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무한(2)
운호는 이미 청무진인과 태을검선이라는 초절정의 고수를 둘이나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무한행에 책임자로 결정된 청공과 청우는 강호에 이름난 고수이기는 했지만, 세간의 평가에 따르자면 천무십칠성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청무진인처럼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오지도 않았고, 태을검선처럼 지팡이를 검으로 삼아 어검비행을 펼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처럼 두 다리로 걸어 운호 앞에 섰다. 물론 그 걸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젊다?
하나는 길고 얇았으며 하나는 짧고 똥똥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겉으로 봐서는 절대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얼굴들이다.
하지만 무언가 느낌이 묘했다. 권신 청무진인은 그 얼굴만 40대 초반의 장년인 인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각 또한 40대 장년인의 그것이었다면, 이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청공이다.”
길고 얇은 노인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짧고 똥똥한 노인은 운호에게 성큼 다가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이미 몇 번씩은 다들 봤으니 넘어가고, 그래 너는 처음이로구나. 나는 청우라고 한다.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저기서 점잔 떨고 있는 저 녀석들도 다들 내 방에서 당과 하나씩은 얻어먹은 놈들이니 뭐라 하는 놈은 없을게다.”
운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운호라고 합니다. 현종 사부님께 사사하고 있습니다.”
몇 걸음 떨어진 곳.
남궁철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그 역시 초절정 고수라면 익숙하다.
당장 남궁 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친할아버지인 검왕이 초절정의 고수다. 게다가 최근 종남에서 권신 청무진인 역시 가까이에서 봤었으며, 칠대세가 최강의 고수이자 어쩌면 강호 최강의 고수일지도 모르는 무신 모용경의 무릎에서 뛰어놀았던 적도 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이다.
‘대체 어째서 저 노괴들이 천무십칠성이 아닌 거지?’
꽁꽁 감춘다고 감췄지만, 초절정의 고수와 매우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해봤기에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들에게서는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특별한 느낌이 전해진다.
게다가 저 얼굴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권신 청무진인보다 오히려 더 젊어보인다.
남궁철은 종남산에서 청무진인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그는 노화조차 역행하는 자하신공의 위력에 감탄했었다. 물론 당시 청무진인은 역천검귀와의 싸움으로 진기가 흔들려 자하신공의 공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지만, 남궁철이야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문파에 세 명의 초절정 고수라니.
‘아니지, 아니야. 청자배 사형제 가운데는 청허진인도 있으니······.’
최악의 경우 넷.
하나하나가 절정 고수 백에 필적한다는 초절정 고수가 넷이라니. 남궁철은 그저 이것이 천하제일의 세력으로 손꼽히는 화산파의 저력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이쪽은? 아하, 남궁 세가의 아이로구나.”
청우진인이 남궁철에게 다가왔다.
-꿀꺽
남궁철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벽아의 손자인가? 생긴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남궁철이라고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검왕이 제 할아버지입니다.”
“그랬구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군. 청공아!! 이리 와보거라. 여기 벽이의 손자가 있다.”
“남궁벽?”
저 멀리 서 있던 청우진인의 몸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 남궁철의 눈 앞에 나타났다. 마치 시공간이 접힌 것 같은 모습에 남궁철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운호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체 언제!?
“어떠냐. 벽이를 쏙 빼닮지 않았더냐?”
“확실히 저 코를 보니 그 녀석을 닮은 것 같긴 하군.”
“그렇다니까!! 내가 얼굴만 보고 바로 눈치챘지. 벽이의 손주구나 하는 걸 말이야.”
“얼굴은 무슨!! 딱 기세만 봐도 남궁이구만.”
“아니, 어디 남궁이 벽이의 자손만 있다더냐.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벽이의 손주인 것을 딱 알아본 것만 하더라도 대단한 일이지.”
“제왕검형은 남궁의 직계, 그것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무공이다. 저 나이에 제왕검형을 저만큼 익혔다면 당연히 가주의 직계일테고, 현 가주가 벽이의 아들이니 당연히 벽이의 손자겠지.”
청공의 신경질적인 말에 청우가 자신의 통통한 뺨을 긁적였다.
“에잉, 청허 녀석이 없으니 네 놈이 똑똑한 척을 하며 나를 구박하는구나.”
“허튼소리 그만하고 얼른 이리 오너라. 늦지 않게 무한에 가려면 부지런히 가야 한다.”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왜?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무한이면 달려가면 금방 아니야?”
“그거야 네 놈과 나의 이야기고. 벌써 잊어버렸느냐.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아, 맞다. 그랬지. 하긴 얘들도 나이에 비해서는 제법 튼튼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저맘때는 아직 한참 약할 때니까······.”
어지간한 남궁철도 자신을 약하다 칭하는 두 노인의 대화에는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당연하다. 저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 약하지 않은 이는 대체 얼마나 될까? 나이에 비해서 제법 튼튼하다는 말 자체가 칭찬이다.
“어쨌거나 모처럼 젊은 시절 재밌게 놀던 녀석 얼굴을 봐서 즐거웠다. 흐음, 이번에 무한에 가면 벽이 녀석도 오는 건가?”
