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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84화 (84/288)
  • 84화

    무한 혈사(3)

    종화의 위기 앞에 운호가 소리쳤다.

    -태사조님!!

    그는 이것과 흡사한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몽원경.

    그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다.

    또한 분명 증무 태사조는 이렇게 말했다.

    ‘마인이야말로 이곳 몽원경의 목적이며 이렇게 너와 내가 마주 보는 이유다.’

    4년 전.

    마인과의 첫 만남에서 증무 태사조는 운호에게 놀라운 힘을 빌려줬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다.

    운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위눌림을 깨우는 것은 단 한 번의 꿈틀거림인 것처럼, 아주 약간의 보탬만 더해진다면 지금 이것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운호의 마음이 또 한 번 크게 소리쳤다.

    -태사조님 제발!!!

    하지만 그렇게 편의성 좋은 기적 따윈 없었다.

    몽원경의 증무 진인은 응답하지 않았다.

    -쿠과과과과광!!

    종남의 무인 한 무리가 피떡이 되어 스러졌다.

    종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종화의 몸이 쓰러져 나뒹굴기는 했지만, 목숨은 무사하다. 하지만 운호는 곧바로 안도한 자신에게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운호의 눈이 잘려 나뒹구는 무인의 목 위로 감기지 않은 선명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저들의 의식도 나처럼 명료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토록 또렷한 의식 속에서 그저 무력하게 죽어 나가는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운호의 코앞에서 초절정 고수들 간의 어마어마한 힘의 격돌이 이어졌다.

    검왕 남궁벽.

    파검을 상대로 선보이려던 그 금빛의 검강이 마인을 향해 망설임 없이 쏘아졌다.

    하지만 상대 역시 경지에 이른 고수다.

    검강은 천하에 베지 못할 것이 없는 파괴의 정수이지만 그 검강을 휘두르는 인간의 몸은 그렇지 못하다.

    마교의 고수들 가운데 짙은 피부의 안남인 하나가 검왕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사람의 관절은 본래 정해진 범위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단련하기에 따라 그 가동범위는 얼마든지 넓어지지만 그것 역시 한계라는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저 안남인은 마치 자신의 몸에 관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의 손이 노리는 것은 검을 쥔 검왕의 팔뚝.

    -부웅

    마인의 가슴 한 복판이 명치 부분이 검왕의 검격을 피해 -꿀렁 움직였다.

    인간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움직임.

    그리고 그에 이어 그의 팔이 쭈욱 검왕의 몸을 향해 나아갔다.

    뒤로 물러난 가슴과 전혀 별개의 생물처럼 움직이는 팔. 어깨의 관절이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팔이 주욱 늘어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 기괴한 형상에 운호가 깜짝 놀랐다.

    저것은 이해에 특출난 재능을 지닌 그로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무공이다.

    -퍼억!!

    하지만 검왕 역시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는 단순히 검강만을 휘두르는 머저리가 아니다. 검왕이 쥐고 있던 검의 검병으로 안남인의 팔목을 내리 찍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 걸음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눈치가 빠르군.”

    혼탁한 빛으로 번들거리는 안남인의 손끝에 검왕의 옷가지가 녹아내렸다.

    “유가밀공에 독공인가? 최악이로군.”

    하지만 최악이라는 말과는 달리 검을 쥔 얼굴에는 오만함이 넘쳐흘렀다.

    그래, 그렇기에 검왕이다.

    운호는 검왕의 검술에서 남궁철이 추구하던 남궁세가 검술의 궁극. 그것이 말하는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청우와 청공은 완벽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길고 얇았으며 하나는 짧고 뚱뚱했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의 특성 역시 그러했다. 실로 기이한 일이다. 그들이 익힌 무공은 같은 자하 신공이었다. 또한 그들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운장이다.

    하지만 어떻게 저토록 다른 형상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청우 진인은 짧고 뚱뚱했지만, 누구보다 빨랐다.

    청공 진인은 길고 얇았지만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형이 다른가?

    아니다.

    기운이 다른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다르게 만들었는가?

    운호가 고민했다.

    무당파, 분심양검 벽산진인의 검이 마인의 채찍을 간신히 막아냈다.

