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무한(9)
파검과 검선의 인연이라니.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아, 별 건 아니고. 15년 전인가? 그 양반이 홀몸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전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려고 하는 데 좀 도와달라고 하더군. 뭐 그래놓고는 정작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움을 주고 사라졌지만 말이지.”
15년 전이라면 종화의 나이 고작 두 살. 아직 종남에 입산도 하기 전 이야기다.
당시 검선은 일흔을 목전에 둔 나이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 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상태였고, 파검은 고작 쉰일곱. 초절정의 경지에 이제 막 오른 상태였다.
파검 좌부원의 기억에 의하자면 당시 검선은 파검과 한차례 검을 섞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에게 검은 친우가 아닌 그저 신외지물이로구나.”
“그러는 노사는 검이 무슨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시는구려. 그러니까 그 나이까지 아직 여인도 자식도 없이 그러는 것 아니요.”
“클클클, 그랬던가? 확실히 내가 여인들에게 인기가 없기는 없었지.”
“아니······, 농담으로 한 말을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내가 무안해지지 않소.”
검선의 스스로 허공에 떠 있는 검을 슬쩍 움켜쥐었다.
“이 늙은 도사는 평생동안 자신과 검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력해왔다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것 역시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 들더군.”
파검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 늙은 도사가 하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어쩌면 저것은 저 태을검선의 평생일지도 모른다.
헌데 왜?
종남의 후예도 아닌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검선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나를 이 녀석까지 확장했다네. 그 결과 이제는 이 녀석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이 녀석이지. 하지만 말이야, 문득 이런 의문이 들더군. 만약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검과 나를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검에게 강요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일세. 물론 그 결과가 초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의문이겠지. 하지만······.”
“본인이 나타났다. 그 말이구려.”
“그래, 바로 그걸세. 그저 서로가 밟지 않았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이야기해보자 이 말이지.”
검선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공정한 거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로가 그 길을 걸었던 시간 자체가 다르다. 검선은 파검보다 더 멀리 더 높이 올랐다.
명백하게 파검에게 더 이득인 거래다. 그렇기에 파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 않겠소. 나 좌부원. 비록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단 한 순간도 부당한 이득을 취했던 적이 없다 자부하오. 이건 노사에게 너무 불리한 거래요.”
-클클클
파검 좌부원의 그 패기 넘치는 말에 검선이 기꺼이 웃었다.
온통 모리배투성이인 이 강호 무림에 저런 기상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그쪽이 이득을 보는 것 같아 싫다 이 말이로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나. 그대와 무학을 나누는 것을 검선이 아닌 종남으로 하는 것 말일세.”
“검선이 아닌 종남이라······.”
어쩌면 검선은 그저 패기 넘치는 후배에게 약간의 호의를 베푼 것일지도 몰랐다. 그 역시 부족하다고는 했지만 어찌 됐건 자신과 아주 약간의 엇갈린 길을 따라 초절정에 이른 고수의 경험을 꼭 듣고 싶었을 테니까.
하지만 파검은 그의 말을 가슴 깊숙한 곳에 새겨두었다.
“당시의 노사는 나에게 정말 큰 것을 받아 갔다고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내가 드린 것과 받은 것을 측량하자면 그것은 감히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파검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나의 나이가 당시 노사의 나이 정도 될 것 같구나. 노사는 나에게 10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절약하게 해주었다. 너희는 아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파검은 천하에 뭇 고수들 가운데 스스로의 천재성으로 천무십칠성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남자다. 태을검선은 그런 그에게 10년을 절약하게 하였다.
“자, 머리에 똑똑히 새겨두거라. 이것이 천하제일인의 가르침이다.”
* * *
파검이 스스로를 천하제일인이라 칭하는 바로 그 순간, 운호가 빠르게 여덟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부족하다. 운호는 파검의 의도가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운호가 검을 뽑아들었다.
포원공의 진기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폭발적으로 순환했다. 부족하다. 몹시 부족하다.
파검의 무심한 시선이 운호를 스쳤다.
하지만 파검의 속내는 그 무심한 시선과는 조금 달랐다.
‘이걸?’
남궁철에게는 거하게 술을 얻어먹은 빚이, 종남의 아이에게는 태을검선에게 진 빚이 존재했다. 하지만 운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그것은 그저 호기심뿐.
하지만 그 호기심이 지금 운호의 저 동작으로 더 커졌다. 분명 무공의 수준은 남궁철이 더 높았음에도 이것을 인지한 것은 저 백운호뿐이었다.
당장 코앞에 선 종화조차도 절대고수의 압도적인 기세를 느꼈을 뿐이다.
당연하다. 두려움이란 그 두려움의 대상을 인지할 때만 가능한 법이다. 대해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은 동정호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막연히 넓을 뿐이다.
지금 파검의 저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한 것은 오직 운호뿐이었다. 그리고 파검은 그것을 눈치챘다.
“아이야, 네 차례는 이다음이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운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검에 힘을 더했을 뿐.
파검의 시선이 운호를 떠났다.
종화가 종남의 검을 빼들었다. 그래, 바로 저 검이다.
그날의 문답 이후 태을검선은 저 검을 버렸고, 파검은 더 이상 검을 단순한 신외지물이 아닌 몸의 일부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파검의 시야가 종화를 살폈다.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무리.
그녀가 당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고차원의 무리.
그녀가 먼 훗날 ‘아하’ 하며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 한계 너머의 무리.
