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검술총론(3)
분명 뻔히 아는 초식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조금 다르다. 그게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생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챙
공야찬과 운호의 검이 크게 부딪혔다.
“여기까지다. 어떠냐? 이것이 너희가 익힐 납매검이다.”
아이들의 눈은 이미 휘둥그렇게 변해 있었다. 물론 이 아이들 가운데는 이보다 더 대단한 무공을 가까이에서 본 아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애당초 이곳에 모인 아이 대부분은 속가에서도 입지가 단단한 아이들이다. 또한, 화산의 속가 가운데는 가문의 최고고수 한, 둘이 절정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환갑이 넘은 지긋한 노고수들이다.
헌데 그들보다 고작 다섯 살 많은 백운호가 저만한 무위라니.
가문의 아버지, 숙부들이나 저런 무위를 보일 수 있을까? 심지어 지금 저것은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제약을 건 무위였다.
‘약속 대련. 그래, 저거 약속 대련 같은 거야.’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고작 십 대 중반에 저런 무위를 보여주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소검후를 꺾었다느니, 마인을 참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마인을 참하던 자리에는 애당초 그 소검후와 옥녀봉의 후계자. 그리고 남궁 세가의 안수해원검(案首解元劍) 남궁철이 함께였다고 들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대체 우리가 뭐라고 저분들이 시간을 내서 그런 걸 짜겠냐.’
‘맞아.’
물론 그런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이는 없었다.
권위의 문제다.
대부분 화산의 속가에서 자라난 그들에게 화산 본산은 절대적인 무언가였다. 그런 대화산의 제자가 고작 자신들에게 그런 짓을? 굳이?
공야찬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자신의 의도가 충분히 먹혀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어쩌면 괜히 가만히 있는 어른들의 콧털을 뽑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백운호는 화산의 중심에 서 있었다.
운호 자신은 강하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외당 일 때문에 화산 본산을 끊임없이 오가는 공야찬은 그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종남파에서의 사건 역시 그러하다. 다행히 본산에 새로운 삼대 제자들을 받는 큰 행사가 있었기에 당장은 큰 이야기 없이 넘어가기는 했지만, 현재 속세에서 가장 많이 회자하는 무인은 백운호다. 일부 지역에서는 신권 청무진인에 빗대어 운호를 소신검(小神劍)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미 기호지세다.
‘10년을 익혀서는 검종을 이길 수 없고, 20년을 익히면 검종에 빗댈 수 있으며, 30년을 익히면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공야찬 역시 기종을 추구하는 사문 어른들의 생각 자체는 이해했다.
일견 효율만을 따진다면 그것은 분명 옳다. 문파 자체의 강함을 위해서는 기종이 정답으로 보인다. 하지만 매농검이 말하듯 미시적 효율과 거시적 효율은 절대 일치하지 않는다. 검종의 필요성 역시 분명하다.
공야찬이 운호를 바라봤다.
특별한 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어른들을 설득할만한 근거로는 부족하다.
삼대 제자의 이번 기수.
공야찬은 이번이야 말로 검종이라는 것이 어째서 필요한지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 * *
그날 저녁.
“오늘 수업에서 사백님과 검을 나눴다며?”
강아현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종남에서의 사건이 있고, 남궁철이 그에게 들러붙은 이후 정말 오래간만의 만남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몰래 내 이야기라도 수집하고 다니는 거야?”
“몰래 수집은 무슨. 그 수업 듣고 온 애들이 죄다 신나서 떠들고 다니더라. 혹시 나는 뭐 보여줄 거 없나 하는 눈빛을 보내는데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글쎄 들고 있던 단약을 멋지게 먹는 모습이라도 보여줄까 고민했다니까.”
“단약? 아, 응급법 수업에 조교로 참가한 거야? 설마 강 사숙님이 가르치시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아빠는 뭐 매일 연구하신다고 바쁘지. 우리 때랑 같아. 그냥 오늘 첫날이라서 종묵 삼촌이 잠깐 내려가서 단약에 대해서 특강을 한 거야. 그 삼촌도 참, 어지간한 문파라면 충분히 수석 연단사 하실 수 있는데 괜히 아빠한테 코 꿰여서 이런 귀찮은 일은 죄다 떠맞아서 하고 계신다니까.”
“그만큼 사숙님께 배우는 게 있어서겠지. 그나저나 너 요즘 너무 안 찾아 오는 거 아니야? 예전에는 하루가 머다하고 와서 비무하자고 졸라대더니?”
강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다 네가 그 남궁 세가의 이상한 인간이랑 어울려서 그런 거잖아.”
“아, 남궁철 소협?”
“그래, 오늘은 외당주님이랑 약속이 잡혀있다고 하더라.”
뭔가 이상하게 허전하다 했더니.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남궁철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허전?
백운호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매일 쓸만한 이야기를 하는가 싶다가도 항상 결론은 자기 자랑뿐이고. 하여간 내가 딱 싫어하는 유형이야.”
“확실히 남궁 소협이 자기애가 좀 심하기는 하지.”
“좀? 그 정도면 병이야. 병.”
마인과의 싸움에서 입었던 내상은 말끔하게 나았는지 종알종알 남궁철의 욕을 늘어놓는 강아현의 안색이 밝았다.
“그나저나 모처럼 만났는데 가볍게 대련이나 한 번 해볼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으로 왔네요.”
