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무한 혈사(4)
파검류 오의
천하(天下)
파검이 노린 것은 모든 무인들을 붙들고 있는 가면인의 마음.
저것을 끊어 놓는다면 붙잡힌 삼백의 절정 고수가 풀려난다. 그리하여 초절정 고수 가운데 둘셋이라도 여기에 합류할 수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
문제는 가면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면인이 몸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가면인과 파검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것으로 파검의 절초가 빗나갔다.
‘오호라.’
그리고 그것으로 깨달았다.
저 괴물의 마음.
이 일검이라면 끊어 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파검이 적절한 거리에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세계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천지에 가득하던 가면인의 마음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다시 치열하게 다투는 초절정 고수들의 다툼만이 남았다.
한 번의 호흡.
그리고 두 번째 짧은 들숨.
아직 몸속의 탁기가 들끓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부웅
가면의 대제사장.
그의 발길질이 눈앞을 스쳤다. 예리한 바람에 눈썹이 살짝 찢겼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머리통이 그대로 날아갈 뻔했다.
파검은 알고 있었다.
그의 검은 저 가면인의 마음을 끊어 놓을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검이 저 마음을 가를 때의 이야기다.
인정해야 한다. 이 괴물은 자신보다 반 수 위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자력으로 이기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녀석이 파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면인의 파상적인 공격이 파검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강요했다.
그리하여 그렇게 누적된 손해가 임계점을 넘어가기 직전의 결정적 순간.
또 한 번 파검이 검을 휘둘렀다.
파검류 오의
천하(天下)
한 호흡 반.
파검이 또 한 호흡 반의 여유를 얻었다. 그랬다. 일격필살의 수단으로 끌 수 있는 시간은 고작 그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절대 해답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파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선택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외부의 변수뿐.
그의 감각이 무신의 싸움으로 향했다.
++
그것은 괴수간의 싸움이라 부를 만했다.
도륜이라는 거한과 모용경의 무공은 분명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쿠웅!!
-쿠과광!!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히는 것이라 믿기 힘든 굉음이 울렸다.
누가 더 강력한지, 누가 더 단단한지를 겨루는 육체와 육체가 맞부딪히는 가장 원초적인 싸움.
역근경에서 말하는 금강불괴는 부서지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화석신공에서 말하는 궁극의 육체 조금 다르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아주 먼 옛날 화석신공의 창시자는 그렇게 단언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자면 최상의 상태라고 해도 언제나 그보다 단단한 것을 만나면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간단하다. 최상의 상태로 빠르게 돌아가면 된다.
압도적인 폭력과 폭력이 엇갈렸다.
-뿌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모용경의 팔목이 부러졌다. 튀어나온 뼈와 살. 그리고 흥건한 핏물. 노인은 비명 대신 기합을 내질렀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되돌아가는 것처럼 그의 몸이 차근차근 재구축됐다. 가면인의 공격에 망가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륜이 핏물 가득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제법이로구나.”
모용경이 그의 칭찬에 주먹으로 답했다.
-콰직!!
도륜의 하악이 박살났다. 후드득 떨어지는 이빨 사이로 모용경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 참혹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도륜 역시 움직임에 막힘이 없었다.
도륜의 옆차기에 모용경의 대퇴골이 골절됐다. 하지만 그것 역시 고작 한 번의 호흡에 제 자리를 찾아갔다. 도륜의 하악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도마뱀의 꼬리가 자라나는 것처럼. 그것을 수천 배 빠르게 돌린 것처럼 도륜의 하악이 제 자리를 찾았다.
괴물과 괴물의 싸움.
도륜은 확신했다.
이 싸움은 자신의 승리라고.
무공의 원리가 다르다.
도륜의 그것이 재생이라면, 모용경의 저것은 고정이다. 어느 쪽이 더 막대한 진기를 사용하는 지는 명백하다.
무엇보다 타고난 육체의 자질이 다르다.
그 증거로 모용경의 크게 부풀었던 몸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도륜의 타고난 강건한 육체는 그 거대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계에서 체급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고양이는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절대 호랑이를 이길 수 없다.
꽉 쥔 도륜의 주먹이 모용경에게 향했다.
* * *
운호에게 죽음은 그리 먼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16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16년의 삶에서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부터 조가촌에서 있었던 그 참혹한 죽음들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불과 몇 각 전만 하더라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소녀가 그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육편으로 스러졌다.
더 처참한 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 바로 곁에 있음에도 그 죽음을 막아내기는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아니다.
차라리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행운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통한 소녀의 죽음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던 소년에게 지금 이 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운호가 절규했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정신과 무관하게 미동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꽁꽁 묶여 있었다.
초월한 고수들의 싸움이 이어졌다.
청우와 청공은 여전히 완벽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하나는 길고 얇았으며 하나는 짧고 뚱뚱했다.
짧고 뚱뚱한 이는 누구보다 빨랐으며 길고 얇은 이는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형과 같은 기운.
같은 자운장.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달랐다.
분노와 좌절로 발버둥 치는 와중에도 운호의 압도적인 오성은 그것의 이유를 찾았다.