그리고 백에 구십구. 절대 깨닫지 못할 천하제일인의 무공까지.
일 검.
이 검.
그리고 삼 검.
오직 삼 초식.
파검의 검이 종남의 검을 갈랐다.
하지만 부족했다. 단, 부족한 것은 파검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종화의 기량이, 종화의 세계관이, 종화의 인지능력이 파검의 계산보다 아주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흐음, 이거 셈이 여전히 부족하구나. 곤란하게 됐군.”
파검이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잘생긴 턱을 긁적였다.
“그래, 이렇게 하자. 훗날 네 무공에 크게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나를 찾아오거라. 나머지 셈은 그때 치르도록 하자꾸나. 그러니까 어디 보자······. 앞으로 이십 년? 그래, 그 정도는 괜찮겠지. 혹시라도 그때까지 벽을 만나지 못 한다면 그것 역시 너의 팔자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파검의 시선이 다시 운호에게 향했다.
그의 입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재밌는 녀석이다. 정작 받아먹으라고 꼭꼭씹어 건네준 녀석은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하는 판국에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걸 보고 소득을 얻는 녀석이라니.
운호의 몸이 폭발적인 기세를 내뿜었다.
기연이었다.
운호가 포원공에 입문한 지도 햇수로는 5년을 넘어 6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기공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양’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운호는 보통 사람에 비해 내공이 쌓이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이것은 타고난 신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운호의 사부인 공야찬이 예상하기로 운호가 포원공의 이단공에 오르려면 앞으로 2, 3년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운호의 신체는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의 감각은 지금 저 ‘파검’을 감당할 수 없는 미증유의 위험이라 소리치고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이와 흡사한 위험은 존재했었다. 당장 최근 지(地)급의 마존인 광혈마 이염만 하더라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위험이었다.
단지 그때와 지금이 달랐던 것은 그간 운호의 내공이 조금 더 쌓였다는 것. 그리고 운호가 꾸준히 장복해온 ‘선단’이 그의 몸을 조금 더 ‘순수’하게 만들어줬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질적 변화를 일으키기에 그 절대적인 양은 부족했다. 찻잔이 넘치기 위해서는 찻잔을 가득 채울 찻물이 필요한 법이니까.
외부의 위협에 포원공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순환했다.
본래 그 진기의 순환을 방해하던 노폐물의 상당량은 꾸준히 복용한 ‘선단’의 효과로 녹아 없어진 이후였다.
보통의 상황에서 찻잔의 찻물이 넘치기 위해서는 찻잔이 가득 차야 한다.
하지만 찻잔이 빠르게 회전한다면?
물론 이것은 단지 비유에 불과했다. 사람의 몸은 찻잔이 아니고 진기는 찻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운호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와 흡사했다.
빠르게 순환하던 포원공의 진기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양이 아닌 속도를 통해 그의 혈맥 전체에 포원공의 진기가 충만해진 바로 그 순간.
마침내 운호의 포원공이 임계점을 넘어섰다.
진기의 성질이 한층 더 끈적하게 변했다.
그것은 수증기가 물이 된 것 같은 변화였다. 그를 통하여 더 적은 부피로 더 많은 양의 힘이 실린다.
운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흠칫.
바로 코앞에 파검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그가 가볍게 투덜댔다.
“허, 참나. 나도 소싯적에 이런저런 기연 잔뜩 얻어먹은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세상이라는 게 참 불공평하구나. 그래서 좀 어떠냐? 성취를 얻은 소감은?”
운호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성취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는 무슨. 나는 딱히 해준 것도 없다. 넌 그저 남들이 투닥거리는 것만 보고 혼자 성취를 얻은 거다.”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노사께서 우리 모두에게 일부러 그것을 보여주셨음을 잘 압니다. 그것은 참으로······.”
운호는 깨달았다.
자신은 파검이 자신을 천하제일인이라 선언하던 순간을 절대 필설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단지 표현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세에 존재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당연히 그것을 설명할 단어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파검이 피식 웃었다.
“그저 늙은이의 자랑이었을 뿐이다. 분명 나는 천하제일인이 된 것 같은데 영 그걸 자랑할 자리가 없어 몸이 근질근질했으니 말이다.”
천하제일인.
파검의 그 말이 운호에게 강렬하게 와닿았다.
물론 운호는 파검의 말에 온전하게 동의할 수는 없었다. 파검이 보여준 그것은 불가해의 압도적인 무언가였지만, 운호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권신의 폭력적인 기세도, 태을검선의 이해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운호의 본능은 저것이 다른 천무십칠성보다 ‘반 수’ 정도는 앞서 있다고 속삭였다.
파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의도치는 않았다만 너는 내가 베풀려던 것 이상을 얻었으니 아쉽게도 내가 뭔가를 더 줄 수는 없겠구나. 뭐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저기 저 뺀질이 녀석과 투닥거리는 걸 보고 뭔가를 더 얻어갈 것 같긴 하다만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그리고 거기 뺀질아. 슬슬 준비하거라. 이제 네 차례다. 네게는 여덟동이의 술을 빚졌으니, 여덟 초식을 경험시켜주마. 거기서 뭘 얻을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네게 달렸다.”
이 와중에도 파검의 손녀 곁에 꼭 붙어있던 남궁철이 자신의 코를 긁적이며 답했다.
“하하, 이것 참······. 그런 식으로 계산하실 줄 알았더라면 억지로라도 술을 더 시킬 걸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