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무한 혈사(1)
“누구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하얀 상복을 걸친 종남의 한 제자였다.
“오, 종남의 아이로구나. 그래, 검선의 일은 참 유감스럽게 됐다. 그 아이가 설마 그런 수준에 이르렀을 줄은 몰랐던 나의 실수다.”
실로 기이한 사내였다.
검은 옷, 검은 장삼. 그리고 얼굴에는 가면을 썼다.
대체 어떻게 저런 꼴을 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저 가면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고통.
운호는, 아니 이곳에 모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 가면은 인간의 ‘고통’을 완벽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 노옴!! 감히!!”
검선을 아이라 칭하는 무례함에 종남의 제자는 참지 않았다.
절정지경에 이른 순양검이 빛을 발했다. 사내가 오십 년이나 동정을 유지하며 쌓아 올린 막대한 양강의 공력이다. 검을 둘러싼 대기가 이글거렸다.
그 공격 앞에 고통의 가면을 쓴 사내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섬섬옥수.
그래 섬섬옥수다.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한 옷과 대조되는 새하얀 손이 이상하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움직이던 종남 제자의 검이 허공에 멈춰 섰다.
하얀 손가락.
순양의 기운이 그득 담긴 그 검극이 검지와 엄지 두 개의 손가락 사이에서 옴짝달싹 움직이지 않았다.
종남제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사내가 웃었다.
아니다. 모를 일이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운호는 그 남자가 지금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한순간
순양공의 영향으로 이글거리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바스스
800년 전의 기술과 방식을 고집하던 종남의 상징.
보통의 검보다 더 길고 더 두꺼운 그 종남검이 사내의 손끝과 닿은 곳부터 모래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적오야!! 피해라!!”
종남 장문인 순양검 적하진인이 소리쳤다.
또한, 그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모용세가의 무신(武神) 모용경.
소림사의 대력금강(大力金剛) 공조 대사.
하북팽가의 단악도(斷岳刀) 팽불청
무당파의 분심양검(分心兩劍) 벽산 진인.
남궁세가의 검왕(劍王) 남궁벽.
화산파의 반돈아(胖墩儿) 청우와 수건아(瘦干儿) 청공.
그리고 남해 해룡방의 파검(波劍) 좌부원까지
약속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직 이 자리에서 그들만이 저 현상의 진정한 의미를 인지했다.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 여덟이 오직 그 검은 사내 하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가장 뚱뚱한 화산파의 반돈아 청우 진인이었다.
그의 짧은 팔과 오동통한 주먹이 고통의 가면을 쓴 사내를 꿰뚫었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라고 해도 좋을 순간.
분심양검 벽산 진인의 검극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파스스
그들의 뒤편으로 벌개진 얼굴, 분노한 표정 그대로 종남의 일대 제자 적오진인의 몸이 먼지로 스러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청우 진인과 벽산 진인의 공격을 받은 가면 사내의 몸이 신기루처럼 스러졌다.
이형환위.
“이쪽이다!!”
무신 모용경.
그리고 파검 좌부원.
화석신공(化石神功)
모용세가 비전의 무공을 대성한 모용경의 몸은 이미 청동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천하무림의 수많은 공부 가운데 금강불괴를 달성해낸 것은 소림의 역근과 모용의 화석이 유일하다.
모용경의 오른손에 만근거력이 깃들었다.
그것은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손이기에 견뎌낼 수 있는 막대한 힘이었다.
고통의 가면도 감히 그것을 경시할 수는 없었을까?
그의 하얀 손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종남의 검을 멈춰 세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신 모용경의 주먹은 종남의 검과 달랐다.
분명하게 느려졌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주먹이 고통의 가면을 쓴 괴인의 하얀 손과 맞부딪혔다.
-콰과과과광!!
주먹과 손바닥의 부딪힘이라고는 믿기 힘든 어마어마한 충격파와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주변을 휩쓸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가운데 고수가 아닌 이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 대부분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 경력을 해소해야만 했다.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인물의 일격이다. 아무리 저 고통의 가면이 대단한 작자라고 해도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누군가가 기대를 담아 중얼거렸다.
“해치운 건가?”
하지만 그 충격에서 가장 가까운 곳.
파검 좌부원의 생각은 달랐다.
몰아치는 충격파. 그리고 그 충격파를 따라 흩날리는 흙먼지.
바닥의 모래와 돌맹이가 그의 피부를 스쳤다. 감히 천하제일을 자처하는 무인의 피부가 너무 힘없이 찢겨 핏물이 흘렀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단 일 검.
그것이면 족했다.
완성된 그의 소우주에 선명한 검이 바로 섰다. 그리고 그 선명한 검과 현실의 그가 쥔 검이 겹쳐졌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파검 좌부원의 평생이었으니, 그야말로 천하제일인의 검이라 칭할만했다.
파검류 오의
천하(天下)
파검 좌부원의 일검이 세상을 가르며 가면인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강철과 같은 무언가가 그 검 앞을 가로막았다.
“어이쿠, 이건 그냥 지켜보기에 너무 위험하구나.”
-스윽
마치 불교의 사천왕상이 현실에 나타난다면 저런 모습일까?
운호가 지금까지 본 사람 가운데 가장 거대한 사람은 장광이었다. 그 녀석의 키는 이제 구척을 넘어 구척 이촌에 근접했다.
하지만 지금 저 앞에 선 사내는 확실히 그보다 더 거대했다.
‘십 척?’
