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무한(4)
구대문파와 칠대세가가 무한에서 회합을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 중원에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당연한 일이다. 최근 강호의 화두는 단연 마교의 재등장이다. 과연 구파와 칠가는 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강호의 뭇 세력들은 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구파와 칠가를 제외한 강호 최대의 세력인 개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떤 면면들이 모이고 있지?”
“일단 확정된 인원만 보자면 모용세가의 무신과 소림의 대력. 그리고 팽가의 단악도와 무당의 양검이 움직이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소림, 무당, 그리고 모용과 팽가라······. 그러면 화산이랑 남궁은?”
현 개방의 용두방주인 걸왕 소진평이 머리를 긁적였다.
과연 중원에서 목욕과 가장 먼 남자라는 칭호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길게 기른 손톱 아래가 순식간에 검은 때로 가득 찼다.
“화산의 권신과 남궁의 검왕은 소식이 없습니다. 다만 화산에서는 청공진인과 청우진인이 산에서 내려왔고 남궁은 가주가 직접 무한에 왔다고 합니다.”
“청공과 청우가? 흐음, 화산도 이번 일이 정말 큰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긴 한가 보구나. 언제까지나 꽁꽁 숨겨둘 것 같던 검집 안의 보검을 꺼내 들다니. 본래 숨겨진 보검은 숨겨놨을 때 더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라지만, 그게 세 자루나 된다면 두 자루 정도는 꺼내 자랑한다고 해도 괜찮겠지. 그 날카로움이 정말로 사람들이 상상하던 그런 날카로움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청자배 사형제들이 강호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거기서 실력이 더 극적으로 상승했다고 보기에는 나이도 여든에 가깝고요.”
-클클클
이제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아진 후개의 이야기에 소진평이 웃었다. 사람이란 그렇다. 뭐든지 자신을 기준으로 본다. 아마 자신도 과거 만리우보라 불리던 천하제일인 백운진인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이 녀석과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산의 기공은 일반적인 기준을 거부한다.
“다른 이들은 다 바보라서 그들을 경계한다고 생각하느냐? 일류와 절정의 격차보다 큰 것이 절정과 초절정의 격차다. 하물며 화산 무공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하지만 사부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놈들이 처먹은 게 있는데, 그 정도는 돼야지. 내가 예상하기에는 최소 10년 전 청무.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칠대세가도 초절정의 고수 하나는 더 나와야 균형추가 맞을 텐데. 모용이 꼭꼭 숨겨둔 검을 빼 들 것인가, 아니면 남궁의 엉덩이 무거운 그 녀석이 기어 나올 것인가의 문제겠군.”
“그보다는 저희 쪽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까요?”
제자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었다.
“모용경. 그 늙은이만큼 나를 잘 아는 놈도 드물지. 차라리 구대문파에서 도움을 청한다면 모를까, 그 늙은이가 살아있는 한 칠대세가에서 개방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은 없을 것이다.”
“허면 저희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어떻게 움직이기는. 그냥 하던 대로 납작 엎드려 있어야지. 내가 백운, 그 괴물을 여러 가지로 싫어한다지만 그 괴물의 이야기는 참으로 쓸만한 것이 많았다. 결국 문파가 강해지려면 풍파 없이 꾸준한 시간을 들이는 것이 최선인 법이라는 말이 그러했지.”
문제는 근래에 무림에 너무 풍파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국지적인 사건들이 가끔 발생하긴 했지만, 대문파가 휘청할 만큼 커다란 사건은 근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다 그간 마교 놈들이 조용해서다. 하지만 이번에 이렇게 기지개를 한번 쭉 켰으니 이제 당분간은 온 무림이 시끄럽겠지. 이럴 때 납작 엎드려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법이지. 당장 마교 놈들을 때려잡아 명성을 떨쳐 봐야 문파의 세력이 깎여나가면 그걸로 끝이다.”
“다른 문파 놈들이라고 그걸 모를까요?”
“물론 알겠지. 하지만 그놈들은 강호를 영도하는 구대문파와 칠대세가 아니더냐. 마교가 제 놈들을 노리는데 어쩌겠냐. 나서야지. 물론 그 와중에도 자기들끼리 통밥 굴려가면서 남들이게 피해를 전가하려고 힘 싸움 좀 하겠지만 어쨌거나 아무 피해 없이 끝낼 수는 없을거다. 마교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고개를 치켜든 걸 테니까. 우리로서는 그냥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으면 그만인 일이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 무한 쪽 일은 개입하지 않는 걸로?”
소진평이 자신의 손톱 사이를 긁어냈다.
끔찍한 고형물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후개가 애써 그 끔찍한 고형물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래, 너는 지금처럼 남해 해적 놈들 관리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또 의심을 할 테니 이 늙은 거지가 오래간만에 잔치 음식 구걸이나 하러 가봐야겠구나.”
“사부님께서 직접이요?”
“그래, 겸사겸사 청자배 늙은이들 실력도 정확히 파악하고 혹시나 모용에서 숨겨둔 검을 꺼내 든다면 그놈도 좀 파악해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애들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래, 너무 요란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소문 난 잔치니까 먹성 좋은 애들로 준비시켜라.”
“네.”
* * *
무한, 특히 한구의 땅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기에 태현장 역시 장내에 연무장을 갖출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덕분에 수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교외라 나가야 했는데,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현재 한구 근처에는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무인들로 가득했다. 도저히 공터를 찾아 수련을 할만한 환경이 아니다.
“응? 수련할 장소? 그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여길 쓰면 되지 않나.”
“네? 하지만······.”