    -촤자자자자작!!!!

    “호오, 이걸 막아? 제법인데?”

    “······.”

    마인의 채찍은 신속(迅速)을 넘어 신속(神速)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채찍은 화약병기를 제외한 인간의 창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소리의 속도를 돌파하는 창조물이다. 채찍의 끝이 소리의 속도를 돌파하는 것은 절정의 고수가 아닌 보통의 사람이라도 가능하다.

    하물며 마인은 경지에 이른 자였다.

    강철과 가죽이 섞인 저 기묘한 병기는 한방 한방이 화탄의 그것에 맞먹는 위력을 품고 있었다.

    분심양검이 자신의 두 번째 검을 뽑아 들었다.

    무당 최고의 기공 중 하나인 양의심공을 대성한 그의 검은 같은 수준의 고수 둘이 합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낼 수 있기로 유명했다.

    그의 검이 태극을 그렸다.

    그리고 그 태극을 마인의 채찍이 두들겼다.

    천지를 울리는 굉음.

    분심양검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검을 펼쳤다. 그 태극은 완성된 무당의 세계관이었다.

    저것은 분명 검이었지만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저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모두가 굳어, 아무런 저항 없이 죽어가는 세상.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이 저마다 절초를 뽐내는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그렇게 운호는 다양하게 펼쳐진 인간의 한계 너머를 지켜봤다.

    그리고 분심양검의 태극이 마침내 단순히 마인의 채찍을 막는 것을 넘어 그것을 절묘하게 튕겨냈다.

    튕겨 나간 방향은 남궁벽이 상대하고 있던 독공을 사용하는 마인 쪽.

    마인의 몸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기회!!’

    남궁벽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동시에 운호의 눈이 커졌다.

    남궁벽과 마인이 싸우던 곳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모여있는 곳 근처였다.

    그렇기에 마인이 회피한 채찍의 여파가 닿는 곳은 남궁세가의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정확히 남궁혜였다.

    남궁벽이 아주 잠시 고민했다.

    물론 그것은 남궁혜를 구할까 말까 하는 종류의 고민은 아니었다.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상대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을까?

    만약 마인의 채찍이 향한 곳이 남궁철 쪽이었다면 그는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당연히 남궁철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계집 아이다.

    생긴 것은 반반하니 어딘가 좋은 동맹 자리에 시집 보내기 좋긴 하겠지만, 뭐 그거야 정 필요하면 양녀를 하나 얻어도 그만이다.

    검왕의 검이 마인의 몸에 작은 상처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운호가 절규했다.

    안돼!!!!!!!!!

    증무태사조님 제발!! 제발!! 제바아아알!!!

    -퍼억!!

    그러나 운호의 몸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가면인은 진심으로 크게 놀랐다.

    덕분에 하마터면 절정의 무인들을 제약하고 있던 힘이 풀릴뻔했다.

    “어떻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파검이 자신의 검과 가면인의 등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심상에 새겨진 검은 천하에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비록 그 심상의 검을 현실의 검과 일치시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일단 그렇게 현실에 구현된 검은 그의 심상과 마찬가지로 천하에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놀랍게도 파검의 검이 가르고 지나간 가면인의 등은 붉은 자국만이 남았을 뿐, 상처 하나 남지 않아 있었다.

    무신 모용경이 숨을 헐떡이며 두 걸음 크게 물러났다.

    가면인의 손에 박살난 오른쪽 늑골이 폐를 찔렀다.

    -후읍

    상리에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근육이 꿈틀댔다. 그리고 폐를 찌르던 늑골이 스스로 자리를 찾아갔다. 모용경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세 번의 호흡.

    고작 그 시간 만에 모용경의 몸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돌아갔다.

    “노사, 거 금강불괴라더니 너무 쉽게 박살나는 거 아니요?”

    “그러는 네 녀석은 천하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더니 그런 거 치고는 너무 말짱한 거 아니냐?”

    파검 좌부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말이요. 그나저나 이제 우리 좀 큰일 난 것 같소.”

    “응?”

    파검의 시선 끝.

    처음 그의 일격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거한이 -우드득 몸을 풀어가며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파검의 일검에 잘려 나가기 직전까지 갔던 팔뚝은 어느새 흉터만을 남긴 채 제 자리에 얌전히 붙어있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막아 볼테니, 얼른 뭉개고 합류하쇼.”

