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무한(11)
내가기공이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은 단순히 내공의 양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거나, 신체 능력이 증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것은 일종의 도약이다.
아직 날지 못하던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씨앗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처럼.
그렇기에 보통의 경우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무공의 초식이란 단순히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내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정교하다.
“다시.”
그덕분에 몽원경에서의 싸움은 그 이전과 비교조차 하기 힘들만큼 어려워졌다. 당연하다. 분명 운호는 포원공 이단공에 오르기 전과 비교하면 더 강해진 것은 맞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몽원경에서 증무진인의 한계는 운호의 수준으로 맞춰진다.
즉 이전의 운호와 증무진인은 모두 하나의 역량을 최대치에 가깝게 발휘하는 상태였다면 이제 포원공 이단공에 도달함으로 올라간 그 역량을 운호는 제대로 다 활용하지 못하는 반면, 증무진인은 이전과 별 차이 없이 한계치의 역량을 발휘한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지만, 증무진인의 검이 더 먼저 도착했다.
운호가 이를 악물었다.
운호와 증무진인이 만난 것도 벌써 4년 째다.
그는 이제 증무진인을 안다. 이 공간에서 증무진인은 운호를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한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있을지라도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원경에서 증무진인이 보여주는 것은 운호 자신도 할 수 있는 일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포원공의 진기가 약동했다.
훨씬 더 끈적하고 느릿하다. 하지만 거기에 실린 힘의 크기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같은 양을 움직였다고 했을 때, 세 배? 아니 어쩌면 네 배?
조금이나마 검술이 아닌 기공이야말로 정답이라고 주장하던 화산파 장로들의 이야기가 이해가 됐다.
운호의 검에 한층 더 큰 힘이 실렸다.
이제 증무진인의 검이 움직이는 속도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뻐억!!
증무진인의 검면이 운호의 뺨을 강타했다.
-퉤
붉은 핏물과 함께 부러진 어금니가 바닥을 굴렀다.
“멍청하기는.”
“압니다. 알아요. 힘도, 속도도, 화려한 눈속임도. 결국 모두 수단일 뿐. 목적은 될 수 없다.”
“그걸 아는 녀석이?”
“아니까 그러는 겁니다. 내 힘이 어디까지인지, 속도가 어디까지인지 눈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으니까요. 직접 몸으로 실현해봐야죠.”
증무진인이 웃었다.
이제 억지소리에도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던 어린 아이는 없었다.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지만 그래도 저 녀석은 자기 발로 걷는 무인이다.
“그래, 이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이냐. 아무리 찔려도, 맞아도 죽지 않는다니.”
“이왕이면 아픈 것도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증무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현실을 최대한 모방하지 않는다면······.”
증무진인이 말을 멈췄다.
공과격이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운호의 검이 증무진인의 몸을 노렸다.
-우웅
포원공의 진기가 실린 검이 울었다.
어기충검(御氣充劍)에 이은 검명(劍鳴)이다.
검기나 검강과 같이 특별한 경지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운호의 내공이 최소한 검 전체에 충만하게 퍼졌다는 증거 정도는 된다.
증무진인의 몸이 검과 하나 됐다.
-서걱
그리고 그 일격에 운호의 검이 절반 정도 잘려 나갔다.
“어설프다. 어기충검이라고 해봤자 무적이 아니거늘. 그렇게 무턱대고 휘두르다니 대체 무슨 자신감이더냐.”
“그래도 신기술인데 한 번 정도는 놀라주시는 게 미덕 아닙니까?”
“애당초 검기까지 쓰던 놈이 신기술은 무슨.”
사실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기는 했다.
검기는 사용하는 주제에 어기충검을 통한 검명은 발현하지 못하다니.
그것은 검기를 사용할만한 깨달음이 있었음에도, 그 진기의 부족이 검명은커녕 어기충검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할 만큼 심각했다는 의미였다.
증무진인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이야기 속의 도술처럼 그의 손에 새로운 검 한 자루가 휙 하고 나타났다.
“자, 받아라.”
새로운 경지에 이르면 그것에 적응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몽원경
증무진인의 가르침 속에 운호는 그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증무진인의 가르침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증무진인 본인의 평가에 따르자면 백운호는 석년 자신보다 아주 조금 부족한 수준의 압도적인 사고력과 인지력을 갖추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상태를, 그리고 자신과 증무진인의 차이를 매우 명확하게 파악했다.
운호의 검이 조금씩 증무진인의 그것을 닮아갔다.
* * *
“숙부님. 그냥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을 먼저 쓸어버립시다.”
무신 모용경이 미간을 주물렀다.
골이 지끈거린다.
이래서 이 녀석을 오지 못 하게 했던 것인데. 하여간에 화산파 놈들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청우, 청공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이 골칫덩어리가 무한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거지도 그렇지만 특히 해적 놈들. 그놈들이 그렇게 잔뜩 여기까지 온 의도가 뭐겠습니까. 그거 아주 음흉한 놈들입니다. 마교의 간자들이에요. 간자들!!”
어느새 녀석의 이야기에서 개방과 해룡방은 마교의 간자들이 되어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예전처럼 엉덩이라도 두들겨 내쫓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게다가 쓸데없이 무공에 재능은 있어서 자신과 똑같은 천무십칠성에 이름을 올려놨다.
“벽아, 청우는 만나고 온 게냐?”
“아······.”
“그 녀석 아예 자기네 장원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너희 장원에 붙어서 하루에 여섯 끼씩 처먹고 있다고 하더구나.”
“강이가 대접 잘 하고 있나보군요. 하긴 그 녀석이 무공은 좀 미흡해도 그런 건 잘 챙기죠.”