“글쎄다. 그 녀석은 아무래도 우리랑은 다르지. 저기 청무사형과 비슷한 입장일테니 어렵지 않을까?”
“에잉, 하여간. 쓸데없이 뭐 이리 복잡한지.”
청우가 투덜거리며 타박타박 걸어갔다.
분명 느껴지는 기세가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아기 곰돌이가 아장아장 걷는 것 같은 기묘한 귀여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청허자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란히 걸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그 기묘한 사형제의 뒤를 따랐다.
* * *
“동생, 동생도 느꼈는가?”
“뭐를 말씀이십니까.”
“그 두 분 말일세. 아니, 사실 나는 마교의 제사장에게 천무십칠성의 일좌인 태을검선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길래 어마어마하게 큰일이라고 생각했다네. 천무십칠성이라면 우리 할아버지와 동급 아닌가. 사실 그래서 다들 너무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딱히 긴장할 이유가 없었던 거였어.”
운호가 잠시 청공과 청허를 떠올렸다.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괴물들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권신 청무진인, 태을검선 자명진인과 같은 선상에 놓인 고수들일까? 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연 괜히 사람들이 화산을 무당, 소림과 더불어 천하제일로 꼽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느꼈다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 아니!! 잠깐만? 초절정의 고수를 셋, 어쩌면 넷을 보유한 화산을 천하제일문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당, 소림과 더불어 천하제일을 다툰다.’라고 표현한다고? 그렇다면 저 무당이나 소림도 화산에 필적한다는 뜻 아닌가. 맙소사. 아무리 천하에 숨어있는 기인이사가 모래알과도 같다지만 이건 정말이지 나의 상상 이상인 일일세.”
숨도 제대로 안 쉬고 투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남궁철에게 운호가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남궁 세가에서는 저희 청자배 사숙조님들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사실 내가 남궁세가의 소가주라고는 하지만 가문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가주인 아버지가 아닌 태상가주인 할아버지라 말이지. 아버지도 이제 간신히 실무를 보기 시작혔는데 내가 가문의 일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게다가 나는 그간 무림의 일보다 과거 준비에 더 열중했던 터라. 하하하하하.”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호쾌하게 웃던 남궁철이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가문에서는 대충 파악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구만. 왜냐하면 우리 매형이 항상 그 청자배 노괴······. 아니 그러니까 청자배의 노기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강조했거든. 매형이 아는 정보를 우리 가문에서 모를 리는 없지. 게다가 들어보니 저 노기인들은 우리 할아버지와 상당한 친분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확실히 최근 종남에서 있었던 회합에 관해서는 운호도 의아함을 가졌었다.
천무십칠성이라는 강호를 대표하던 고수가 사망했다. 또한 종남 본산에 마인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니, 그리 빠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물론 구대문파와 칠대세가는 중원 각지에 흩어져있는 거대문파들이고, 그런 문파들이 하나처럼 빠릿하게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마교’라는 외부의 위협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마기를 숨긴 채 중원에 몰래 숨어들어올 수 있음이 증명됐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반응은 ‘늑장’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다면?
남궁철의 이야기처럼 천무십칠성을 제외한 또 다른 초절정 고수들이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에 존재한다면?
물론 남궁철의 말을 들어봤을 때, 남궁 세가는 검왕 남궁벽을 제외한 초절정으로 꼽을만한 고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동의 왕으로 불리는 모용 세가라면? 그리고 화산과 함께 천하제일을 다툰다는 소림, 무당이라면?
운호가 생각했다.
어쩌면 저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웃어른들은 이번 마교의 사태를 그렇게까지 심각한 위협으로. 그러니까 생존의 위협으로는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닐까?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있고 그저 피해를 얼마나 줄이느냐. 그리고 그 피해를 자기 문파가 아닌, 상대 문파에 어떻게 최대한 전가하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운호는 처음 마인을 만났을 때의 그 광경을 기억했다.
일순간 뒤집혔던 세상.
그리고 흩날리는 꽃잎과 그 사이로 야차와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증무 태사조.
증무 태사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것이야말로 이곳 몽원경의 목적이며 이렇게 너와 내가 마주 보는 이유다.
증무 태사조는 초절정을 넘어 이치를 깨닫고, 마침내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전설적인 고수다.
그런 전설적인 고수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나를 만나는 이유가 ‘마인’이라고 천명했다.
불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혹시나 정말 강호의 문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형님.”
“응. 동생.”
“형님의 매형이 제갈 세가의 그 제갈첨이라는 분이라고 하셨었죠. 칠대세가의 지낭이라는.”
남궁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 매형이 제갈첨이 맞긴 하는데 칠대세가의 지낭이라고?”
“아닙니까?”
“아니, 너무 거창한 표현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뭐, 우리 매형이 세가 간의 뭔가 귀찮은 일 같은 것들을 잘 해결하긴 하고, 또 그런 거창한 단어 쓰는 거 좋아하는 건 맞긴 한데······.”
뭔가 떨떠름한 반응.
“그러면 어쨌거나 이번 일에 실무자라고 봐도 무방한 건 사실이겠군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이번에 무한에 가면 자리를 좀 주선해주실 수 있을까요?”
“자리를?”
“네.”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