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무한(6)
“클클클 이거 아주 찝찝한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그것은 잘생겼다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어찌나 잘생겼는지 그 왼쪽 눈썹 위에서 볼까지 가로지르는 흉터조차도 흠이라기보다는 야성미를 더해주는 장식처럼 느껴졌다.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파검.
천무십칠성의 일좌이자 남해의 해적왕으로 불리는 사내였다.
사뭇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파검 옆에,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 하나가 쫑알거렸다.
“당연하죠. 저기 저 사람들 좀 보세요. 적어도 일주일은 안 씻은 게 분명하잖아요. 할아버지. 저희도 이왕 멀리 나온 거, 여기 말고 저쪽 한구부성 쪽에 좀 좋은 곳으로 가면 안 돼요? 지금 숙소는 탁자도 너무 끈적거리고, 냄새도 별로고. 게다가 밤에도 너무 시끄럽잖아요. 돈 때문이면은 제가 모아둔 돈이 조금 있으니까······.”
“어허, 어디 누가 돈 때문에 그런다더냐. 말하지 않았더냐. 이 할애비가 뭍에서도 제법 유명인사라고. 괜히 그쪽으로 가면 아주 골이 아파져요. 그보다 모아둔 돈이라니. 설마 네 할미가 준 돈이더냐? 그게 얼마나 되는 게냐? 사실 내가 아주 좋은 투자처를 하나 아는데 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이미 투자하다 지금까지 말아먹은 돈만 하더라도 한 개 성을 살만하다고 들었거든요. 설마 또 어디 투자하신 건 아니죠?”
파검이 손녀의 시선을 피했다.
“할아버지?”
“아니, 그게 그러니까 너도 그 조가네 상단 잘 알지 않느냐. 그 있지 않더냐. 여송을 오가는.”
“그런데요?”
“글쎄, 그네들이 이야기하기를 지난번에 여송 쪽으로 파사국 상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잘 생각해보아라. 이전 제국이 멸망하고 파사쪽과 교역을 끊은 게 벌써 몇 년이냐. 거의 오십 년이 다 돼간다. 이건 돈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업이야.”
“할.아.버.지. 그래서 대체 얼마를 쓰신 거예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많은 건 아니고······. 천냥?”
“은자?”
“······.”
“설마 금자 천 냥?”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쉿!!
한순간, 파검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할아버지, 저도 이제 내년이면 스무 살이에요. 이제 그런 거에 안 속거든요.”
파검이 자신의 등 뒤로 손녀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동시에 저 멀리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하하, 거 대체 평소에 손녀를 얼마나 속여먹었으면 그런 소리를 듣는 건가.”
“그만!! 더 다가오지 말아라.”
파검이 허리에 걸린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장대한 체구.
봉두난발이 된 머리와 시커먼 얼굴. 여기저기 구멍투성이의 의복까지.
걸왕 소진평이었다.
“아니, 거 하나밖에 없는 동맹한테 대접이 너무 박한 거 아닌가?”
“동맹은 무슨. 일없다. 냄새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저리 꺼져라.”
-킁킁
세상에 이보다 더 더러울 수 없어 보이는 거지 왕초가 킁킁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후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일까?
“냄새는 무슨. 아무 냄새도 안 나는구만. 게다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소나기 퍼붓던 날에 목욕했다.”
“더러운 거지 왕초 같으니라고. 마지막으로 비가 왔던 날이 벌써 한 달 전이다. 게다가 네 녀석 호신강기 익힌 게 빗물에 몸 안 젖으려고 익혔다는 소문이 강호에 파다한데 목욕은 무슨 목욕이냐.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얼른 꺼져라.”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스물세 걸음.
파검이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것만으로도 단박에 검을 휘두를 준비가 끝났다.-
그 모습에 걸왕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해적, 너 약해졌구나?”
“약해지기는 개뿔. 거지 네 놈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그만큼 더 심각해져서 그런 거겠지.”
한 걸음.
그 순간, 파검이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찌르는 듯한 예기가 걸왕에게 집중됐다. 여기까지다. 걸왕이 크게 웃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 장난이네, 장난이야. 우리가 싸워 뭘 하겠나. 그거야말로 다른 놈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 아니겠나. 그보다 용케 몰래 들어왔군.”
“그러는 네 녀석이야말로 용케도 나를 찾아왔구나.”
“전국에 깔린 것이 거지인데 그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흥, 남들이 걸왕이라 불러준다고 정말 전국 거지들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중원 거지 가운데 개방에 소속된 놈들이 몇이나 된다고.”
