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검술총론(1)
이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로 빽빽한 대연무장.
주위를 둘러 봤을 때 온통 험악한 인상들 투성이었다.
분명 화산의 제자 요건은 10세 이하였을 터인데 다들 적어도 열 서넛은 먹은 것 같은 인상들이다.
특히 저쪽에 자신의 둘째 형이 화산의 본산 제자라며 큰소리치는 녀석은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아직 얼굴이 조금 앳되기는 했지만, 덩치만 보면 아버지보다 더 큰 것 같다.
“수한아, 가서 괜히 기죽지 말고, 있는 힘껏 부딪히고 오거라.”
사실 본래라면 가문의 방계인 백수한은 이 자리에 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본가의 장남이 급사하는 바람에 본래 화산에 입문하기로 내정되어있던 둘째가 장남이 되어버렸다. 수한의 아버지는 가문에서도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받는 무사였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수한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다.
먼저 입문하여 화산의 정식 제자가 된 삼대 제자들이 새로이 입문한 아이들을 통솔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고작 너덧 살 차이 나는 같은 아이들이었지만, 그 너덧 살은 아이들 인생의 절반이다. 그들의 눈에 저 사형, 사저들은 충분히 어른이었다.
그리고 그 어른 중에는 백운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참으로 귀엽군. 안 그런가? 하나같이 똘망똘망해보이는 것이 꼭 내 조카들 보는 것 같구만. 그러고 보면 내 조카들도 이제 슬슬 무공에 입문할 나이인데 이 삼촌이 가서 좋은 목검이라도 하나 장만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남궁 소협. 저기 귀빈석에 소협 이름이 적힌 자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에이, 저런 곳에 가서 앉아봤자 어르신들 수발 들고 ‘예예, 아버지는 잘 계십니다. 아휴 할아버지야 아직 정정하시죠.’ 이런 말밖에 더 하겠나. 일없네. 나는 그저 동생 옆이 훨씬 좋다네.”
“소협 옆에 있는 제 생각은 안 해주시는 겁니까?”
“하하하, 동생도 참. 농이 늘었군. 그나저나 저기 저 아이는 아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구만.”
말을 돌리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굳이 문제 삼지는 않았다. 남궁철이 하루이틀 이런 것도 아니고,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인간이기는 했지만, 또 그 행동들에 딱히 악의는 없는 인간이다.
그보다 이렇게 연무장에 모인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 자신도 저러했겠지. 아니, 저보다 더했다. 조가촌에서 처음 만났던 화산의 도사는 실로 이야기 속의 협객 같았다. 이제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보기 힘든지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파의 모든 무인은 그러할것이라는 환상을 가졌었다.
그렇기에 직접 눈으로 목격한 화산은 충격적이었다.
“뭐,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지만······.”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남궁 소협 정말 계속 여기 서 계실 겁니까? 저기 편한 자리 있잖습니까.”
“어허, 무릇 견문이란 저런 자리에서 방관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현장에서 생생하게 이들과 함께 호흡을 나눌 때 쌓이는 거라네. 방금 이건 내가 말하고도 참으로 훌륭한 말을 한 것 같으니 꼭 기억해두도록 하게나.”
“에휴, 마음대로 하십쇼.”
연단에 선 장문인의 훈화는 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산의 문호는 넓다. 무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함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여 부단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화산에 빠르게 도착한 아이들은 벌써 보름 정도 전, 늦게 도착한 아이도 이틀 전에는 도착했다. 자기들끼리 친해진 아이들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전국에서 저렇게 널리 인재를 모으다니. 확실히 우리 집안보다 훨씬 선진적이고 합리적이야. 사실 우리 아버지도 이런 제도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셨는데, 뭐라더라? ‘아무리 그래도 핏줄이 우선이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핏줄뿐이다.’ ‘권력은 힘의 독점에서 나온다.’ ‘무서운 것은 외부의 칼이 아닌 내부의 믿을 수 없는 칼이다.’ 같은 말에 밀려 결국 포기하셨지. 뭐, 결국 속내를 살펴보면 기득권을 내놓기 싫다는 강력한 의지였겠지만 말이야.”
“자세히 살펴보면 별반 다를 것도 없습니다.”
또한 5년 전의 백운호 자신과 같이 특수한 경우도 있을 수 있긴 하지만 이곳에 모인 아이들은 대부분이 화산파가 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거대하고 공고한 사슬 안에 속한 아이들이다. 대충 건너 건너 이름만 대면 서로가 누구인지를 빤히 아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입산한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형!!”
“호, 이 녀석!! 못 본 사이에 아주 많이 컸구나. 길에서 우연히 봤다면 못 알아봤겠어.”
“그러는 형이야말로 굉장한데?”
삼대 제자끼리 가족관계인 경우는 오히려 드문 경우였다.
숙부가, 삼촌이 혹은 작은할아버지가. 친인척이 없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물게 느껴진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중원은 넓고 제자를 구한다면 당연히 검증된 인재를 데려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검증된 인재는 보통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된 교육을 받은 호족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백운호 본인이 지극히 이례적이고 특수한 경우다.
남궁철이 고개를 저었다.
