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검술총론(5)
돈.
고래로부터 돈은 아주 강력한 수단이자, 때론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도 하는 요물이다. 물론 무인들의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기는 하다.
돈이라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합의다. 하지만 무인은 일정 수준을 벗어나는 순간 그 자체로 사회의 망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존재가 돼버린다.
하지만 그만한 존재가 아니라면 결국 인간은 돈에 구애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재무각주인 굉진자 홍주검객 이진섭이 화산에 손꼽히는 권력자일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팔은 좀 괜찮으냐?”
그는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 도문에서 결혼을 금기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공이란 묘한 구석이 있어 때론 여인보다 더 사내를 유혹한다. 젊은 시절 그는 여느 무인들이 그렇듯 무공에 빠져 살았었다.
물론 이제는 안다. 그 자신은 이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그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조카손자에게 더 커다란 애정이 간다. 도저히 자신의 멍청한 형에게서 난 씨앗이라고는 믿기 힘든 재능이었다. 어쩌면 이 아이라면 저 권신 청무진인처럼 자신은 도달하지 못한 이치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비록 자식은 없었지만. 아니, 자식이 없었기에 이진섭은 더욱 이 아이에게 애착을 주었다.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이제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백운호와의 비무에서 왼팔이 그렇게 된 지 벌써 삼 년.
처음 일 년은 분노가 엿보였고, 그 다음 일 년은 초췌함이 감돌았었다.
하지만 지금.
준형의 얼굴에는 조금이지만, 이해하기 힘든 탈속함이 감돌았다.
“그래, 다행이구나. 이거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별 건 아니다. 보혈단이라고 피를 맑게 해서 수련을 돕는 단환이다. 이번에 난주 백란장에서 선물로 들어온 물건인데 나보다는 네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 수련할 때 먹도록 해라.”
“할아버지······.”
“어허,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이럴 때는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받는 것이 나를 돕는 일이라고.”
“감사합니다.”
이준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이번에 현무가 수업을 하나 담당한다고 하던데? 너도 조교로 참가한다고 들었다.”
“네.”
“끄응······. 차라리 그 시간에 수련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르치면서 얻는 것도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더냐?”
준형의 스승인 현무진인은 참으로 좋은 스승이자,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강한 무인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종남파 벽운도사와의 비무에서 패배한 직후, 화산파, 아니, 전 중원이 그 사건으로 들끓었던 그때. 현무 진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 수련을 거듭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준형에게 이상할 정도로 큰 위안이 됐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그토록 완벽하게 박살이 났던 경험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아직도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어쩌면 평생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을 왼팔의 상처보다 그 기억에, 그 자존심에 난 생채기가 더 컸다.
처음에는 그저 원망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백운호는 부진한 아이였고, 고아였으며 미래가 불안했다. 게다가 그는 주로 장광을 말리는 쪽이었고 심지어 그의 미래까지 걱정해줬다. 그런데 그것이 고작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고?
그리고 그런 그에게 현무 진인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종종 자기 자신조차 속인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란 본디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아주 조금만 눈을 돌리고 자신을 속이면 많은 것들이 편해진다.”
끝까지 자신을 속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현무의 그 말이 없었더라면 스스로를 속인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그렇게 믿고 또 믿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세상에서 백운호는 배은망덕한 놈으로, 자신은 호의를 베풀었다고 되려 피해를 받은 사람으로 남았겠지.
만약 현무 진인이 너는 지금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더라면 그게 아니라 반발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사람이란 본디 약하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결국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본능이라는 이야기가. 그리고 자신을 속이면 많은 것들이 편해진다는 그 말이 이준형을 움직였다.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자신의 행동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떠올렸고, 그 행동의 저변에 어떤 마음이 깔려있었는지를 되새겼다.
-첫날 내가 그거 몇 개 더 빨리 외운 게 그렇게 자존심 상했던 거냐?
백운호의 외침이 떠올랐다.
과연 그런 사소한 일 때문이었을까?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그것은 이준형이 기억하는 최초의 패배였으니까.
가장 어려운 것은 최초의 인정이었다. 그 이후는 그것보다 조금 쉬웠다.
자하기공의 공능이 그를 더 깊숙한 곳까지 이끌었다. 그 속에서 그는 이준형도 백운호도 아닌 제삼자가 되어 상황을 살폈다.
장광과의 일들. 그리고 마치 호의인 양 백운호에게 했던 이야기들.
명확했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이준형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도 있긴 했다. 하지만 먹물에 맑은 물을 조금 탄다고 해도 먹물은 그저 먹물일 뿐이다.
“아······.”