무엇보다 그 거대한 키에 어울리는 저 장대한 체구가 장관이었다.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육체는 그야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해보였다. 상완의 둘레가 어지간한 여인네의 허리보다 두껍다.
하지만 그 두꺼운 상완에 연결된 하박.
두꺼운 전완근은 썩둑 잘려나갔고 그 아래 뼈까지 완벽하게 박살이 났다. 그야말로 얇은 거죽에 팔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거한은 마치 통증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모용경과 가면인이 충돌한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속하가 주제넘게 나서버렸습니다.”
“아니다. 잘했다. 설마 여기에 이치에 닿은 이가 있을 줄이야. 그것도 불가도 도가도 아닌 방법으로 말이지.”
파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검을 움켜쥐었다.
천하에 가르지 못할 게 없는 일격이라 자신했는데, 사람의 몸뚱이조차 가르지 못할 줄이야.
“너무 자책할 것 없다. 네 검은 분명 이치에 닿아 있었다. 오히려 자랑해도 좋다. 도륜의 몸은 이미 금강불괴에 이르렀거늘 그런 몸을 저리 만들었으니 말이다.”
고통의 가면 뒤편.
전신을 청동빛으로 물들인 모용경이 한쪽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장내의 사람들이 그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랐다.
무신 모용경이 고작 일합에 패배했다고?
아니, 그보다 다른 천무십칠성은 대체 뭐를 하고 있는 거지?
여섯.
강철과 같은 거한을 제외하고 총 여섯의 사람이 천무십칠성과 가면 사내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마······, 마인이다!!”
저 가면사내, 그리고 거한과는 조금 달랐다.
천지를 진동하는 자욱한 마기.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이것을 못 느낀 것일까?
이곳에 선 마인 하나하나가 천무십칠성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천급의 마두들이었다.
대력금강, 단악도, 분심양검, 검왕, 반돈아, 수건아.
여섯의 초절정 고수가 마치 굳은 것처럼 그들과 대치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장내의 군웅들이 빠르게 자신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습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쳐들어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마.”
아직 상복을 벗지 않은 종남의 장문인 순양검 적하진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가면사내는 적하진인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파검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대는 중원 전통의 도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하야나도 아니구나.”
“마하야나?”
그 건방진 모습에 적하진인이 분노했다.
내 당장 저놈들을 요절내겠다.
자, 종남의 무인들은 모두 검을 뽑아 저 마교의 악적들에게 복수의 쓴맛을 보여주도록 하자.
하지만 그 마음과 달리 적하진인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문 사형?”
“장문인!!”
“사, 사술인가?”
그리고 그사이 가면 사내와 파검이 말을 이어갔다.
“아, 그러니까 너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불교가 되겠구나. 보리 달마가 훔쳐 간 가르침을 따르는 그들 말이다.”
“아, 그거라면. 아무래도 내가 종교와는 거리가 좀 있는 출신이라서 말이지.”
“참으로 기묘하다. 그대는 마치 뿌리와 줄기 없이 피어오른 꽃과 같구나.”
파검이 웃었다.
이거 어째 소싯적에 기방에서 자신이 많이 해본 말과 비슷하다?
“꽃이라니. 설마 지금 본좌를 유혹이라도 하는 거냐?”
“유혹이라······. 그래 유혹이라면 유혹이지. 어떠냐. 내 밑에 들어오는 것은? 그대는 그대 스스로의 방법으로 이치를 따라왔으니 속죄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나보고 얘들 배신하고 마교 쪽에 붙어라. 뭐 그런 말인가?”
파검의 시선이 모용경을 훑었다. 한쪽 어깨가 완전히 박살났다.
“순리를 따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배신을 권하면서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 이야기하는 가면인의 모습에 파검이 입을 비죽거렸다.
“내가 볼 때 넌 절대 여자 꼬시는 건 못하겠다.”
“갑자기 그게 무슨!!”
“그리고 순리라······. 그래 순리 좋지. 근데 말이지 내가 배신을 하려면 한 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단 말이야.”
“문제?”
“내가 이번에 문파의 부동산을 담보로 빌린 돈 전액을 구대문파와 칠대세가 명의로 발행한 전쟁채권 구매에 투자했단 말이지. 하여간 남궁벽 그 자식 아들 하나는 기가 막히게 뒀어요. 전쟁조차 그렇게 나눠서 팔아치울 줄이야.”
“전쟁채권?”
“어, 쉽게 말해서 지금 네놈들이 이기면 내 방도와 가족들은 모조리 알거지가 돼서 길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이 말이다. 젠장, 너 같은 괴물이 있는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해봤을 텐데.”
“아니, 잠깐. 그게 무슨······.”
전혀 예상치 못했던 파검의 이야기에 가면인이 당황했다.
그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확실하다. 분명 파검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치에 닿은 고수가 문파를 담보로 돈을 빌려서 그걸 모조리 무림맹의 승리에 걸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마교에 붙을 수 없는 이유가 고작 그 ‘돈’ 때문이고? 그러니까 그 누렇게 반짝이는 그 ‘돈’?
“그래, 그 표정 내가 아주 잘 알지.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돈 무서운 줄을 모른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대가 원하는 것이 고작 금붙이라면······.”
“고작 금붙이가 아니다!! 황금과 달라!! 젠장!!! 이런 마교의 남궁벽 같으니라고. 모용노사, 나 도저히 답답해서 이 남궁벽 같은 놈과 대화 못 하겠소.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요.”
-후읍
“고생했다.”
무신 모용경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