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무한 혈사(6)
파검 좌부원이 눈을 감았다.
이 순간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이 세상의 가면인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스스로를 본불(本佛)이라 칭하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 파검 좌부원의 검이 저자에게 통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좌부원의 검은 자신의 심상을 현세에 구현한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지만, 저 거대함에 비하자면 너무 작았다.
쉽게 비유하자면 좌부원의 심검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주머니칼이고 저 가면인은 수천 년은 살았음직한 거대한 수목이다.
날카로운 주머니칼로는 절대 거목을 베어낼 수 없다. 거목을 베어내기 위해서는 조금 투박하다고 해도 그에 어울리는 거대한 도끼가 필요한 법이다.
고작 다섯 번의 호흡.
가능할까?
오랜 시간 그가 가다듬어왔던 소우주 자체를 재조립하는 일이다. 이것은 조금 과장을 하자면 평생 창을 휘두른 무인에게 갑자기 검을 들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파검 좌부원이지.”
그래, 그는 파검 좌부원이다.
절강성 촌구석 어딘가.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삼류 문파의 검술을 기반으로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른 남자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어린 시절 형과 함께 목검을 쥐고 동네를 뛰어다니던 때부터 꿈꾸던 순간 아니던가.
“나는 무림 맹주. 너는 마교 교주다.”
“왜 형만 매일 무림 맹주고 나는 매일 마교 교주야? 나도 무림 맹주 좀 하자.”
“원래 무림 맹주는 더 강한 사람이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해야지.”
물론 여전히 그는 무림 맹주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무림 맹주보다 마교 교주가 훨씬 더 강한 더러운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전 강호의 운명이 오직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파검의 마음이 크게 부풀었다.
더 크고, 더 강하게.
천하를 뒤덮을 기세의 저 거대한 나무를 단박에 쪼개버릴 수 있는 거대한 검이 되어라.
무신 모용경의 단단한 육체가 물거품처럼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봐도 참 대단한 양반이다. 지금 저 파괴는 단순히 그의 팔뚝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 팔뚝 날아가는 걸 단순하다고 하긴 조금 그렇지만, 저 양반은 화석신공을 완성하여 팔뚝이 날아가더라도 시간만 주면 그걸 충분히 복구해내는 괴물이다.
하지만 지금 저건 그의 본질 자체가 파괴되는 과정이다. 팔뚝뿐만 아니라 그가 쌓아 올린 화석신공 자체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파괴되고 있다.
인간의 통각신경은 본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것은······.
‘명백히 그 한계를 벗어나겠지.’
무엇보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고통을 떠나 물리적으로 저기서 저만큼 버티지도 못한다. 저것은 전적으로 그가 이 ‘세계’에 문을 두드리고 있는 대단한 무인이기에 가능한 위업이다.
게다가 저 몸뚱이의 크기 자체가 워낙에 크고 우람하다. 차라리 파검 자신이 아니라, 저 모용경이 경지에 이르렀다면 오히려 가면인을 상대하기에 용의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문을 두드리는 것과 본격적으로 그것을 열어젖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섯 번의 호흡.
약속대로 파검의 검이 크고 두터워졌다.
충분할까?
글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무신은 충분히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천하제일인이 그 약속을 이행할 차례다.
비록 무림맹주는 아니었지만.
파검 좌부원이 눈을 떴다.
가면인의 팔을 움켜쥔 무신 모용경의 오른팔은 이제 허연 뼈를 드러낸 채, 그 뼈마저 분해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인은 여전히 모용경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상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사람의 힘은 결국 근육에서 나온다. 근육이 모조리 날아간 팔이 어떻게 저런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좌부원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저 파괴의 순간에 모용경 역시 그들과 같은 높이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통 통 통 통
네 걸음.
가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인만큼 확실치는 않았다. 하지만 좌부원은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검 좌부원의 선명한 마음이 천지를 뒤덮은 사악한 거목을 향해 나아갔다.
가면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면 당황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쉽게도 그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황스럽기는 그때가 더했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라한의 경계 즈음에 다다른 이들 다수가 덤벼드는 상황이었지만, 당시에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 하나가 뜬금없이 불타로 각성을 했었으니까.
그렇기에 가면인은 당황 대신 감탄을 했다.
과연 중원이다.
인간이 충분히 많으면 이런 자들도 나오는구나.
그는 선택했다.
이왕이면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지만, 조금 귀찮아지더라도 안전하게 가야겠다고.
온 천지를 향하여 가지를 뻗고 있던 거목이 한순간에 가지를 거둬들였다.
-휘리릭
그리고 그렇게 거둬들인 가지들로 자신의 본체를 단단하게 보호했다.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힘의 충돌이 좌중을 휩쓸었다.
* * *
운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광음검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이 흔히 말하는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운호의 나이 올해 고작 열여섯. 수많은 기연이 겹쳐졌다고는 하지만 실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성취였다. 사실 구대문파, 그 가운데서도 최강을 자부할만한 화산파이기에 절정이라는 것이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절정은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경지다.
어지간한 중소문파는 절정의 고수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절정의 경지라면 구대문파나 칠대세가를 제외한다면 한 지방의 왕 노릇도 어렵지 않다.
