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무한(7)
황하를 중심으로 한 화북지방의 생산력은 이미 장강에게 뒤처진 지 오래다. 현재 중원 식량의 칠 할은 강남에서 생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잉여한 생산물의 증가는 곧 교환관계의 발전을 촉진 시킨다. 그리고 그 교환관계가 더욱 발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발달한 교통망이다.
무한은 그 장강 경제권의 중심에 있는 매우 발달한 상업 도시지역이었다. 따라서 무한의 교통망이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 수순이었다.
사통팔달로 뚫려있는 수로와 관도들. 그리하여 본래 무창과 한양은 서로 다른 권역이었지만 그렇게 발달한 교통이 다른 권역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일종의 위성도시인 한구를 탄생시키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더 확장할 도시 구역이 없다는 명목이었다. 게다가 잘 닦인 관도로 이각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물 좋고, 풍광 좋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으니 도시 권역을 확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계획적으로 도시를 구획하고 기와를 얹은 좋은 집들만 채워넣기 시작했더니 돈을 가진 자들이 앞다투어 이곳에 집을 샀다. 무창부와 한양부는 교역의 중심지였지만 그만큼 번잡스러웠으며 넘쳐나는 날품팔이들로 치안 역시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모여드는 만큼 한구부의 땅값이며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더 돈 많은 이들을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도시라는 것은 본래 그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구획을 정리하고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작업은 필수다. 하지만 부자들은 죄다 저 한구부에 집을 지었다.
물론 무창부와 한양부는 여전히 교역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상단의 중하급 관리인들.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들이 대부분이 돼버렸다.
더럽지만 수많은 인간들로 활력 넘치는 그 거리.
남궁혜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강을 하나 건너왔을 뿐인데 참으로······.”
무한 지역의 총인구수는 근 사백만에 달한다.
그 가운데 무창부성 성내와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는 무려 칠십만. 이 시대 가장 발전된 형태의 하수 시설을 갖췄음에도 칠십만이라는 숫자는 하나의 도시로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다.
사람이 만들어낸 각종 오폐수들. 그리고 사람 그 자체가 내뿜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함께 배를 타고 온 종화가 입을 삐죽거렸다.
“역시, 곱게 자란 아가씨답게 이런 것엔 좀 약하시네요.”
물론 그녀의 표정 역시 그리 좋진 못했다. 중원 각지를 떠돌며 이런저런 경험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떠돌았던 지역은 주로 섬서, 감숙, 청해와 같은 북쪽 지방이다. 그녀가 경험했던 최대 도시인 사천의 성도조차도 이곳에 비하면 한적한 수준이다.
‘확실히······.’
하지만 운호나 종화에게 더 크게 와닿은 것은 이 지독한 악취가 아니었다.
화산과 종남. 도가의 성지라고 할만한 청정도량에서 오랜 시간 수련을 쌓은 그들이기에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팔십만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지독한 탁기의 소용돌이를. 본능적인 거부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운호는 알 수 없는 향수를 느꼈다.
물론 규모는 달랐다.
하지만 저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과 아직 어린 거지들. 잔뜩 쌓인 짐을 나르는 중년의 사내들과 얼굴에 허연 분칠을 한 여인들까지.
조가촌 시절.
당시 운호는 저기서 손을 내미는 저 어린 거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궁철이 그들을 다독였다.
“자자,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무창을 한 번 구경도 해보지 않는 건 안될 일 아닌가. 그 시선 이백이 질투를 했다는 최호의 시도 봐야지. 게다가 그 뭐냐 황학루 하면 도가의 전설과도 인연이 깊은 곳 아니던가. 그 무슨 도사가 황학을 타고 등선을 했다고 말이야.”
“뭐, 자안 선인이 황학을 타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긴 하지요.”
“하하, 거 보게. 역시 동생도 내심 황학루를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게 분명하구만.”
