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검술총론(6)
아침 자소공 수련.
이준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 지금 어딜 가는 거지?”
“그······, 그러니까 그것이······.”
화산의 대연무장 바닥에 깔린 청강석은 그 자체로도 극품이다. 하지만 화산 대연무장의 진짜 대단한 점은 아래에 깔린 북해산 한옥이다. 특별한 방법으로 약품 처리된 한옥은 밤사이 화산의 정기를 듬뿍 머금고 그 위에서 수련하는 이들의 내공 수련을 돕는다.
다만 세상 모든 물건이라는 것이 그렇듯 대연무장에 깔린 한옥 역시 그 수명이 있으며, 품질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매년 유지 보수를 해주고 있지만, 위치에 따라 효율의 차이는 존재한다. 물론 그 차이라고 해봐야 매우 미미하다. 하지만 저 때의 아이들에게는 그 미미함조차 크게 와닿는다. 이준형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형운방에서 왔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는 벽하문의 둘째고?”
“네, 넵!!”
둘 다 동정호 인근에 위치한 문파들이다.
벽하문의 경우는 대형어선을 열세 척이나 보유한 부유한 문파였고, 형운방은 주로 그 잡부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중소 문파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열 살쯤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일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형운방의 아이는 세상에 나가 자신이 마땅히 할 일을 조금 미리 하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단순히 그런 집안의 권력관계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큰 문파의 아이는 작은 문파의 아이보다 보통은 더 뛰어나다. 당연한 일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았다. 또한 그 수련 기간 역시 그리 길지 않다. 그것을 뛰어넘어 돌출되는 재능은 그리 흔치 않다.
그래, 6년 전, 이준형 자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백운호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준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서 저 아이에게 그러지 말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벽하문의 아이는 형운방의 아이에게 ‘그래,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일찍 나올게.’라고 이야기를 할까?
잠시 시간을 가늠한 준형이 아이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아직 반각 정도 남았군. 그래, 너희들은 화산의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그······, 그것이 그러니까······.”
형운방의 아이가 망설이는 사이, 늦게 나와 자리를 차지하려던 벽하문의 아이가 당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공입니다. 모든 무공의 근본은 내공이고, 결국 상승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공이 필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 이곳 화산의 대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는 것 역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어때? 너도 그렇게 생각해?”
준형이 형운방의 아이에게 물었다.
그가 힐끔 벽하문 아이의 눈치를 살피고는 그에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준형이 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하지만 분명 아버지가!!”
“네 아버지가 틀린 것이 아니야. 네가 나의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지.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공이지만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공이 아닌, 그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성실함이야.”
“성실함이요?”
“그래, 나는 화산의 무공을 접한 이래 부상과 같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단 한 번도 아침 자소공 수련을 거른 적이 없어. 그것은 지금 화산 본산의 제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야. 너희는 어때.”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저······,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요!!”
“그래, 장하네. 하지만 화산 본산에 남지 못한 이들 가운데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도 수련을 거른 적이 없던 아이들 역시 많았어.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차이가 난 걸까?”
“재능!! 재능입니다.”
이번에도 벽하문의 아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준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도 성실함이야.”
“성실함이요? 하지만 분명 본산에 남지 못한 분들도 수련을 거른 적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반 각을 더 잠들어 있는 이와 반 각을 먼저 일어나 나오는 이는 같지 않아. 그것은 단순히 대연무장에서 미세하게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야. 사람의 성실함이란 그런 작은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성실한 삶의 태도가 누적될 때 그 성실함은 사람 자체를 바꿔.”
이준형이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나와 홀로 자소공을 수련하던 작은 소년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그 아이가 맡아뒀던 자리를 차지했던 자신의 모습이 뒤따라왔다.
왼팔이 욱씬 쑤셔왔다.
물론 그날의 승부는 단순히 그 아이의 재능이 압도적이기 때문일 수도, 무공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간발의 차이. 만약 누구보다 일찍 나와 홀로 수련하던 그 사람이 백운호가 아닌 자신이었다면 그 간발의 차이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제 슬슬 동이 틀 시간이네. 이걸 어쩐다······. 내가 너희를 너무 오래 잡아두는 바람에 근방에 사람이 가득하군. 오늘은 네가 이 자리에 쓰도록 해.”
“네? 하지만 사형께서는······.”
“나는 저쪽에서 해도 괜찮아. 혹시라도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손을 들고. 알았지?”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형운방의 아이.
이준형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인사를 할 사람은 네가 아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하도록 해봐. 3년은 길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 * *
아무리 검을 수족과 같이 다룬다고 해도 검은 신외지물이다. 강철로 만들어진 그것은 결코 사람의 손이나 발과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른 운호의 검은 달랐다. 그의 검이 상식을 초월한 형태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하는 공야찬이 ‘최선’을 다했다.
삼단공에 이른 포원공의 진기가 전신을 순환했다.
절정과 일류를 가르는 경계 너머.
사람의 한계에 다다른 고수가 사람의 한계 너머로 팔을 뻗었다.