당장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조차도 마지막까지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본산, 혹은 직계 제자가 6할을 넘어간다. 그들이 얼마나 엄선된 절차를 걸쳐서 본산에 남는 지,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이 받는 지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고려해본다면 절정이라는 경지의 대단함을, 그리고 그런 경지를 ‘고작’ 열여섯에 도달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대단한 성취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운호의 주변에 널린 수백의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절정의 고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이 저 가면인의 손짓 한 번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
-후아.
막 깨달음을 얻어 광음검을 사용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증무진인 목운평이 매일 강조했던 것처럼 깨달음을 얻었다고 좋다고 무작정 그걸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감했다.
운호 자신의 몸을 압박하던 그 기이한 압력은 실로 질기고 단단했다.
‘세월’
그 자체인 광음검으로도 그것을 끊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가면인의 압박을 끊어낸 그 순간 전신의 근육이 부들거리고 기혈이 터질 것처럼 아려왔다.
-도망쳐라!!
그리고 그 와중에 증무진인의 의지가 운호의 머릿속에 강하게 울려 퍼졌다.
‘태사조님!! 도망이라니요!! 지금 혜아가, 혜아가 죽었습니다!!’
-그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하지만 지금 잔소리할 시간 없다!! 당장 도망쳐라!!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리고 운호의 시야에 가면인의 팔을 움켜쥐는 모용경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쪽 팔뚝이 완전히 박살난 전신에 피칠갑을 한 노인이 가면인의 팔을 움켜쥔 채 웃고 있었다.
-후읍
부들거리는 근육이 진정되는 그 짧은 시간.
청동빛으로 번들거리던 노인의 굵은 팔뚝이 그 거죽부터 근육을 지나 핏줄과 뼈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분쇄됐다.
그리고 마침내 운호가 자신의 몸을 완전히 추스렀을 때.
-콰과과과광!!!
“응? 이게 어떻게 된 일이······? 마······, 맙소사!! 사, 사부님!!”
“혜아야!!!”
“사제!!”
“내 팔!! 내 팔이!!”
“끄어억······. 도, 도와주시오. 내 품에 약······, 약이 있소!!”
“도, 도와주시오!! 내 제자가!! 내 제자가 죽어가고 있소!!”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석상처럼 굳어있던 수백의 고수들이 일제히 풀려났다.
그들의 곁에는 박살난 사부의 시체 조각이. 눈도 감지 못한 가족의 시체가. 조금 전까지 해사하게 웃던 제자의 머리통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자신도 모른 채 잃어버렸고, 또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변했다.
그리고 증무진인의 의지가 또 한 번 운호의 머리를 강하게 울렸다.
-지금이 기회다!! 어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운호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도움을 청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양반이 몸이 자유롭게 되자마자 갑자기 나타나서는 도망을 치라고?
심지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 알 수 없는 사술에서 풀려난 찰나다. 아무 일도 없이 그런 일이 발생했을리는 만무하니, 그것은 전적으로 저기 무신 모용경과 파검 좌부원의 공일 것이다.
즉, 지금은 역전의 순간이나 다름 없었다. 헌데 지금 도망을 치라고?
무엇보다 남궁혜.
물론 운호는 남궁혜와 오랜 시간 감정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보름 남짓? 하지만 청춘남녀가 마음이 통하는데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운호가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모든 고수들이 가면인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어리둥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몇 명.
예컨대 화산의 외당주인 굉명진인, 종남의 순양검 적하진인과 같은 절정 가운데서도 지극히 빼어난 몇몇은 가면인의 수법에 당한 와중에도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천무십칠성과 청우, 청공의 싸움을 똑똑히 지켜봤다. 또한, 그 사이 그들의 형제가, 그들의 제자가 죽어가는 꼴을 그저 바라봤다.
순양검 적하진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그의 얼굴은 평생동안 도를 수련한 도인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악귀나찰과 같은 얼굴로 적하진인이 소리쳤다.
“종남의 무인들은 들으라!! 우리의 사부가, 우리의 제자가.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이 저 간악한 마인의 수법에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정정당당한 무공이 아니었다. 마교의 사악한 사술이다. 모두 검을 들어라. 지금은 당황하고 아파하고 슬퍼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손에는 아직 종남검이 있고, 우리의 앞에는 그 검을 겨눌 적이 있다. 그러니 분노하라. 오직 분노하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은 오직 분노뿐이다.”
그의 웅혼한 내공실린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뒤흔들었다.
처음 경험하는 터무니없는 일에 혼란에 빠져있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은 평생을 수련해온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전 중원에서 고르고 고른 재능에 수십년의 고련이 더해진 인재들이다.
부상이 심각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선두에는 몸이 풀려나자마자, 적하진인의 연설이 있기도 전에 먼저 싸움에 합류한 굉명진인 같은 이들이 존재했다.
가면인은 불가해의 존재였다. 하지만 천무십칠성을 비롯한 초절정 고수들의 싸움은 통상적인 무림인의 싸움이었고, 초절정고수들간의 싸움에 절정고수의 손이 보태지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효과를 줄 수 있다.
심지어 적하진인이나 굉명진인과 같은 고수를 주축으로 십여 명이 연수합격을 하면 절정의 고수라도 초절정의 고수를 충분히 묶어둘 수 있다.
운호가 그 싸움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동생의 손가락을 가슴에 품은 남궁철이 함께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