“동생, 생각보다 순진하구만. 사실 혈연과 지연이야 어디에나 있는 당연한 이치 아니던가. 물론 그 혈연과 지연을 두루 갖춘 내가 말하면 조금 재수 없는 이야기기는 하군. 하지만 잘 생각해보게. 저 북경의 관리조차도 과거 성적도 성적이지만 그 혈연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던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작은아버지나 오촌 당숙이 어디 과거 성적이 훌륭해서 고위직에 오르셨다던가? 향시만 간신히 통과하셨을 뿐, 회시는 두 분 모두 두 번씩 사이좋게 낙방하셨다네.”
“아무리 그래도 집안 어른들인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되지. 가문 어른들이 알았다면 아주 불호령을 내리셨을 거야. 하지만 동생이 딱히 우리 가문 어른들께 고자질할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내가 보기에 화산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네. 물론 여기도 이대로 굳어진다면 규모가 전국적으로 펼쳐진 우리 집안과 다를 바가 없어지게······. 잠깐만, 전국적 규모의 남궁 세가라니. 그건 그거대로 엄청난 거 아닌가?”
남궁철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보다 저기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장광. 오래간만이야.”
안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장광은 그사이 더 자랐다. 홀로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에서 두 개쯤 더 솟아있다. 단순히 키만 훌쩍 큰 것이 아니다. 몸 자체가 크게 부풀었다. 마치 불교의 사천왕상을 생각나게 하는 덩치였다. 또한, 옷깃 사이사이로 보이는 피부색이 청동색을 띄고 있는 것이 설매각주님의 무공을 아주 제대로 물려받고 있는 듯 싶었다.
“어······, 어어. 운호구나.”
녀석의 곁에는 녀석을 쏙 빼닮은 커다란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그쪽은? 동생이야?”
“어, 그게 그러니까······.”
“장호라고 합니다. 이번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사실 아무리 화산이 넓다고 해도 지난 이 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이는 전적으로 장광이 운호를 피해 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아주 씩씩하게 생겼네. 덩치를 보니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할 염려는 없겠고, 오히려 누군가를 괴롭힐지도 모르겠구나.”
“아닙니다!! 협객은 약한 이를 보호해야 하는 법이죠.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또랑또랑한 아이의 말에 운호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어쩌면 저기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장광 녀석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와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장하구나. 그렇다면 내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나 해줘야겠다.”
“네!! 감사합니다!!”
“이곳에 있다 보면 당장에 청소가 귀찮고, 좋은 반찬을 잔뜩 먹고 싶고, 조금 일찍 일어나긴 귀찮지만, 수업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하나 같이 저기 본가에서는 하인들이 대신해주던 일들이지. 또한 아이들 가운데는 가문이 한미하거나, 성취가 부족하거나, 혹은 성품이 바르지 못한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아이 중에는 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대신 해주겠다 나서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지.”
“그런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남는 시간에 수련에 집중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하지만 알아서 대신해주겠다 나서는 아이라면서요.”
“그래, 물론 처음에는 그러하겠지. 하지만 그들이라고 어떻게 항상 그런 것들을 대신해줄 수 있을까. 한 번, 두 번씩 그런 일들이 쌓이면 결국 너는 자신도 모르게 너의 일을 떠넘길 아이를 찾게 되겠지. 그리고 그 대상은 아마 너와 함께 수학하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약한 아이’가 될 것이다.”
“설마, 그럴 리가요.”
“변명거리는 많을 것이다. ‘저 아이는 어차피 본산에 남지 못할 아이다.’, ‘차라리 내가 이런저런 일들을 시켜 먹고 속가로 돌아가면 나중에 도움을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라.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속이는 변명이라는 것을.”
운호의 시선이 장광에게 향했다.
그래도 동생 앞이라고 부끄러운 마음은 드는 것일까? 그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있다. 하지만 착각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운호 자신이 약했더라면, 장광은 저기서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는 대신 다른 행동을 취했을 테니까.
“가르침 감사합니다. 헌데 혹시 앞서 수학한 사형들 가운데 그런 무도한 이가 있었던 건가요?”
“글쎄다. 혹여 있었다면은 지금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사과를 하러 나타났을 것 같구나.”
* * *
“아까 그 아이, 대충 눈치챈 것 같더구나.”
“네, 저도 느꼈습니다.”
남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았다. 따르는 아이 앞에서 자신의 치부가 밝혀지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 아이에게는 조금 잔인한 일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혈육의 잘못을 함께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더냐. 잔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그보다 우리 동생이 대체 왜 별반 다를 것도 없다고 했는지 알겠더구나.”
“이제는 그냥 동생을 넘어 ‘우리’ 동생까지 온 겁니까?”
남궁철이 운호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휘감아 왔다.
“짜식. 고생 좀 했겠구나.”
운호가 슬쩍 몸을 움직여 그 팔을 피했다.
하지만 남궁철 역시 만만치 않다. 그는 가진바 기세처럼 절정의 무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그 문턱에서 오락가락하는 무인이다. 그가 진기까지 활용해가며 기를 썼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검을 들었다면 상황은 달랐겠지만, 금나술 만큼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남궁철 쪽이 우위였다.
결국 남궁철이 운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이거 놓으십쇼.”
“뭐, 무공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그런 고생을 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일이라는 건 본래 실력만으로는 안 풀릴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는 이 형님의 이름을 대어라. 내 특별히, 나의 훌륭한 혈연과 지연을 빌려주마. 화산의 제자에, 남궁의 이름까지 얹는다면 중원 어디를 가더라도 이름값으로 괄시를 당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흐하하하하.”
“아니, 남궁의 이름이고 뭐고 이거 놓으시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