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무한(8)
남궁철을 제외한 좌중의 모두가 당황했다.
그리고 파검이 웃었다.
“푸하하하핫. 이 녀석 보게? 감히 노부를 앞에 두고 술을 시킨다고? 남궁가의 녀석이?”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가 있으며, 이렇게 천하의 영웅이 있는데 검보다는 술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파검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천하의 파검이 너같이 어린 녀석을 베어 뭘 하겠느냐. 차라리 오늘 이 황학루의 명주란 명주는 다 들이마셔 남궁세가 재정을 파탄이 나게 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겠지.”
“그건 아마 많이 힘든 일일겁니다. 저희 집이 워낙 대단한 부자라서 말이죠. 아, 소저 혹시 특별히 즐기는 술이라도 있으십니까?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저희 집이 워낙 대단한 부자라서 원하는 건 마음껏 드셔도 괜찮습니다.”
“흥, 남궁벽 그놈이 부자라고 해봤자지. 그놈 그거 30년 전에 가문 재산의 사분지 일을 곡물 투자로 날려 먹은 놈이다.”
“30년 전이면 그 외증조부님께서 할머니께 물려주셨던 유산을 할아버지가 통으로 날려먹었던 건 아니에요?”
파검이 몸을 움찔했다.
“크흠, 그게······, 그거 금액으로 따지면 남궁벽 놈이 날려 먹은 액수가 훨씬 컸다. 게다가 이 할애비는 이후에 장보도를 찾아서 그걸 대부분 다 갚기도 했고······.”
“할머니 말씀이 기껏해야 육 할쯤 될 거라고 하시던데요.”
“크흠, 이 녀석이? 손님을 앞에 두고 아주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남궁철이 손을 내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본래 한 분야에 뛰어난 고수가 다른 분야까지 통달하기란 쉽지 않죠. 무공으로 이미 인간의 기준을 넘어섰는데 그깟 금붙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 바로 그 걸세.”
“사실 저희 집도 할아버지가 자금 운용에서 손을 뗀 지는 한참 됐습니다. 지금은 전적으로 아버지가 담당하고 계시죠. 그러니 저희 집안 재산은 걱정말고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아버지가 재산관리를 좀 잘 하는가?”
“이 황학루. 저희 겁니다.”
-쨍그랑
파검이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트렸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황학루를 소유한 건 한상이긴 합니다만, 그 한상의 최대 출자자가 저희 남궁세가니 황학루가 남궁세가의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남궁철의 이야기에 놀란 것은 파검만이 아니었다.
이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있는 사 층짜리 거대한 전각이 남궁세가의 것이라고? 종화와 운호의 시선에 남궁혜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투자에 재능이 좀 있으세요.”
“실로 놀랍군요.”
“흐······,흥. 뭐 좀 대단하네. 하지만 무인에게 돈이 뭐 중요하다고. 무인에게 중요한 건 무공이지.”
종화가 입을 비쭉거렸다. 그 말에 파검이 또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무력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무릎 꿇릴 수 있는 힘이지만, 금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조차 제발 무릎 꿇게 해달라고 매달리게 만드는 힘이다. 구파가, 칠가가 어찌하여 중원의 지배자이며, 주가 도적놈이 어떻게 천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가.”
“하,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돈 이야기만 나오면 조금 흥분을 하셔서. 호호호. 그보다 이쪽 공자님과 일행이신 듯한데, 함께 하시죠.”
천무십칠성.
삼억을 넘는 중원의 인물들 가운데 오직 열일곱.
그들은 그야말로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절대자들이다. 헌데 운호는 벌써 세 번째다. 천무십칠성과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는 경험 말이다.
권신과 검선.
그들은 각자 그 위명에 어울리는 품격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권신에게는 만인을 압도하는 기세가 있었고 검선에게는 만물과 동화되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파검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젠장, 이 황학주가 한 동이에 넉 냥이나 하니까 내가 이걸 여기서 십만 동이쯤 마시면 남궁세가를 파산시킬 수 있는 건가?”
“글쎄요······. 이 속도라면 그거 드시는 동안 저희 집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지 않을까요? 게다가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해룡방주 파검을 죽을 때까지 술만 마시게 할 수 있다면 왠지 그거 싸게 먹히는 장사일 것 같기도 하고······.”
“크하하, 이 몸의 몸값이 은자 사십만 냥이나 된단 말이로구나. 들었느냐 혜아야. 이 할애비가 그 정도다.”
남궁철과 죽이 맞아 떠드는 꼴을 보고 있자면 너무나도 한없이 가볍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천박하거나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남궁철.
운호는 어쩐지 파검이 남궁철을 닮았다고 느꼈다.
“허어, 그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려. 확실히 여인이 묶기에 객잔은 너무 시끄럽고 지저분하지. 하지만 확실히 좌노사님이 한구로 가시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이것 참 참으로 곤란한 일이구려.”
짐짓 생각하는 척하던 남궁철이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아!! 이건 어떻소? 한구에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좌노사님 아니요. 그렇다면 좌노사님은 계속 여기 무창에 계시고, 조소저는 한구에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의 장원에 잠시 머무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소만.”
-따악
파검의 오른손이 남궁철의 뒷통수를 두들겼다.
물론 남궁철 역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천하의 파검이다. 가볍게 휘두른 손바닥에도 현묘한 무리가 담겨 있었다.