“안 세어 봐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만은 되겠지. 그러는 해적 네 놈는 남해의 해적 놈들은 죄다 네 똘마니를 자처하니 참으로 좋겠구나. 일 년에 잡혀 죽는 네 놈 똘마니만 수백은 되니 말이다.”
두 노인이 서로를 마주 보며 사납게 웃었다.
“지금 보니 늙은 거지가 묫자리를 찾아왔구나.”
“글쎄다. 지금 네 뒤에 누가 있는지나 보고 이야기하는 게 어떠하냐.”
“다 늙은 거지 멱 하나 따는데 내 뒤에 누가 있는지 그게 무에 중요할까. 어디 한 번 확인해볼 테냐?”
“해적 네 놈이 잠깐 잊었나 본데 여긴 남해가 아닌 중원이다. 그것도 무한. 중원에 거지가 가장 많이 들끓는 곳 중 하나지. 너는 그 거지들 사이에 개방의 육결제자가 몇이나 섞여 있을꺼라고 생각하느냐?”
“그깟 거지 놈들 그저 다 쳐 죽이면 그만이다.”
보통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허세다.
하지만 말을 내뱉은 이가 천하의 파검이기에 그 말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이 존재했다.
파검과 걸왕.
결국 강호무림의 최정상을 다투는 두 노인의 싸움에서 먼저 손을 든 것은 걸왕 쪽이었다.
“하여간에 나이를 먹어도 더러운 성격은 변함이 없군. 좋다. 좋아. 내 물러나 주지.”
걸왕이 다가오던 것보다 빠르게 물러났다. 눈 깜빡 할 사이. 이미 걸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파검이 자신의 검에서 손을 뗐다.
“할아버지······.”
“괜찮다.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영악한 놈이다. 지금 우리를 건드릴 리 만무하다. 그보다는 지금 왜 나타났는지가 의문이구나. 아무 이유 없이 저렇게 모습을 드러낼 녀석이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 치고 너무 싱겁게 물러나는 것도 이상하구나.”
“글쎄요. 지금 무한에 모인 이목이 많으니 그런 거 아닐까요? 구대문파에 칠대세가까지 죄다 모여들었잖아요. 괜히 시끄럽게 굴어서 좋을 게 없겠죠. 물론 그들이 있는 한구부성과 여기는 꽤 거리가 있지만요.”
“그럴까?”
“그래서 말인데 저희도 더 안전하게 한구부성으로 숙소를 옮기는 건 어떨까요?”
“크흠, 오늘 저녁은 역시 삶은 돼지고기가 좋겠다. 어제 먹어보니 맛이 참으로 좋더구나.”
파검이 여전히 한구부로 가고 싶음을 온몸으로 피력하는 손녀의 시선을 억지로 피해 가며 목적한 오래된 객잔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약속된 날짜까지 이제 닷새.
무신이 물었다.
“곤륜은?”
“이제 나흘이면 도착할 것 같다고 합니다.”
“하여간 그 놈들은 아무리 먼 곳이라고는 하지만 어째 한 번 일찍 오는 경우가 없구나. 쯧쯧쯧. 그래, 네 장조부는?”
“사흘쯤 남았습니다.”
“하여간 화산 놈들은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구나. 내가 어떻게 구슬려 주저앉혔는데 결국 나오게 만드는군. 그건 그렇고 주변은 좀 어떠냐.”“거지가 육백 정도. 그리고 해적들도 삼십 정도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정체불명의 고수도 여덟이 있는데 어쩌면 정체를 숨긴 마교도일수도 있습니다.”
제갈첨의 대답에 무신 모용경이 혀를 찼다.
“쯧쯧. 하여간 걸왕 그 친구 무식하게 머릿수 끌고 다니는 건 여전하구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거지들 사이에서야 정예라고 하지만 스물 남짓을 제외하면 모두 이류와 삼류에 걸치는 수준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계는 늦추지 말도록 해라.”
“네, 안 그래도 각 가문에서 정예한 무사들을 뽑아 순번을 정해 무창부성과 한양부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걸왕 어르신과 파검의 이목을 피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자세한 정찰은 조금 어렵습니다.”
“괜찮다. 그놈들이 아무리 말종들이라고 해도 마교와 손잡을 만큼 무도한 놈들은 아니니까. 그보다 남궁벽, 네 장조부에게는 해적 놈이 왔다는 사실을 절대 알리면 안 된다. 큰일을 앞두고 괜한 소란이 벌어질 뿐이야.”