“하지만 그런 전설이라면 화산의 모든 봉우리, 모든 전각들마다 하나씩은 다 있는 전설입니다. 굳이 특별한 뭔가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으하하하하,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게다가 본래 무공이라는 것도 그렇게 죽어라 반복만 한다고 느는 것이 아닐세. 무려 시선. 그러니까 시의 신선이라는 양반이 감탄하고 갔다는 장소 아니던가. 자네도 가서 어? 그 황학도 한 번 보고, 최호가 남긴 시구도 좀 보고 하면. 혹시 아나? 깨달음이라도 탁!! 하고 얻어서 절정지경에 오를지?”
남궁철의 터무니 없는 이야기에 운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참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도 한다.
“게다가 황학루 정상에서 보는 풍광이 또 그리 좋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 뭐라더라? 없던 연정도 생긴다던가?”
“어머, 오라버니. 이제 드디어 설 누이를 잊을 준비가 되신 건가요? 좋은 자세네요. 이 동생도 오라버니가 황학루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해드리죠.”
“아니, 여기서 또 왜 설 소저 이야기를······.”
남궁철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미리 준비해둔 마차를 타고 황학루를 향해 이동했다. 잘 닦인 관도임에도 불구하고 오가는 인파가 워낙에 많아 황학루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거 좀 답답하네요. 차라리 내려서 경공으로 뛰어가는 게 더 빠르겠어요.”
“종소저, 아쉽지만 이곳은 국법으로 무공의 사용이 금지된 도시랍니다. 동창의 창위들이 곳곳에 있을뿐더러 혹여 잘 빠져나가더라도 추후 가문이나 문파에 정말 큰 제제가 들어올 거에요.”
“흥, 저도 잘 알고 있거든요. 워낙에 답답해서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남궁철이 팔꿈치로 운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자기가 조언을 해줬는데 아직도 해결하지 않았냐는 의미다.
물론 운호 입장에서는 그 조언 자체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아니, 중혼을 하라니. 물론 처첩을 여럿 두는 것이 흠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는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이고 또 하나는 종남파 태을 검선의 적통을 이은 제자다.
운호가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크, 좋구나. 과연 강 건너 한양나무들이 또렷하다더니 참으로 장관이다.”
“흥, 이 흐린 날씨에 여기서 그게 보이는 사람은 할아버지 정도밖에 없을걸요?”
“크흠, 뭐 나무가 좀 안 보이면 또 어떠냐. 오황제가 세운 이 웅장한 황학루를 보고 있자면 절로 시흥이 샘솟지 않더냐.”
“남창후가 세운 황학루는 이미 애저녁에 불에 타 사라졌고, 이건 전대 황조 시절에 새로 세운 황학루랍니다.”
파검이 웃었다.
삐죽거리며 툴툴대는 손녀였지만 참으로 귀엽다. 사실 어지간하면 하고 싶다는 대로 다 해주고 싶지만 저기 한구부는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
물론 구대문파와 칠대세가가 국법을 어길만한 담량이 있다고 믿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지 말고, 이 할애비가 나중에 더 좋은 곳에 데려가 줄 테니 오늘은 이 황학루로 만족하자꾸나. 한구부는 지금 정말로 위험하단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천하무적이시잖아요.”
“그래, 물론 나야 천하제일인이지. 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더냐. 자, 여기 이 홍소육이 참으로 맛이 좋구나. 어제 먹었던 그 비린내 나는 민물고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맛이다. 어서 한 번 먹어 보거라.”
파검이 홍소육을 한점 크게 짚어 손녀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응?’
몹시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특히 더 불쾌한 것은 그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만방자하며 가진 것 이상으로 자신을 부풀리는 허풍선이들.
파검이 인상을 찌푸렸다.
“크, 바로 여기라네. 저기 그려진 저 황학이 바로 신선이 타고 하늘을 날아갔다는 그 황학 아니던가.”
뺀질뺀질 잘생긴 얼굴. 큼지막한 주먹코. 금실로 장식된 화려한 푸른 비단옷.
그리고 무엇보다 저 기도.
남궁 세가였다.
대충 손녀 또래 정도로 보이는 이남이녀가 황학루 사층으로 올라왔다.
손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기 또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네요.”
“뭐?”
“아니, 이 황학루는 전대황조 시절에 새로 세워진 황학루잖아요. 그러니 저 그림도 당나라 시절 신선이 타고 날아갔다는 그 황학이 아니라 전대 황조 시절에 새롭게 그려진 황학이고요.”