“에헤이, 동생. 뭘 고민을 하고 그러나. 혹여 보는 눈이 문제인가? 아무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여긴 내 개인 수련장일세. 사람들이 잘 오지도 않는다네. 뭐, 오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아버지와 혜아 정도? 그것도 아버지는 낮시간에 다른 사람들 만나느라 바빠서 걱정 없을 테고, 혜아라면. 흐흐흐,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혀, 형님!!”
“농일세, 농이야. 아무튼 여기를 써도 괜찮다네. 화산에서처럼 나와 종종 검을 섞는 것도 괜찮고 말이야.”
얼굴이 벌게진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생일도 지나 운호의 나이도 어느덧 열여섯 살. 한참 육체적으로 혈기방장할 나이다. 그리고 열여섯 살이라면 중원의 평범한 농부라면 슬슬 혼사를 논할 시기다.
사실 지금까지 함께 생활하던 강아현 역시 남궁혜에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강아현은 여성이기 이전에 ‘무인’이라면 남궁혜는 무인이기 이전에 ‘여성’이었다.
운호에게 그 차이는 실로 컸다.
“어머, 두 분. 또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누고 계신가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여기 동생이 꽃을 찾는 한 마리 나비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기에 내 그 길을 만들어줬다.”
“혀, 형님!!”
운호의 얼굴이 또 한 번 벌게졌다.
둘만 있을 때 하는 농도 당황스럽지만, 이렇게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는 농은 더 당황스럽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의 오라버니에게 단련될 대로 단련된 덕분일까?
“백소협. 조심하셔야겠어요.”
“네? 그게 무슨······.”
“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잖아요. 저희 오라버니는 자기 길도 제대로 못 찾는 분이시거든요. 그 길 함부로 걸었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답니다.”
“크흠, 거 무슨 소리냐. 동생. 속지 말게나. 내가 이래 봬도!!”
“설 누이가 시집갈 적에 홀로 베갯잇을 적시셨던 분이시죠.”
“그, 그거야!! 끄응······. 하지만 중도 원래 제 머리는 못 깎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오라버니. 제가 보기엔 그 중은 자기 머리부터 깎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그러니 어서 머리나 깎으러 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무엇보다 여기 백 소협은······.”
“동생은?”
남궁혜가 운호와 남궁철을 바라보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가 -덜컥. 운호의 심장을 내려 앉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자기 머리를 잘 깎는 분이시거든요.”
“뭐, 뭐라고?”
남궁철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남궁혜와 운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남궁철에게서는 실로 보기 드문 표정인지라, 운호도 짐짓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형님, 들으셨잖습니까. 어서 가서 볼 일 보셔야 할 듯 합니다.”
“아니, 내가 볼 일이 딱히 어디 있다고······.”
“어머, 오라버니. 없으면 만드셔야죠. 그게 볼 일이든, 아니면 눈치든 말이에요.”
-크윽!!
남궁철이 과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채 두 걸음 물러났다.
“그,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그러면 이 볼일도, 눈치도 없는 늙은이는 먼저 물러나도록 하겠다.”
“하하, 형님. 농입니다. 농. 가시긴 어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운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사실 정말로 내가 일이 많아서 말이다. 후, 그래도 소가주라고 하는 일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삼 개월이나 가문을 비웠더니 일이 좀 쌓여서 말이다.”
“형님?”
“오늘은 여기 혜아가 너와 어울려줄 테니 맛있는 것 좀 많이 사주고 그러도록 하려무나. 참고로 말해주자면 위험하다 싶을 때는 그냥 무작정 단 걸 먹이면 다 해결된다. 알겠지?”
남궁철이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소가주 전용의 연무장에는 운호와 남궁혜만이 남았다. 지난번에 인사를 나눴고 남궁철이라는 공통의 소재가 있기에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과 단둘이 남아있는 것은 고작 열여섯 살짜리 사내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백 소협. 무한은 처음이시라고 들었어요. 사실 저는 이곳을 참으로 좋아하거든요. 혹시 삼국지를 아세요?”
“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 워낙에 많이 듣고 자란 이야기인지라······.”
“그렇다면 적벽대전도 잘 아시겠네요? 그 소열황제와 남창후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막아선 이야기요.”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백만대군을 홀로 막아낸 장판파의 장익덕. 주군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오천 호표기를 물리친 조자룡의 이야기 아닙니까.”
남궁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리고 바로 여기 한구부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적벽이랍니다. 물론 백 리 정도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말을 달리면 금방이에요.”
“그렇군요. 하지만 그래도 백 리 길이면 당장 다녀오기에는 조금 먼 길입니다. 나중에 남궁형의 시간이 될 때 함께 가시죠.”
“좋아요!! 사실 적벽에 항상 가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거든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위험하다고만 말씀하셨고요. 하지만 소신검 백소협과 함께라면 아버지께서도 허락해주실 거예요.”
“소신검이라니······. 그저 허명입니다.”
“허명이라니 그럴 리가요. 소협이 두 번째인걸요.”
“네? 두 번째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혜는 잘 알고 있었다.
저 수다스러운 오라버니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를. 칠대세가의 그 대단한 공자들도, 중앙에서 관직을 한다는 사촌 오라비들도 모두 아래로 깔고 보던 남궁철이다.
게다가 이 남자 외모도 잘났다. 그리고 그 잘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쑥맥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열일곱 처녀의 방심을 흔든다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글쎄요. 그건 조금 걸으면서 천천히 이야기 할까요?”
남궁혜가 운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이 사뭇 아름다워, 열여섯 청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