강아현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그녀가 펼치는 자운검의 운용은 더 능숙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마인과의 싸움에서 소득을 얻은 것은 운호 자신만은 아닌 듯싶다. 특히 옥녀진결 일단공에서 이단공으로 다시 일단공으로 전환하는 연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낮시간, 공야찬과 검을 나눌 때 느꼈던 그런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쾅!!
분명 강아현은 자운검의 위력을 최대치에 가깝게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어디 한 번 해볼까?’
몽원경 속.
증무진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에 닿지 못한 단순한 잡기이며 그저 활용에 불과하다.
강아현이 가볍게 검을 내지르고 돌려 그어 회수하며 숨을 들이켰다.
지금이다.
한순간에 그녀가 내뿜는 기운이 폭증했다.
옥녀진결의 이단공이다.
강아현이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다섯 근 하고 여덟 냥.
근육의 무게를 늘린 만큼 검의 위력 역시 강해졌다.
운호의 검이 강아현의 검에 닿았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아주 살짝 잡아당겼다.
분명 강아현의 일검은 강력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검이 그의 의도를 따라왔다.
그리고 -쾅!!
증무진인의 그것처럼 백운호의 검이 그녀 칼의 날밑을 강하게 두들겼다.
이후는 더 쉬웠다.
백운호는 거기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싸움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일격이 이상한 형태로 파훼 당한 강아현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가볍게 승부가 결정 났다.
운호는 그녀와의 비무에서 아무런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 * *
“동생!! 소문은 들었다네.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 사이에 꽤나 유명하던데? 그나저나 아현 소저는 도통 안 보이는군. 내 전해 듣기로는 이 모옥에 꽤나 자주 방문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어제 왔다 갔습니다.”
“뭐, 뭐라고!? 어째서? 어째서 왜 하필 내가 딱 하루 안 온 어제 다녀간 건가?”
어째서였을까? 바로 그 이유로 어제 다녀간 거라고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남궁 소협. 저와 비무를 하고 싶다고 하셨었죠.”
“그랬지. 나야 언제나 그러했지. 좋아하는 동생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또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글쎄요. 가르침을 받는 것이 누가 될지는 검을 섞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패기가 참으로 보기 좋군.”
대체 그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사부와 검을 섞는 순간에 느껴졌지만 강아현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 감각. 운호의 본능은 이것이 그가 성장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 소리쳤다.
설마 강자를 상대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에 어젯밤 몽원경에서 증무진인과 검을 섞을 때는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궁철은 어떨까?
평소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순간에도 남궁철의 기도는 언제나 절정에 육박했다.
운호의 주변에 기세를 저런 식으로 뿌리고 다니는 이는 없었다. 저것은 마치 ‘내가 이만큼 강합니다.’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평소 남궁철이 보여주는 언행과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검을 뽑아 드는 순간 한층 더 극대화된다.
분명 남궁철은 절정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구파의 고수들조차 보통 지천명을 전후로 하여 절정에 들어간다. 마흔 전에 절정지경에 든다면 대단한 기재 소리를 듣는다. 차세대 천무십칠성으로 꼽히던 소림의 종무, 무당의 자현, 점창의 청일, 그리고 화산의 현무조차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절정에 이르렀다.
남궁철의 나이는 올해로 겨우 열아홉.
아직 약관도 채 되지 못한 나이다. 절정이라니.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드는 순간 뿜어나오는 남궁철의 기세는 사부가 전력을 다할 때의 그것에 필적한다.
절정지경.
쉽게 말해 인간의 극한에 서서 그 너머로 팔을 뻗은 경지다. 그 두 발은 인간의 한계에 얽매여있지만, 그 손끝은 분명 한계 너머에 닿아 있다.
남궁철의 검에 금빛의 천뢰가 맺혔다.
저것이야말로 속가기공의 결정체. 제왕심결의 정수다. 유형화된 기운을 통상 강기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것은 분명 강기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진짜 의미의 강기와는 조금 다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소우주를 완성하여 그것을 세상에 펼쳐내는 것이 진정한 강기라면, 남궁철이 펼쳐내는 저 제왕검형은 그저 특성을 지닌 진기의 발현에 가깝다.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전력을 기울인 남궁철의 일격은 절정고수의 그것에 준한다.
남궁철의 몸이 운호를 향해 쏘아졌다.
운호의 감각이 남궁철의 운동을 파악했다. 공격의 궤도를 읽었고, 그 힘의 크기를 읽었으며 그리하여 그의 의도를 추측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남궁철의 기세가 또 한 번 폭발했다.
감히 백만의 대군을 거느린 제왕에게 덤벼들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강자 앞에서 위축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몇몇 동물은 적을 만나면 몸을 크게 부풀린다. 제왕의 검형 역시 그와 같았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속 빈 강정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어찌 속 빈 강정이 속가제일을 다투겠는가.
일순간 폭발한 남궁철의 기세가 운호의 감각을 교란했다. 과하게 자극된 운호의 교감신경계가 강하게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근육들이 수축되고 경직됐다.
마인을 상대할 때의 남궁철은 그저 일 각에 한 번씩 총 두 번. 절정 고수의 공격에 준하는 일격을 날리는 도우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상대하는 남궁철은 조금 달랐다.
‘이것이 진짜 속가제일검.’
그렇게 허세조차 실력으로 둔갑시킨 남궁의 일검 앞에서 백운호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가장 합리적인 검.
납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