남궁벽이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남궁강에게 가주 자리를 빨리 물려준 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가문의 재산을 워낙에 이상한 곳에 축내다가 쫓겨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쨌거나 무가에서 초절정고수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녀석이 끝까지 꼬장을 피웠다면 남궁강이 가주 자리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랬더라면 남궁 세가는 지금 성세의 절반도 채 구가하지 못했을 것이고.
“가서 청우나 만나보거라. 그리고 내일부터 회합이 시작되니 괜히 좌부원과 소진평을 자극하지 말고. 검선이 마교 놈들에게 죽었다. 무엇이 우선인지를 생각해라.”
“······.”
검왕 남궁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 * *
“그래서 그렇게 꽁해있는 것이야?”
“꽁하다니요. 강호의 명숙으로 강호의 앞날을 걱정하는 겁니다. 형님,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이 상황에 개방의 거지와 남해의 해적놈이 여기에 이렇게 대규모로 와있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마교 놈들이랑 힘을 합쳐서 저희를 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흐음······, 글쎄? 파검은 자기 손녀까지 데리고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그냥 황학루가 유명하다니까 관광을 온 게 아닐까? 그보다 너도 이거 하나 먹어봐. 내가 산에 들어가 있던 사이에 남궁세가 진짜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청우 진인이 탕후루를 집어먹은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이런 간식을 내놓은 남궁세가의 발전에 감탄했다.
분명 20년 전 남궁벽이 가주로 있을 때만 하더라도 간식은커녕 밥도 제대로 안 주던 남궁세가가 대체 어느새 이토록 호화로운 간식을 무제한으로 제공하게 된 것일까?
그의 시선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탕과로 향했다.
-오물오물
청우 진인이 탕과를 거절하는 남궁벽을 대신하여 그의 몫까지 한껏 입안에 집어 넣었다.
“그냥 관광을 오기는 이 시기에 대체 왜 온답니까. 손녀 데리고 온 것도 전부 저희를 방심시키려는 수작입니다. 해적 놈 그거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서 손녀고 뭐고 없다니까요.”
“그러면 넌 좋은 거 아니야?”
“네?”
“여기 모인 면면을 좀 보라고. 무신에 대력, 단악도에 양검에 벽이 너. 그리고 청우와 나까지. 게다가 구파와 칠가에서 모인 절정 고수의 숫자만 하더라도 삼백에 가까워. 파검이랑 걸왕이 미친 척하고 달려들면 그대로 박살 날 전력이잖아.”
참으로 사리에 맞는 이야기다.
그 사리에 맞는 이야기에 검왕이 신경질적으로 간식 그릇을 낚아챘다.
“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살찝니다. 무인이 몸이 그게 뭡니까. 그게 다 이런 거 먹어서 찌는 겁니다.”
“하······, 하지만!!”
“그리고 이런 달달한 거 계속 먹으면 저녁에 입맛 없어요.”
“아냐!! 나 다 먹고 저녁도 맛있게 먹을 자신 있어!!”
“아무튼 안 됩니다. 간식 그만 드세요.”
이거 차라리 그냥 같이 가서 해적을 때려잡아줘야하냐?
청우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운호는 남궁철에게 제갈첨과의 만남을 부탁했다.
하지만 만남은 쉽지 않았다. 이전, 운호와 화산파를 의심하던 시절이라면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만남을 우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철의 보고, 그리고 종남에서 있었던 그 싸움을 생각한다면 그 의심은 터무니없었다.
무엇보다 무한에 모이는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무인 숫자만 하더라도 물경 사백에 달한다. 게다가 이런 큰 행사를 가까이서 보고자 모인 속가의 무사들과 구파나 칠가와 연줄을 만들어보고자 어슬렁대는 인물들까지.
물론 한구부성은 고급의 장원들로만 구성된 곳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골치가 아팠다. 이곳에 모인 외부의 인물 가운데 일방적으로 무시할만한 인사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갈첨은 칠대세가 실무진 전체를 조율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행사를 치르기 위해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제갈첨이 운호와의 만남에 귀찮음을 숨기지 않았다.
“철이에게 나를 보고 싶다고 전해 들었다. 시간이 그러니까······. 일각 정도 괜찮겠군.”
제법 높은 수준으로 무공을 익힌 몸임에도 불구하고 제갈첨의 눈 밑은 거뭇하게 물들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남자의 성향을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의 만남을 반추할 때, 이 남자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고 그것을 꼬박꼬박 티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굳이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는 없었다.
운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마교의 전력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마교의 전력?”
제갈첨의 시선이 운호를 훑었다.
이건 또 무슨 질문일까?
운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각밖에 없으시다면서요.”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굳이 너의 질문에 대답해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마교는 감히 저희에게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글쎄······.”
확실하다.
이 인간, 지금 이렇게 구파와 칠가를 모조리 모은 주제에 그 목표인 마교는 눈 아래로 깔고 보고 있다.
지금 이 인간이 목표하는 것은 마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제갈첨의 머리 속에서 승리는 이미 확정이다. 그저 어떻게 승리하느냐 하는 승리의 과정. 그리고 승리 이후, 전리품의 분배다.
운호가 물었다.
“마교가 대체 왜, 하필 지금 시점에서 자신들을 드러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 우연?”
제갈첨이 성의없이 대답했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호는 몽원경의 증무진인이 마인에게 보여줬던 반응이.
그리고 하필 섬서성에서만 꾸준히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토록 힘들게 만들어낸 신기술을 그토록 어이없이 드러낸 마교의 멍청함이.
어쩐지 불안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만약 ‘군사’님이 마교의 인물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무림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 어떤 수를 쓰실 것 같으십니까?”
군사······.
그 달콤한 말에 제갈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특별히 저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