”

“그러게나 말이다. 말년에 자리 물려줬으면 가만히 뒷산에나 처박혀 있을 것을 뭐 좋은 꼴 보겠다고 이렇게 속세에 기어 나와서 험한 꼴을 보는지.”

“그래서 어쩔 셈이냐.”

“어쩌기는 뭘 어째. 저 인간이 저 꼴이 됐는데.”

“하여간 난 저 인간 매일 저렇게 나서는 거 좋아하다 언젠가는 저런 꼴 날 줄 알았다.”

여기 모인 다른 이들에게 무신 모용경은 존경할만한 선배이자 따르고 싶은 목표였다.

하지만 청우와 청공은 달랐다.

그들에게 무신 모용경은 얄밉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들은 권신 청무진인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의 평생은 오직 청무진인을 따라잡기 위한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 청무진인과 똑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오직 저 무신 모용경뿐이었다.

상대는 안중에도 없음에도 평생을 홀로 경쟁자라 생각하고 발버둥 치는 마음이란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아마 포기했다면 편했을 것이다. 포기했다고 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권신과 무신. 강호의 최강자들이다. 그들보다 못하다고 하여 대체 누가 그들을 비웃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오늘까지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너 꼬불쳐 둔 거 털어내면 얼마나 되겠냐?”

“글쎄. 이 각 정도? 너는?”

“나는 그보다 반 각 정도 더?”

“나보다 반 각을 더 간다고? 어디서 뭐 좋은 걸 처먹었길래?”

“처먹고 다닌 건 청우 네 놈이고. 나는 부단한 수련의 결과지.”

그들은 아주 오랜 기간 자하기공의 구단공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설사 깨달음이 없다 하더라도 진기의 양이 한계를 넘어서면 상승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자하기공이다.

그렇기에 신공이다.

-쿠과광!!

때마침 마인을 협공하던 굉명진인이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굉명.”

“네? 네. 청공 사숙님.”

“수고했다. 이제 이 자리의 남은 일은 우리가 맡을 테니 너는 아이들을 추슬러서 화산으로 물러나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잘 져야지.”

굉명 진인은 아둔했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사숙!! 그건 안 됩니다. 사숙님들이야말로 화산의 중심 아니십니까. 남더라도 제가 남아야지요.”

“쯧, 중심은 무슨. 게다가 네가 남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원래 온 순서대로 가는 것이 이치에도 맞다.”

“사숙!!”

“잔소리할 시간 없다. 어서 아이들을 추슬러라!!”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하기공을 수련해왔다.

그리고 자하기공 팔단공에 올라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것도 벌써 십 오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구단공은 요원했다.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기해혈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힘과 생명의 근원. 그들이 팔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진기 그 자체.

청공과 청우가 동시에 자신의 진원을 폭발시켰다.

그리하여 그 순간 고순도의 자하기공이 그들의 전신을 내달렸다. 한계를 넘어선 양의 질적 변화.

본래라면 닿지 못했어야 하는 영역. 천재들이 대를 이어 만들어낸 신공이, 범인의 필생이 담긴 노력이. 그리하여 마침내 천지간의 기운이 그들에게 길을 허락했다.

오랜 기간 머물러있던 청우와 청공의 신공이 벽을 넘어 진화했다.

그리하여 이곳에 두 명의 권신이 강림했다.

“이런 감각이었군.”

“이래서야······, 사형이 제대로 설명을 못 해준 것도 이해가 가는군.”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마인들의 공격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저기 무신의 복부를 뚫어버린 저 마교의 수괴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지도 똑똑하게 느껴졌다.

그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무신은, 파검은. 저런 광경을 보고도 싸움을 이어왔단 말이던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 각 남짓.

청공 진인이 먼저 아미파 비구니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있는 마인의 옆구리를 쥐어 뜯었다. 동시에 청우 진인의 쌍장이 그의 가슴뼈를 함몰시켰다.

가면인의 시선이 청공과 청우에게 향했다.

“쯧, 참으로 추하도다. 도에 닿지 못한 이들의 발악이라니.”

“추악···기···네······놈들······만 할······.”

가면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용경의 복부를 관통한 손에서 약간의 압력이 느껴졌다. 완전히 망가진 몸으로 이 와중에 그의 발목을 잡겠다고 용을 쓰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정신력이다.

-뿌득

하지만 의미 없다.

가면인의 손끝에 늙은 무인의 창자가 끌려 나왔다.

-툭

모용경의 거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것은 검이 없는 검사. 그리고 의지를 잃은 거지.

가면인의 몸이 무림인들의 마지막 발악을 향해 움직였다.

“온다.”

“나도 안다.”

-쾅!!

오직 이 각.

두 명의 노인이 팔십 평생의 수련을 담보로 얻어낸 생애 마지막 불꽃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불꽃에 종남의 고수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합류했다. 종남의 고수들만이 아니었다. 아직 공포보다 분노의 마음이 더 큰 무림의 고수들이 그 불꽃에 합류했다.

절정의 고수가 일수에 핏물로 사라졌다.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문의 어른이, 선배가, 제자가 죽어나가는 그 모습이 사람들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종화가 있었다.

“조······, 종화야!!”

운호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잡았다.

-미친!! 백운호!! 운호야!!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저 녀석 만큼은 절대 안 돼!!

증무진인의 목소리가 운호의 머리를 울렸다.

‘저도 압니다. 그냥 종화만······, 종화만 구해낼게요.’

-불가능하다.

그리고 운호의 곁으로 누군가가 날아왔다.

전신에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노인. 파검 좌부원이었다.

“파, 파검 노사님!!”

“도망쳐라. 여기는 우리 늙은이들이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 일단 도망치고 보는 거다. 스물도 채 되기 전에 절정이라니. 참으로 아쉽게 됐구나. 네 놈이 삼십 년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오늘 제법 해볼 만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도망쳐야 한다. 저 괴물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원의 저력 역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내가 혈혈단신으로 여길 온 터라 내 손녀를 부탁할 사람이 없구나. 뺀질이 녀석도 나쁘진 않지만, 그놈은 너무 약해빠져서 말이다.”

“하지만······.”

“난 무리다. 저 괴물,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나를 잡아두고 있다. 다른 사람은 다 놓쳐도 나만큼은 놓치지 않을 거다. 젠장. 어쩐지 무림맹에 전재산을 걸고 싶더라니.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역배당에 걸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 순간,

가면인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청공과 청우를 밀어냈다.

-쾅!!

공간의 도약?

운호의 앞을 막아선 파검이 검을 휘둘러 가면인의 손을 막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날아온 청공진인과 청우진인이 가면인의 등을 강하게 두들겼다.

-쿠웅

거대한 범종의 울림과 같은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검을 밀어내는 파검의 어깨 너머.

가면인이 고개를 쑤욱 내밀었다.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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