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무한(5)
며칠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무한에 도착했다.
종남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한에 모인 모든 무인 가운데 단연 눈에 띄었다. 거친 삼베옷을 걸친 무인의 숫자가 물경 육십이다.
다른 대문파에서 파견된 무인의 숫자가 보통 스물 내외인 점을 고려한다면, 심지어 화산이나 소림, 무당의 규모가 종남의 두 배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이 내보낸 이 육십명의 무인이 얼마나 대단한 각오인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다수의 일대 제자와 이대 제자. 그 사이에 몇 안 되는 삼대 제자들.
하지만 진짜 놀랄만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자첨진인과 자경진인.
태을검선과 같은 배분의 전대 고수들 가운데 무려 둘이 그들 사이에 동행을 했다.
“당장 마교로 쳐들어가기라도 할 기세군요.”
“그럴 리가······. 그냥 압박을 하는 거다. 우리 종남은 지금 이 정도로 화가 났다. 그러니 너희도 우물쭈물할 생각 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라. 뭐 그런 거지.”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써먹기에 전대의 고수를 동원한다는 건······.”
제갈첨이 고개를 저었다.
“전대의 고수라고 다 화산의 청자배 노괴들처럼 괴물이 아니다. 아무리 진기가 사람을 초인으로 만들어준다고 해도 사람의 육체는 늙기 마련이고 진기를 활용해서 그것을 억제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육체의 노화와 기술의 상승이 교차하는 시점을 따졌을 때, 보통 절정고수의 경우는 50대 초반?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80대 초반까지다. 그 이후로는 얼마나 그 기량을 잘 유지하느냐의 문제일 뿐 더 이상 상승을 개척하는 것은 어렵다고 봐야지.”
“하지만 화산은······.”
“다르지. 그래서 거기 자하 기공이 사기적이라는 거다. 거긴 최소한 10년씩은 그 기한이 뒤로 미뤄지거든. 그리고 그 늘어난 기간만큼 더 성장의 여지가 생기는 거고. 게다가 그 청자배 괴물들은 초절정에 오른 것이 거의 확실한 괴물들이다.”
물론 자하기공 역시 단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노화의 억제라는 절대적인 공능에 비하자면 그 단점은 너무 하찮다.
“그렇다면 자첨진인이나 자경진인은······.”
“그래, 아무리 잘 쳐줘도 일대 제자 수준? 실질적인 실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그 이하일 수도 있다. 그러니 결국 이건 저런 노인들까지 동원할 만큼 우리는 화가 났다는 의사 표현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작 의사 표현이라고 해도 다른 구파들로서는 종남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테고······. 이건 우리 입장에서는 호재라고 봐야지.”
“호재라고요?”
제갈평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형 제갈첨을 바라봤다.
제갈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종남이 아무리 태을 검선의 사망으로 약해졌다고 해도 우리 제갈보다는 강력하다. 잊진 않았겠지? 우리 가문에 초절정이 안 나온 게 벌써 80년 전이다. 게다가 우리의 진짜 목표는 마교의 척결 같은 게 아니다. 마교가 사라진 이후의 세상에서 칠대세가, 특히 우리 제갈세가의 부흥이지. 알겠느냐?”
“하지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문파들 모두 비슷한 생각이다. 마교가 진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개방이나 해룡방을 지금처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데리고 갔어야지. 명색의 천무십칠성이 수장으로 있는 문파들인데.”
“하긴······. 근데 개방과 해룡방은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일까요?”
“무슨 생각이기는. 마교가 분전해주기를 응원하고 있겠지. 평아, 잘 감시해야한다. 그 거지랑 해적 놈들은 언제 마교 편을 들어 우리 뒤통수를 쳐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지금까지 운호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자면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도 ‘투쟁’일 것이다.
부모님을 여의고 떠돌았던 거리 생활.
조가촌에서의 그 참사.
화산의 본산에 남기 위한 노력들.
그리고 증무진인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지독한 수련까지.
그렇기에 무한에서의 이 경험은 운호에게는 너무나도 생경한 경험들이었다.
“어머, 정말로 음식을 아예 못 드신다고요?”
“그게 못 먹는 건 아니고 정확히는 정해진 음식만 먹어야 하는 겁니다.”
“정해진 음식이라는 게 설마 요 며칠 계속 드시던 그 맛없어 보이는 단환인가요?”
“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궁혜가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백공자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어요.”
“아뇨. 남궁 소저께서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먹는 걸 보면 백공자님도 먹고 싶어질 게 뻔하잖아요.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질 게 뻔하고요. 전 그런 건 싫은걸요.”
이상하게 간질간질한 느낌.
딱히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것도 없이 함께 길을 걷고,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뻔한 잡담을 나누는 그것이 운호는 너무나도 즐거웠다.
“저기 저쪽이 유독 소란스럽네요? 무슨 일일까요.”
“어느 문파에서 새롭게 도착한 것 같습니다.”
“저희 한 번 가볼까요?”
남궁혜의 제안에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어디를 가자고 해도 아무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란히 함께 걸었다. 운호의 신경이 온통 옆에서 나란히 걷는 남궁혜에게 집중됐다. 남궁혜 역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 멀리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로 아주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그들의 귀를 때렸다.
“백운호!?”