분심양검 벽산진인의 검은 여전히 철벽과도 같았다.
또한 무당의 태극은 여전히 불가해의 영역에 존재했다. 그의 오른손과 왼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가 되어 어우러졌다.
-촤자자자자작!!!!
채찍 마인의 공격이 절묘하게 튕겨나갔다. 어쩌면 그 방향조차도 벽산 진인이 의도한 방향일 것이다.
덕분에 청우진인과 청공진인은 자신을 몰아치던 마인의 공격에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 그들은 분명 천무십칠성에 필적하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천무십칠성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본래 호사가들의 이야기만큼 허망한 것은 없다. 지만, 하지만 때론 수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 자리.
분명 청우와 청공은 천무십칠성 가운데 최약체로 꼽히던 검왕보다도 반수 정도 뒤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검왕 남궁벽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본래부터 검왕은 그 무공에서 유가밀공에 상대적 우위를 갖고 있었다. 유가밀공은 기본적으로 기묘한 초식도 초식이지만, 어떤 타격도 받아낼 수 있는 유연함. 그리고 보검조차 견뎌낼 수 있는 단단한 피부를 장점으로 했다.
그러나 검왕의 무공은 천하에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검강이다. 아무리 마인이 유가밀공을 대성했다고 해도 그의 검강이라면 충분히 가를 수 있다.
그에 더하여 분심양검의 ‘작은’ 도움은 승부에 더더욱 큰 영향을 주었다.
기본적으로 비등한 고수간의 싸움이다. 약간의 이득은 조금씩 커졌고, 약 삼십여 합이 지났을 때, 이제는 검왕 남궁벽이 마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세로 변화했다.
상대는 마교의 제사장 중 하나로 추측되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지금 싸움은 전체적으로 비등비등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균형을 깨트리는 것이 검왕 자신이라면?
손녀의 죽음은 개죽음이 아니었다.
마교의 제사장. 더 나아가 이번 전투의 향방을 가르는 희생이다. 손녀도 아마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검왕 남궁벽의 검강이 빛났다.
운호는 생각했다.
머릿 속에는 분노와 좌절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두뇌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전신의 감각이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의 오성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잠깐만.
그리고 마침내 운호가 이상을 눈치챘다.
대체 어째서?
그는 지금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저들의 싸움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사람의 눈은 생각보다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없다. 눈동자만을 돌렸을 때 얻을 수 있는 시야각은 기껏해야 240도. 헌데 그는 어떻게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이 모든 싸움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일까?
* * *
파검이 기대한 것은 모용경이 도륜을 제압하고 또 한 번의 틈을 만들어주는 것, 혹은 저기서 싸우는 초절정고수들간의 싸움에서 정파쪽 인사들이 이득을 얻어 자신에게 합류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하여 버티고 또 버텨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본불은 본래 그런 믿음을 산산이 깨트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다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무슨 헛소리냐.”
가면인은 파검에게 대답하는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말뜻을 보여주었다.
“이런 미······.”
파검의 마음이 한 차원 위로 도약하는데까지 걸린 아주 약간의 시간.
마교의 대제사장은 그 멈춰있는 세상을 홀로 걸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수들이 각자의 싸움을 벌였다. 그들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가면인을 쫓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손가락이 검왕의 검강이 둘러진 검왕의 검을 두들겼다.
그리고 세 걸음을 뛰어가 벽산진인의 태극을 박살냈다.
뒤로 훌쩍 날아올라 소림의 대력금강 공조 대사의 왼팔을 잡아 뜯었다.
“친!!!!”
파검의 검이 가면인의 몸을 찔렀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높은 성채와 같은 그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가면인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분명 천무십칠성과 청우, 청공 쪽이 조금씩 승기를 잡아가고 있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가면인의 개입으로 승부의 추가 순식간에 역전됐다. 가면인이 지금까지 오직 파검 자신에게 집착했기에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멍청한 해적 놈 같으니······.”
핏물을 울컥 삼키며 검왕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욕설을 할 여유라도 있는 것은 검왕 뿐이었다.
벽산진인과 공조대사의 상태는 심각했다. 깨진 태극 사이로 날아들어온 채찍이 벽산진인의 오른손을 박살 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시는 양검으로 불릴 수 없을 것이다.
대력금강 공조 대사의 경우는 그보다 더했다. 어쨌거나 팔의 형상은 남은 벽산진인과 달리 그의 왼팔은 끔찍하게 뜯겨나갔다.
앞으로 기껏해야 서너 초식? 그는 여전히 초절정의 고수였지만 멀쩡할 때도 비등하던 마인을 상대로 한쪽 팔이 날아가 버린 권사가 버텨낼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다.
‘아미타불.’
소림승 공조가 이 세상 마지막 부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저 멀리 바람을 타고 폭력적인 악취가 풍겨왔다.
“거지······. 너무 늦잖아.”
천무십칠성.
그 개개인이 하나의 문파와 맞먹는 강호의 최강자들.
하지만 파검은 오늘따라 그 이름이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걸왕이 더해진다고 역전이 가능할까?
그 절망의 순간.
적어도 무신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