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검술총론(2)
“내 수업에 조교로 참여하도록 해라.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있을 것이다.”
“네, 사부님.”
먼저 입산한 제자들을 조교로 쓰는 것은 그 나름의 효과가 있다.
고작 5년이다.
5년 먼저 입산한 사형이 보여주는 무공이 어떻게 그려질지는 명약관화하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최악은 새롭게 입산한 아이들 가운데 몹시 뛰어난 아이가 있어 사형의 무공을 따라잡는 일이다.
하지만 운호를 조교로 쓴다면 그런 사태는 벌어질리 무방하다. 차라리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에 좌절하는 아이가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애당초 그런 아이라면 본산에 입산할 수도 없을 테니······.’
실제로 순수하게 검술의 기교만으로 한정 짓는다면 오히려 백운호 쪽이 공야찬 자신보다 훌륭할 수도 있다. 물론 실제로 검을 겨룬다면 결과는 뻔하다. 괜히 경지에 절정이라는 선이 그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이 아이가 그 선을 넘어선다면?
공야찬이 잠시 상상했다.
어쩌면 사부의 비원을 이룰 존재는 자신이 아닌 이 아이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지.’
그가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후대에 맡기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늙어 검을 들 힘조차 없을 때로 충분하다. 수년간 꽉 막혀있던 길을 드디어 찾아냈다.
“비급에 관해서는 장문인께 말씀드렸다. 다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네가 공과격으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니 내가 검술을 연구하는 데 필요하다고 보고드렸다. 네 공과격은 훗날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사용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됐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비록 네 검술의 성취가 크다고는 하지만, 본래 무학이라는 것은 깨달았다고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또한 금세 휘발된다. 그렇기에 새로운 것을 익힌다고 하여 옛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한다.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공야찬은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자신도 모르게 뻔한 잔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잔소리들이 아주 먼 옛날 자신의 사부가 자신에게 했던 애정 어린 잔소리들을 쏙 빼닮아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증무진인의 검이 운호의 몸을 스쳤다.
아슬아슬한 회피. 증무진인의 눈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아득한 연산의 과정 끝에 지금의 일 검을 오늘 승부의 마지막으로 확정지은 것이 벌써 열일곱 수 이전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백운호는 정확하게 증무진인의 생각처럼 움직였다.
지금 이 마지막 동작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파지법이 바뀌었다.
손목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운호의 검신이 그를 따라 호를 그렸다. 이런 종류의 움직임에서 검병이 한 치를 움직일 때 검신은 한 자를 움직인다.
순식간에 운호의 검이 증무진인을 위협했다.
‘위협’이라니.
실로 오래간만의 경험이었다.
증무진인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 지금의 그는 운호와 똑같은 수준으로 내공을 제한하고, 그가 익힌 무공만을 사용하도록 제약된 상태다. 하지만 오래전 그의 인생에서 이러한 조건을 걸고 비무를 벌인다는 것은 승리의 다른 말이나 다름없었다.
‘벌써 이만큼이나!!’
그러나 아직이다.
장강의 물결을 밀어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운호의 수는 그의 예상을 벗어나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상정한 백운호의 수준을 감안 했을 때의 이야기다.
살아 생전, 수백, 수천의 무인을 상대했던 그의 경험이 빛을 발했다. 크게 호를 그리며 날아드는 운호의 검에 자신의 검을 가져다 댔다.
경지에 이른 이화접목의 수법이었다.
그저 약간의 뒤틀림이면 충분하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며 오직 인도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뒤틀림. 운호가 그것을 인지하고 수정하려 하는 순간, 증무진인의 검이 운호의 검을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깡!!
증무진인의 검이 칼의 날밑을 강하게 두들겼다.
검을 쥔 운호의 손에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증무진인의 손목이 유연하게 돌아갔다. 몸무게가 실리지 않은 가벼운 일격. 하지만 진기라는 것은 사람을 초인으로 만든다. 그 가벼운 일격에도 대나무 정도는 너끈히 가를만한 위력이 담겨있었다.
-터엉!!
반쯤 뒤로 몸을 젖힌 운호의 발끝이 정확히 증무진인의 검신 중앙을 강하게 두들겼다. 검신이 크게 출렁인다. 하지만 검극은 여전히 정확하게 운호의 요혈을 노린 채 날아들었다.
운호가 부운약표의 보신경으로 검을 비껴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증무진인은 화산 역사상 부운약표의 묘리를 가장 깊숙하게 깨우친 이 중 하나였다.
구름처럼 떠다니며, 질풍처럼 뛰어오른다.
구름처럼 떠다니는 순간이 아니다.
운호의 몸이 질풍과 같이 변화하기 직전.
-푸욱
증무진인의 검이 그의 허파를 꿰뚫었다.
“꺼억······.”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성.
한순간 호흡이 턱 하고 막혀왔다. 행공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조식이다. 운호가 서둘러 포원공의 진기로 쪼그라든 폐부를 확장시켰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
하지만 증무진인의 가속된 인지 속에서 그 촌각은 무한에 가까웠다.
그의 검극이 운호의 턱 끝에 와닿았다.
“사조님 그건 반칙 아닙니까? 저는 그런 거 배운 적이 없는데요.”