    “글쎄다. 저 친구도 얼른 뭉개버리기에는 영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그렇다고 노사가 저 녀석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요. 저거 아예 혼자 다른 세상에서 노는 것 같던데.”

    “너는 괜찮으냐?”

    “괜찮아야지 어쩌겠소. 지금 온 가족이 쫄딱 알거지가 돼서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어차피 이래서는 살아 돌아가도 마누라 손에 죽을 판이요. 그렇게 몰빵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내가 미쳤지.”

    모용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강이가 무슨 전쟁 채권을 파네 뭐네 하더니. 오늘 우리가 이긴다면 그 녀석이 무림을 구한 셈이 되겠구나.”

    “하여간 남궁벽 그 멍청한 놈이 자식 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은 거 아니겠소.”

    “그러게나 말이다.”

    “저 자식 팔뚝 아직 완전한 거 아닐거요. 금강불괴니 뭐니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심검(心劍)은 그리 허술하지 않소.”

    모용경이 자신의 옆구리를 가볍게 쓸었다.

    가면인의 손이 쓸고 지나간 자리. 금강불괴지신의 묘용으로 형상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강기조차 튕겨내는 단단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검 좌부원의 말 대로라면 저 가면인의 공격 역시 그 심검과 비슷한 무엇인 것일까?

    “그래, 알겠다. 참고하마.”

    오늘 아주 못보일 꼴만 잔뜩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무신 모용경이다.

    모용경이 힘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 키는 여전히 저 거한보다 작았지만 덩치는 그에 못지 않다.

    -쾅!!

    거인과 거인의 격렬한 부딪힘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싸움의 뒤편.

    가면인이 파검을 노려봤다.

    “하나의 싹을 밟았더니 또 어디선가 다른 싹이 자라나다니. 그래, 과연 중원이로구나.”

    “과연 중원은 무슨. 그보다 한 가지만 좀 묻자. 네가 진짜 그 전설로 전해지는 마교의 대제사장이냐?”

    “대제사장이라······. 뭐 그래. 너희의 표현대로라면 그러하다.”

    “그러니까 그 불로불사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사실이라 뭐 그런 거냐? 포달랍궁의 활불처럼 전생을 이어가는 뭐 그런 건가?”

    가면인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를 고작 그런 불완전한 자와 비교하지 말아라. 나는 가섭존자가 최초의 오백 결집으로 모았던 이들 가운데 하나이며 붓다에게 직접 동방 계몽의 임무를 부여받은 아라한이다.”

    아라한?

    붓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가면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자는 무려 2천 년 가깝게 살아온 존재라는 말이 된다.

    그럴 리가.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조금 더 우쭈쭈 해줘볼까?

    하지만 가면인이 조금 빨랐다.

    “그렇게 시간을 끌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너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구나.”

    자신을 마교의 대제사장이라 주장하는 가면인이 한걸음 크게 다가왔다.

    온다.

    파검이 마음의 검을 세웠다.

    -슉

    어느새 파검의 볼에 긴 상처가 새겨졌다.

    하지만 피해냈다.

    전혀 다른 시간축.

    파검은 오직 자신이 심상을 현실에 온전히 구현했을 때만 이 괴물과 같은 높이에 설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뇌가 불타올랐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융통무애(融通無碍)하게 느껴지던 진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부족하다.

    파검의 검이 대제사장을 위협했다.

    -부웅

    한 걸음.

    파검이 크게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날숨을 따라 막대한 탁기가 빠져나온다. 그리고 한 번의 들숨으로 그의 진기가 다시금 이어졌다.

    -찌지직

    아슬아슬했다.

    어느새 날아든 가면인의 오른발이 그의 앞섶을 스치고 지나갔다.

    빌어먹을 내공.

    마음의 검을 쥐는 순간 또 다시 저 괴물의 몸과 연결된 수백 개의 ‘선’이 보였다. 그래, 저것이야말로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고수들을 묶어 둔 저 괴물의 ‘마음’일 것이다.

    파검의 마음이 괴물의 마음과 맞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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