긴 수련의 끝에 이준형이 크게 탄식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아이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앞에서 한 번 박살난 것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컸다. 하지만 그래봐야 고작 한 번이다. 대체 자신은 얼마나 오랜 시간, 다른 아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 주며 살아왔던 것일까.
이준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무 진인이 바위와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행동을 말로 갈음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어렸을 적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행동을 갈음하는 것은 오직 행동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행동하려 한다. 참으로 우습다.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이 바뀌었다고 생각했건만, 결과를 보니 그것 역시 그저 생각뿐이었구나. 종남이 변했다. 그렇다면 어찌 화산이라고 변할 수 없을까.”
“사부님······.”
“준형아, 나는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생각이다. 그리하여 행동으로 행동을 갈음할 생각이다.”
준형은 현무 진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감에서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를 저질렀고, 그것을 사과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부님. 저의 잘못은 저의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어찌 행동을 통한 갈음이 되겠습니까.”
“같은 잘못이 거듭하여 반복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다. 지금까지 나는 그것을 그저 오랜 전통이라 하여 그저 태사조님의 과업이라 하여. 그렇기에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종남은 순양자 여동빈 이후 무려 칠백 년을 내려온 금녀의 전통을 깨트렸다. 그에 비하면 고작 칠십 년짜리 전통은 너무나도 가볍지 않더냐.”
“장문 사조님의 생각은 다르실 겁니다.”
“안다. 사부님도, 그리고 저 북봉에 계신 사조님들도 그저 이런 방법으로 화산의 가장 찬란한 성공을 경험하셨고, 그런 성공의 경험을 가진 분들이 바뀌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하실 요량이십니까?”
“그렇기에 하려는 것이다. 오만한 말이겠지만, 이 화산에서 그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가진 이도.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모두 갖춘 것은 오직 이 사부뿐이다. 이것도 너무 늦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현무 진인의 안타까운 시선에 준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저의 잘못은 그저 저의 잘못일 뿐입니다.”
* * *
백수한은 여전히 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래봐야 고작 삼 년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뚜렷한 목적도 생겼다.
납매검.
공야찬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납매검만 성실하게 익혀도 최소한 자기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말은 상당한 위력이 있었다. 어디 거리의 낭인이 저런 말을 했다면 말 그대로 삼류는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종자 공야찬이라면 절정의 검사로 추측되는 화산의 이대제자다. 그런 이의 기준에서 자기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고작 삼류에 그칠리 만무하다.
-톡, 톡, 톡.
소신검.
현재 강호에서 가장 화제인 후기지수이자 이번 검술총론 수업의 조교인 백 사형이 아이들의 몸을 슬쩍슬쩍 만져가며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검술의 초식이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가 생각할 때는 똑같이 따라 하는 것 같았는데, 백 사형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싶었다.
그래도 그의 앞에 선 저 아이처럼 세 번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장호라고 했던가?
보계현 장가장의 직계로 이미 둘째 형이 본산 제자로 올라간 아이다. 기골도 그렇고 가진 바 재질 역시 대단하다.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고작 하나의 초식을 펼치는 동안 수도 없이 운호의 손가락과 검집이 백수한의 몸을 건드렸다. 부끄러웠다.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여기 모인 아이들 가운데 최악의 성취다.
“몸의 유연성이 조금 부족한데······.”
백사형의 손가락이 그의 종아리를 쿡쿡 눌렀다.
“발꿈치 힘줄이 선천적으로 조금 짧구나. 이래서야 당연히 자세가 안 나올 수밖에.”
“네?”
“아,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사람마다 그 생김이 다른 것처럼 몸의 근육과 뼈의 생김 역시 다른 것이 당연하지 않더냐. 너는 그저 발꿈치 힘줄이 평균보다 조금 짧은 것 뿐이다.”
“허면 어찌해야 할까요?”
“매일 아침 하는 자소공 수련에 더 힘을 쏟거라. 조식을 통한 내공 수련도 수련이지만 근골을 유연하고 강건하게 성장시키는 데 천하에 그만한 무공도 드물다.”
백수한의 얼굴에 실망이 감돌았다.
이맘 때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기를 꿈꾸기 마련이다. 방계로 태어나 화산까지 온 백수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수많은 특별한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은 그리 특별한 아이가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것과 열등한 것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운호가 그 표정을 읽었다. 수업을 가장 따라오지 못하는 이 아이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홀로 비루하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백수한의 작은 등을 한차례 쓸어주었다.
“괜찮다. 입문한 지 이제 고작 닷새 아니더냐. 열심히 정진하면 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형도 그러했다.”
“네, 사형.”
아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