손녀의 이야기에 파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기운이 남궁세가의 얼간이가 포함된 이남이녀를 훑고 지나갔다.
‘호오,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여아는 잘 쳐줘야 이류 수준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세 아이의 성취가 심상치 않았다. 하나 같이 일류의 끄트머리. 언제 절정으로 나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하지만 놀랄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네 아이 가운데 하나.
키는 제법 크지만, 몸이 너무 호리호리하여 고기 좀 잘 먹어야할 것 같은 아이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 것이다.
우연일까?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당연히 우연이어야 했다. 하지만 인간을 넘어선 파검의 직감이 지금 저 시선은 우연이 아니라 소리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 파검을 바라봤지만 특별한 것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노인이 참으로 멋들어지게 나이를 먹었구나. 젊었을 적에 여자 꽤나 울렸을 것같은 외모로구나. 정도의 감상이 들 뿐이다.
“응? 동생, 뭘 보는 건가?”
그러나 남궁철은 조금 달랐다.
딱히 먼지 하나 뭍어있지 않던 옷을 가볍게 툭툭 털었다.
“형님?”
“동생,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구만. 그러면 지금부터 동생은 동생의 길을 걷도록 하게나. 나는 나의 길을 걷도록 할테니 말이야.”
“형님? 갑자기 그게 무슨?”
멋지다.
연습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 대체 어떻게 걸음걸이가 멋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안녕하십니까.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의도치않게 듣게 됐군요.”
“무슨 말인가.”
“하하하, 어르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분 소저께서 제가 잘못알고 있던 사실을 짚어주셨기에 고마워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고맙다고?”
“당연하지요. 잘못된 지식을 계속 갖고 있었더라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혹시라도 어딘가 중요한 자리에서 그 사실을 떠들었다면 또 얼마나 큰일이고요.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게 해주었으니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소소하게나마 무언가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파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뺀질이는 대체 뭐지? 갑자기 다짜고짜 합석을 요청한다고?
“저기 함께 온 일행도 있으신 분이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닌가요?”
“하하, 그저 친한 동생과 친동생. 그리고 그 친우일 뿐입니다. 사실 청춘남녀들의 청춘사업에 홀로 끼어들어 참으로 곤란하던 찰나였습니다. 그나저나 자기 소개도 아직 안 했군요. 남궁철이라고 합니다.”
“남궁······이요? 설마?”
그녀의 반응에 남궁철이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네, 바로 그 설마가 맞습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 옥면검룡. 사시장원. 안수해원검. 모두 저를 일컫는 말입니다.”
파검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머저리.
지금 내 손녀를 꼬시려는 거구나.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허허, 허허허허허.”
“아니, 어르신. 갑자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참으로 재밌구나. 참으로 재밌어.”
“뭐가 그리 재밌으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쎄, 네가 나의 정체를 알아도 계속 그럴 수 있는지가 참으로 궁금하구나.”
“어르신의 정체요?”
기대됐다.
지금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이 남궁의 아이가 보일 반응이. 사색하고 벌벌 떨며 물러날 그 꼴이.
그래, 검왕의 손자가 그런 꼴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여기서 정체를 밝히는 것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
파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숨기고 있던 자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노부의 이름은 좌부원. 절강 해룡방의 방주로 강호의 동도들은 노부를 파검이라 부른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천하제일을 논하는 기도.
일 초? 아니, 어쩌면 반 초. 지금 저 노인은 천하를 논하는 고수다. 그들이 힘을 합쳐 상대했던 마인조차 저 노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운호와 종화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아무리 어려운 상대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타오르는 무혼이었다.
그리고 파검 앞에 선 남궁철이 입을 열었다.
“아, 파검 어르신이셨군요. 할아버지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거 알고 보니 저희 인연이 보통이 아니었군요. 어쩐지 뭔가 파바밧 하는 것이 느껴지긴 했습니다. 점소이? 여기 음식 좀 새로 내오고 술은 그래, 알아서 제일 좋은 놈으로 내오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