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이 한데 어울려 섞여 들어갔다. 공야찬의 인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운호가 휘두르는 검의 비릿한 냄새가 보였고 그 출렁이는 검의 움직임이 맡아졌으며 입안의 메마른 혓바닥이 들렸다.
출렁이는 검이 공야찬의 요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속지 않았다.
그 검은 공야찬의 요혈을 노렸지만, 운호의 생각은 공야찬이 움직일 방향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공야찬의 허벅지가 크게 부풀었다.
포원공의 진기가 파열할 듯 약동하는 대퇴근과 내전근을 보호했다. 운호가 노리는 곳 너머, 혹은 운호가 노리는 곳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운호의 시선은, 그가 휘두르는 검은 여전히 올곧았다.
하지만 공야찬이 보는 세상에서 혹은 느끼는 세상에서 운호의 생각은 널을 뛰듯 흔들리고 있었다.
공야찬이 사람의 한계 너머로 크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부웅
그리고
-톡
그렇게 절정고수의 검이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의 몸에 와닿았다.
“좋구나.”
공야찬이 자신의 검을 납검했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신검합일을 상대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백운호의 형상을 한 검이었으며, 검의 형상을 한 백운호였다.
백운호는 마치 자신의 몸을 다루는 것처럼 검을 다뤘다.
물론 일류와 절정의 경계는 깊고 넓었으니 운호를 깨트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야찬이 원하는 것은 저 신검합일을 경험하고, 자신 역시 그것을 손에 넣는 일이다.
조금 더 자세히 지켜 볼 필요가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의 운호가 공야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역시 중간중간 공야찬을 상대할 때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은 공야찬이 절정의 고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익힌 검술이 자신과 동일하기 때문일까?
운호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공야찬이 절정의 고수이기 때문이 아닌, 그의 검술 때문이라고 느꼈다.
증무진인은 말했다.
기초에 충실하라고.
주마간산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그리하여 그것들이 벽을 앞에 두고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절정.
사실 아직 너무 먼 일이었지만, 증무진인이 한 이야기가 괜한 소리일 리 만무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이것 받아라.”
공야찬이 운호에게 낡은 비급 하나를 건넸다.
광음검(光陰劍)
“어차피 사본이긴 하다만 그래도 유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미리 이야기는 해뒀으니 원본을 보고 싶다면 따로 장서각 신청을 하고 가서 보면 된다. 아 그리고 몇 군데 작은 글씨로 쓰인 부분은 책이 워낙에 낡고 오래되어 글자가 훼손된 부분들이다.”
마지막으로 광음검을 익힌 사람이 무려 팔십 년 전 사람이었다.
“하지만 장서각에 보관된 책 아닙니까. 어찌 훼손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벌써 십칠 년 전 일이다. 안 그래도 당시 그것 덕분에 장서각에 난리가 났었다. 비급의 전수조사에 들어갔었는데 하필 검술 비급들이 있는 서가 뒷면 벽면에 작은 균열이 발견됐다. 게다가 검술 비급은 워낙에 찾는 이가 없다 보니 발견이 늦어졌다고 결론이 났지. 아마 내 사부, 그러니까 네 사조가 아니었다면 이보다 더 심각하게 훼손됐을지도 모른다.”
운호가 서둘러 비급을 넘겼다.
다행스럽게도 작은 글씨로 쓰인 부분은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전체 삼만칠천사백이십삼 자 가운데 백팔십육 자가 훼손됐다. 그리고 그중 오십칠 자는 알아볼 만한 글자였기에 쉽게 복원했으며 칠십일 자는 나의 사부님이 복원하셨다. 나머지는 내가 직접 복원한 부분들이다. 모두 다르게 표시해두었으니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본래 비급만 보고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
무언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만 하더라도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서신을 통하는 것은 그 전달력 자체가 다르다. 하물며 무공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고작 문자만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물론 강호에는 가끔 비급만으로 무공을 익히는 이도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이는 무공을 익히는 이의 오성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나거나, 무공을 창안한 이의 문장을 짓는 솜씨가 사마천 구양수에 필적할 만큼 대단하거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다.
물론 강호에 비급만으로 무공을 익혔다는 이들 대부분은 저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에 해당하기보다는 그가 익힌 무공이 비급을 쓴 사람의 의도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내가 네 오성이 뛰어난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지만, 결코 무리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실험해보기 전에는 꼭 이 사부와 상담하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진정으로 제자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을까? 공야찬의 눈에 탐욕이 보이지 않았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운호가 고개를 숙였다.
* * *
그것은 실로 기묘한 검술이었다.
처음에는 대체 어찌하여 검술이 실전됐을까, 그리고 사부는 대체 왜 이것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을까 궁금했지만, 그것을 읽는 과정에서 그 모든 궁금증은 시원하게 해결됐다.
“이거 설마 유실된 부분 때문이겠지?”
운호는 광음검의 비급에서 실전에서 써먹을 만할 부분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비급에 쓰인 광음검은 전형적인 예식용 검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