운호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대체 왜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주변을 둘러싼 인파가 워낙 많아 혼잡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기파는 매우 독특하며 또한 익숙한 기파였다. 무려 한 달 가깝게 함께 치고받았으며 함께 마인을 상대로 사선을 넘나들었다.
종화였다.
“왔구나.”
장례를 다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벗지 않은 삼베옷이 인상적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종남의 장문인이 마교를 응징하여 태을검선의 복수를 끝낼 때까지 종남파 전원이 상복을 벗지 않겠노라 천명했다고 했다.
“일찍 도착해있었네. 그런데 옆에는 누구?”
“아, 남궁 세가의 남궁혜 소저. 우리와 함께 싸웠던 남궁 형님의 동생이야. 남궁혜 소저. 이쪽은 종남의 제자인 종화라고 해요. 제 친우입니다.”
친우?
종화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아, 종남의 소검후님이시군요. 소문은 익히 들었답니다. 남궁혜라고 해요.”
“종화라고 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견문이 짧아서······.”
“아, 아니에요. 저는 딱히 무림에 소문날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무위도 일천한걸요.”
“남궁 형님의 말에 의하자면 안휘제일미. 천상일화라는 별호로 유명하다고 하더라.”
“아, 아니에요!! 그건 그저 오라버니가 저를 놀리려고 하는 짓궂은 장난이에요.”
남궁혜가 빠르게 손사레를 쳤다.
종화의 시선이 그런 그녀를 훑었다. 태어나서 햇빛에 나간 적이 없는 게 아닌가 의심되는 뽀얀 피부에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따가운 햇볕 아래 검을 휘두른 종화 자신의 주근깨 가득한 피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저 빨간 입술과 옷으로 다 감춰지지 않는 부드러운 몸을 보라. 역시 남자들은 백날천날 검이나 휘둘러 딱딱한 자신의 몸보다 저런 부드러운 몸을 더 좋아하겠지?
지금까지 종화가 봤던 여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강아현이었다. 하지만 종화의 눈으로 봤을 때 강아현조차 저 남궁혜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물론 강아현도 보기 드문 미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녀와 미동 사이. 어딘가에 있는 미성숙한 아름다움이었다면 저 남궁혜는 부정할 수 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무슨 이유일까? 종화의 기분이 괜스레 언짢아졌다.
“백운호, 너 요즘 무공 수련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아무렴요!! 백공자는 조금 전까지도 저희 집에서 수련하다 나오신걸요.”
“백공자아? 저희 지입?”
종화의 시선이 사나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운호는 무언가 해명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너도 가보면 알겠지만, 현재 우리 화산파가 머무는 태현장이 조금 협소해서 수련을 할 장소가 없거든. 그래서 남궁 형님께 부탁드려서 연무장을 빌려 쓰고 있는 거야. 하루도 수련을 거를 수는 없잖아?”
“흐음······, 그래? 근데 그런 것 치고는 나를 감지하는 게 너무 늦은 것 같던데. 기감이 많이 무뎌진 거 아니야?”
“그야 워낙에 사람들로 번잡했으니까. 그나저나 너 이렇게 일행에서 마음대로 빠져나와도 괜찮아?”
“마음대로 빠져나오기는. 누가 마음대로 빠져나와. 이미 사부님께 허락 맡고 온 거야.”
왜일까?
처음 저 멀리서 백운호의 기운을 감지했을 때만 하더라도 반가움 마음뿐이었건만 이상하게 지금은 그저 퉁명스러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남궁혜의 저 해사한 얼굴 때문일까?
아니다. 남궁혜의 얼굴이 어떻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이것은 그저 마교와의 큰 싸움을 앞두고 수련할 시간도 부족한 와중에 이렇게 한가하게 나들이나 다니는 백운호의 나태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게다가 태을검선 태사조님의 원한이 아직 이토록 선명하거늘. 그래, 이 삼베옷이야말로 그 원한의 증거다. 저런 화려한 궁장 따위 괜히 움직이기 불편하기나 하다. 무가의 여식이 저런 움직이기 불편한 옷을 입고 다니다니. 참으로 부적절하지 않은가.
종화의 머릿속이 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중구난방으로 흘러갔다. 운호 역시 두 여자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지금 대체 뭐라 말을 해야할지 종잡을 수 없는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소검후와 소신검.
강호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두 후기지수가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번민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직 남궁혜 뿐이었다. 당연했다. 운호와 종화가 ‘무인’에게 필요한 무공을 익히는 시간 동안 남궁혜는 ‘여자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익혀왔다.
그리고 그런 남궁혜가 보기에 지금 저 두 사람은 참으로 귀여웠다. 만약 이것이 연애담의 남녀 주인공들이라면 분명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남궁혜는 제 3자가 아닌 이 모든 이야기의 당사자였다.
‘이래서야 내가 악역이 된 기분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며, 그렇게 마음이 끌린 상대가 저만한 인물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남궁 세가와 같은 명문 무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 타고난 혜택만큼이나 많은 의무가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여자라면 그 의무의 대부분은 결국 혼사로 귀결된다.
가문과 가문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데 그만한 것도 또 드문 법이니까. 그녀의 큰 언니가 그랬고, 둘째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남궁혜가 백운호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종화의 얼굴에 불편함이 조금 더 진하게 떠올랐다.
“백 공자, 종화 소저. 언제까지 길에서 계속 이러고 서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저희 집으로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떤가요? 저희 오라버니도 종화 소저를 보면 참으로 반가워하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