“세상 모든 것이 꼭 배워야 가능한 것은 아니지. 도에 닿지 못한 단순한 잡기이며 그저 활용에 불과하다. 자운검을 제대로 수련했다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백운호가 방금의 비무를 반추했다. 증무진인의 움직임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생됐다.
가능할까?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했다. 물론 최우선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잘 살펴보아라. 그 모든 과정들이 벽 앞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증무진인의 말을 끝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꽃나무로 가득한 몽원경이 아닌, 그의 작은 방안이었다.
칼에 찔려 죽지 않고 깨어나다니. 최근 들어 가장 얌전한 깨어남이었다.
“기초라······.”
자신이 기초를 게을리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운호는 여전히 하루에 한 시진 이상을 납매검과 매농검 그리고 자운검의 초식을 수련하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사부님도 그렇고 꿈속의 증무진인도 그렇고. 같은 날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운호가 자신이 혹시라도 놓친 것이 없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 * *
“화산에 검술이라. 의아하게 생각하는 녀석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너희들 가운데는 태어나 한 번도 검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 강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병기는 단연 검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설사 검을 다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두는 것은 아주 큰 도움이 된다.”
5년 전 처음 사부에게 검술 총론을 듣던 날이 기억났다.
장문인의 훈화가 5년 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검술총론을 가르치는 사부의 첫 마디 역시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응?’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이 조금 달랐다.
‘저기 저 사형이 바로 그분이지? 종남의 소검후를 상대로 승리한 유일한 후기지수.’
‘맞아. 듣기로는 종남산에서 극악무도한 마인도 참하셨다고 하더라.’
운호 자신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최근 강호에 단연 화제라고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고수에 열광한다. 그 고수가 젊고 잘생겼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것일까?
공야찬이 자신이 준비한 말을 이어갔다.
“화산의 무공으로 경지에 오른다면 맨손으로 능히 창검을 부러트릴 수 있겠지. 하지만 조금 냉정한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고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공야찬이 하는 저 말이야말로 운호가 검술에 집중했던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금 저 아이들은 어떨까?
운호의 시선에 구석에 앉아 있는 한 아이가 들어왔다. 대체 왜 눈이 가는지는 명확했다. 그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한 입성이, 5년 전의 운호 자신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저 아이 이름이 백수한이라고 했던가?’
공야찬이 한참 이야기를 이어갔다.
왜 창이 아닌 검이 무림의 주류인지, 그리고 검의 특성은 무엇인지. 어째서 화산이 신외지물이 아닌 권장에 집중하는지. 그리고 그 말의 끝에서야 처음으로 5년 전과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면 오늘은 납매검의 초식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여기 이 아이는 나의 제자로 너희들의 사형이다. 이번 수업에 조교로 너희들을 도와줄 예정이다. 운호야?”
“화산의 삼대 제자 백운호다.”
5년 전에 여기서 시범을 보인 것은 공야찬이었다.
백운호가 그 때 공야찬이 보여줬던 그 모습 그대로 정직한 납매검의 초식을 아이들 앞에 선보였다.
현란하지 않았다.
오늘 이 시범의 목적은 아이들에게 검술의 초식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있었다.
처음 운호가 검을 쥐고 앞에 나섰을 때, 아이들의 시선은 기대감으로 가득했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앞에서 검을 쥔 저 남자는 무려 ‘소검후’라고 불리는 종남 최고의 후기지수를 꺾었으며, 그 무서운 ‘마존’을 참했으니까.
하지만 운호의 시범이 이어질수록 아이들의 눈에 가득하던 기대감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지금 운호가 보여주는 납매검은 그야말로 기초 중의 기초였다. 이미 가문에서 그 나름의 기초를 수련했던 아이들이 보기에 운호가 보여주는 납매검은 너무나도 따분했다.
운호 역시 그 시선을 눈치챘다.
하지만 굳이 더 빠르고 강하게. 더 화려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5년 전의 운호는 공야찬의 검술을 보고 ‘저 정도면 나라도.’라는 용기를 얻었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도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공야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물론 단순히 저 아이들에게 검술에 흥미를 붙여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검종의 무공을 꽁꽁 감추고 바짝 엎드리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수고했다. 자, 다들 어떠냐?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기초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런 기초야말로 상승으로 가는 첫걸음이거든.”
“네!!”
“녀석들, 대답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말로만 해서는 실감하기가 힘들겠지. 그러니 너희 사형이 대체 어째서 기초가 중요한지를 직접 보여줄 거다.”
“사부님?”
공야찬이 검을 뽑아들었다.
“응용은 제외하고. 오직 납매검의 기본만으로.”
“네.”
반문은 하지 않았다.
공야찬의 검이 날아왔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뻔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기에 그에 맞서는 운호의 검 역시 뻔하게 움직였다. 검과 검의 부딪힘이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저것이 정말 조금 전 시범을 보였던 그 기초적이며 따분한 검술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아이들은 비록 그 나이는 어리지만 모두 짧게는 3년. 길게는 5, 6년씩 무공을 익힌 아이들이었다.
지금 운호가 사용하는 검술이 조금 전 보여줬던 그 동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공야찬의 검이 날아들었다.
뻔하디뻔한 그 공격.
운호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