파검과 검왕의 악연은 무림에 적을 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했다.
제갈첨은 평소 이성적인 자신의 장조부가 파검 이야기만 나오면 얼마나 흥분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한에서의 행사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아마 두 팔을 걷고 파검과 싸우려 들 것이 뻔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갈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 * *
운호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건만 대체 어째서 이토록 불편한 것일까?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토록 좋던 시간이 이제는 가시방석과 같이 느껴진다.
이래서야 차라리 검을 나누는 시간이 더 편안할 지경이다.
“쯧쯧, 멍청한 녀석 같으니. 어쩌다 내가 이런 모지리를 만나서. 잘 듣거라 내가 너만 할 때는 말이다. 뭐야? 지금 이딴 거 이야기하는데도 공과격이 필요하다고? 이런 미친!!”
몽원경의 증무진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혼자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운호는 ‘너 같은 놈이 제일 나쁘다!!’ 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증무 진인의 검에 특별히 더 아프게 사망했다.
남궁철은 사흘 정도 그 꼴을 참으로 재밌게 지켜봤다.
그가 특히 재밌게 지켜본 부분은 설 누이의 일로 자신을 주야장천 놀리던 동생의 고군분투였다.
“그거 봐라, 너도 제 머리 깎으려니 힘들지?”
“그걸 잘 알면 도와주시든지요. 오라비가 돼서 동생 그것도 한 번 못 도와주십니까?”
“아니, 잠깐만. 이 대화가 왜 그렇게 이어지지? 그러는 너는 내가 설소저와······.”
“항상 사내대장부는 무릇 어쩌고 하시던 분은 어디로 가고 참으로 쪼잔하십니다. 지금 저같이 속 좁은 아녀자와 같은 사람이 되려 하시는 겁니까?”
물론 되레 뻔뻔하게 나오는 동생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지 간에 어쨌거나 참으로 재밌는 사흘이었다. 하지만 남궁철은 본래 저자를 떠도는 기담을 들을 때도 서두가 긴 것을 싫어하고, 연애소설을 읽을 때도 질질 끌어가며 전 중원을 떠도는 것에 진절머리를 내는 성격이다.
“저는 도대체 곡절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운호를 그냥 지켜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동생, 참으로 그 이유를 모르겠는가.”
“남궁 형님은 혹시 그 이유를 아시는 겁니까? 알고 계신다면 좀 알려주십쇼.”
“참으로 답답하구만. 뻔하지 않나. 사내는 하나고 그 사내를 연모하는 여인네는 둘이니 그런 것이지.”
“네? 여, 연모라니요. 어찌 남궁 소저와 같은 분이 저를. 게다가 종화는 그저 함께 무공을 나누는 친우일 뿐입니다.”
“거, 멍청하기는. 동생이 뭐가 어때서. 소신검 하면 강호의 소문난 일등신랑감 아닌가. 초절정을 넘볼지도 모르는 인재가 어디 흔하다던가? 게다가 남녀 사이에 그저 함께 무공만 나누는 친우가 어딨나.”
운호는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단지 경험이 없었을 뿐이다. 남궁철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모든 불편했던 순간들이 한순간에 이해됐다.
하지만 그 순간 운호는 자신이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무공은 쉬웠다. 그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그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달랐다.
상황을 이해했지만,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분명 남궁혜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종화와의 관계가 일그러지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강아현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은 소중한 친구였다.
“아니, 거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뭘 그리 고민을 하는건가.”
“간단하다고요?”
“당연하지.”
하지만 남궁철은 달랐다.
그가 운호는 상상도 못 했던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순서만 정하게. 누가 첫 번째 부인이고, 누가 두 번째 부인인지. 참고로 말해주자면 만약 혜아를 두 번째로 맞이하려고 했다가는 우리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할아버지와도 검을 겨뤄야 할 거야. 뭐 동생의 성취라면 한 20년쯤 정진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 시간이면 우리 할아버지도 많이 늙으실 테니 말이지.”
“형님?”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건 당연히 우리 혜아가 첫째라는 말을 돌려서 해주는 거라네. 내 동생의 이해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네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 말이야. 덤으로 혜아에게는 내가 이런 이야기 했다는 거 꼭 비밀로 해줘야 하네. 나도 고 계집애가 아버지한테 쪼르륵 달려가서 다 이르는 건 좀 무섭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