“참으로 얄팍한 놈이로구나. 속이 빤히 보인다.”
“당연히 속이 빤히 보여야지요. 사내가 여인에게 구애하는 데 속을 보이지 않고 어찌 구애한단 말입니까.”
“거, 녀석 참.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구애는 무슨. 헌화야 속지 말아라. 그저 파검의 손녀를 인질로 삼으려는 비겁하고 시커먼 속내일 뿐이다.”
남궁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좌 노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고작 좌 노사와 저희 할아버지. 남궁 세가와 해룡방의 케케묵은 원한이 뭐라고 미인과의 소중한 인연을 그리 낭비한단 말입니까. 이 남궁철은 그렇게 멍청하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고작 케케묵은 원한?”
만담과도 같은 그 대화 속에서 운호는 저 남궁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남궁혜와 종화 사이에서 끙끙 앓고 있는 자신에 비하자면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담대한가.
심지어 그 상대가 파검의 손녀라니.
파검이 파안대소했다.
“크크크크크, 참으로 재밌구나. 재밌어. 네 할애비가 지금 네 말을 들었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구나.”
파검의 손녀 조헌화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해룡방에서 그녀에게 구애하는 사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해룡방만이 아니다. 절강성의 유력한 집안 사내 가운데 조헌화에게 구애했던 사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에게 구애했던 사내들과 남궁철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했다.
그녀는 해룡방의 거친 사내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거칠고 직설적이다. 그 거친 사내들은 도통 달콤한 말이라고는 할 줄 모른다. 그와 비교하자면 절강성의 다른 유력한 가문의 사내들은 흡사 계집애 같았다. 모든 말을 애둘러 표현할 뿐, 사내다움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남궁철은 그 두 부류의 모두의 장점만을 가진 사내였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만 그 누구보다 사내답다. 그 어떤 대단한 사내도 감히 자신의 할아버지인 파검 앞에서는 저렇게 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이가 없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오직 남궁철과 파검 뿐이었음에도 빈 술독은 빠르게 늘어갔다.
“그나저나 참으로 재밌는 조합이로구나. 화산에 종남에 남궁이라. 이 아이는 태을검선님의 제자인 듯하고. 너는 화산의 제자가 검이라니. 참으로 재밌구나. 게다가 화산의 검술은 이미 그 맥이 끊긴지 오래라고 알고있었거늘 지금 보니 그 수준도 상당하고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지금 실력이야 여기 이 남궁가의 떠버리가 미세하게 나아 보인다만 가능성은 네 쪽이 훨씬 커 보이는구나.”
조헌화에게 한참 한구부의 명소를 이야기하던 남궁철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니까요.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참으로 대단한 녀석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그 녀석 무공에 입문한지 고작 칠 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칠 년?”
“네, 열 살에 입문하여 이제 열여섯이니. 햇수로 칠 년. 만으로는 육 년이 조금 넘은 셈이죠. 안 그러냐 동생아.”
운호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검이 상당히 크게 놀랐다.
“대단하구나. 아무리 명문의 무공을 기반으로 했다고 해도 고작 칠 년 만에 그런 경지라니······. 석년의 나에 못지않은 재능이로구나.”
과거의 자신에 비견할만한 재능.
그것은 파검이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였다.
천무십칠성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는 누군가?
사실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이의 재능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강호 사람 대부분은 파검을 꼽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무십칠성 가운데 구파와 칠대세가에 소속되지 않은, 심지어 명문이라고 불릴만한 문파의 무공을 잇지도 않은 유일한 사내가 바로 파검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절강의 낭인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사내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연이라고 할만한 수많은 인연들이 있긴 했지만, 어찌됐건 초절정이란 대문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서도 오르기 힘든 경지임을 고려할 때, 낭인 출신으로 초절정에 오른 그의 재능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칭할 만했다.
“좋다. 오늘 이렇게 젊은 아이들을 만나 술을 얻어 마신 것도 큰 인연이니 내 특별히 너희들에게 한 수씩 전수해 주마.”
술이 얼큰하게 오른 파검이 기분 좋게 소리쳤다.
“자자, 여긴 빌어먹을 주가 놈의 개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도록 하자.”
“아, 그거라면 저희가 타고온 마차가 있으니······.”
남궁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
파검의 의지가 그들을 감쌌다.
진기? 내공?
아니다. 조금 달랐다.
운호와 종화 남궁철은 절정을 눈앞에 둔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 기운에 저항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저항하지 말고 몸을 맡기거라. 해치고자 했다면 진즉에 해쳤을 테니.”
파검 본인을 포함하여 무려 여섯.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한 황학루 4층 난간으로 여섯의 몸이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날아올랐다.
무창은 동창의 창위들로 득실거리는 곳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움직임을 감지한 이는 없었다.
어느새 무창부성의 성벽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반각도 채 되지 않았다.
이것이 천무십칠성이로구나.
운호가 새삼 감탄했다.
“자, 그러면 누구부터 시작할까? 그래, 거기 종화라고 했던가? 네가 좋겠구나. 안그래도 태을검선님의 후예에게는 전해줄 것이 있었거든.”
“전해줄 것이요?”
“그래, 그 양반이랑 주고 받은 것들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좀 더받았던 것 같단 말이지.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 어쩔 수 없긴 했다만. 어쨌거나 그 양반은 그렇게 갔으니 그 후예인 너에게라도 나머지 값을 치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