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선골(1)
남궁철은 남궁 세가의 후계자다. 실로 귀한 몸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화산까지 따라오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하하하, 걱정할 것 없네. 가끔 보면 아우는 이 형님을 과대평가하는 것인지 과소평가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단 말이야. 뭐 내가 후계자라고는 하지만 아버님도 아직 저리 정정하시고, 남동생들도 넷이나 되니 그렇게까지 보호받을 필요는 없지. 애초에 칼을 찬 무림인 아니던가. 그저 화초와 같이 자라고자 했다면 검을 찰 것이 아니라 학문을 익혀 저기 북직례에 갔어야지. 뭐, 아우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 사람이라고 모두가 무림인이 되는 건 아니거든.”
백운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듣기 싫다.
아니, 애당초 이 사람은 왜 우리를 그것도 하필 나를 따라오는 것일까?
“내 작은아버지만 하시더라도 저기 강서의 임강부에서 지부 대인으로 계시고 오촌 당숙 어른은 산서의 제형안찰사로 계시지. 아 혹시 산서성 쪽에서 관부와 문제가 생기면 내 이름을 대게나. 그러면 어지간한 일은 해결될 걸세. 사실 내가 자랑은 아니지만, 관직에 계신 어른들이 나를 참 예뻐하셨단 말이지. 이래 봬도 내가 일곱 살에 사서삼경을 뗐거든, 아, 동생, 혹시 사서삼경이 뭔지는 알고 있나? 이게 그러니까 말이야······.”
잠시도 입이 쉬지 않는다.
그 내용 역시 대부분이 자기 자랑, 집안 자랑, 그리고 은근히 남을 무시하는 발언들로 가득하다. 지난 사건으로 조금 가려던 정이 뚝 떨어지는 인간이다.
“어쨌거나, 나는 어릴 적부터 문무겸전, 그러니까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이름이 높았지. 그런 나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이 견문이라는 부분이야.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무공에 힘을 쓰다 보니 도통 어딜 돌아다니지를 못했단 말이지.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어렵게 가문 밖으로 나왔는데, 아니 이런 큰일이 벌어질 줄이야!!”“그러시군요. 그런데 그렇게 귀한 몸이 집에는 안 돌아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허, 거참. 대체 내 이야기를 뭘 들은 거야. 나의 유일한 단점이 바로 견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네. 그러셨죠.”
“화산이라 함은 소림 무당에 비견되는 천하의 명문. 심지어 지금 새로운 기수의 3대 제자들을 받아들인다지? 그것 또한 장관 아니겠어? 기수제라니. 본래 70년 전만 하더라도 참으로 말이 많았던 제도였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문파에서 그것을 차용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백운 진인의 혜안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 나는 그런 것들을 둘러 보고자 한다네. 게다가 집에 안 돌아가 생길 문제는 매형이 다 막아준다고 하였으니······.”
“매형이요?”
백운호의 질문에 남궁철이 자신의 커다란 코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뭐 그건 동생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야. 아무튼 화산이라······. 참으로 기대되는구만. 그보다 그 아현 소저는 어디 갔는가? 본래 항상 동생과 함께 있지 않았나?”
남궁철이 고개를 쭉 빼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운호의 시선 끝에 강아현이 더 깊숙이 숨는 모습이 슬쩍 눈에 들어왔다. 본래 종남으로 오는 길에 나의 곁에서 이렇게 재잘대는 것은 강아현이었다. 하지만 남궁철의 수다에는 녀석도 질렸는지 이제는 남궁철을 피해 저렇게 숨고는 했다.
예쁜 여자 대신 잘생겼다고는 하지만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남자 놈이라니.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가는 길에 마을을 들를 것 같더군. 저녁 식사 어때? 내 요즘 아우가 먹는 걸 보니 너무 부실해 보이더군. 도문 특유의 수련인 건 잘 알겠네만 그래도 무인이라면 성장기에는 고기를 먹어줘야지.”
“괜찮습니다. 그것까지 다 고려해서 수련 중인 거라서요.”
“그런가?”
남궁철이 한걸음 슬쩍 운호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나도 사실 한참 클 때에 부모님이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이고, 하기 싫던 것을 억지로 시켰던 적이 있어. 물론 부모님은 모두 나를 생각해서 하신 일이겠지만 이게 또 내 처지에서는 그렇지 않단 말이지? 그럴 때는 가끔 일탈이라는 것을 해보는 것도 매우 좋아. 그렇게 한 번 일탈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 효율도 올라가더군. 어떤가? 오늘 이 형님이 돈 걱정 없이 아주 푸짐하게 살 테니 일탈을 한 번 해보는 것은? 물론 저기 동생의 사부님은 몰래 말이야.”
이 인간······. 참으로 끈질기다.
백운호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가 먹는 화산금정 강진의 특제 벽곡단은 실로 끔찍한 맛이었지만, 그 효율만큼은 어지간해서는 남 칭찬 절대 않는 증무진인마저도 인정할 만큼 훌륭했다.
게다가 한 번 중단하면 다시는 도전할 수 없는 수련이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복락 중 하나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저자를 굴러다녔던, 그리고 조가촌의 그 사건에서 살아남았던 운호에게 ‘강함’이란 그 복락을 희생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남궁 소협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어허, 소협이라니. 형님이라는 좋은 말 놔두고.”
“소협. 어쨌거나 저는 그 ‘일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흐음, 알겠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나를 찾아오게. 내 그게 언제든 동생에게라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맛난 음식을 사줄 용의가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혹시 그 수련이라는 거 아현 소저도 하는 건 아니겠지? 거, 아현 소저가 뭐 좋아하는지 동생은 좀 아는 게 있나?”
오늘도 쉽게 끝나지 않겠구나.
운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잠깐만, 거기 그 동작을 한 번만 다시 해보거라. 거기서 대체 어떻게 압파에서 조파로 변환이 이뤄지는 것이냐. 물론 순간적인 진기의 폭발을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다만, 그래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더냐. 게다가 너의 내공 수준을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 듯한데······.”
공야찬은 이제 체면을 가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은근슬쩍 물어왔다면 지금은 대놓고 자세하게 동작을 묻는다.
백운호가 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 초식은 단순히 이 부분만으로 이런 동작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이전 초식에서의 탄성까지 이용해야 합니다.”
“허어······. 그렇다면 칠초식 역시 그러한 방식인 게냐?”
“조금 다릅니다. 애당초 칠초식은 육초식과 어우러졌을 때 상대방의 방어를 강제하는 초식입니다. 그러니 상대가 검을 들어 나의 공격을 막았을 때 반탄력을 고려해야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공야찬이 속으로 감탄했다.
분명 그가 가르쳐줬던 자운검과 그 형은 흡사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오성을 지녔어야 이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아무리 대단한 오성을 지녔다고 해도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은 한 일일까? 물론 눈앞에 그 예가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대단하여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지.’
공야찬의 무공이 성장을 멈춘 지도 벌써 5년에 가깝다.
마흔다섯.
자하 계통의 기공을 익힌 다른 화산의 무인들과 달리 육체는 이미 퇴보하기 시작했다. 다만 진기의 성장 속도가 육체의 퇴보만큼은 되기에 전체적인 실력의 하락은 이뤄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육체의 노화가 더 가속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조급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쩌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발견했다. 염치 불고, 체면 불고하고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신검합일이라니.
하지만 어려웠다.
지금껏 공야찬은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같은 배분에서 현무의 재능이 가장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식의 이해에 있어서만큼은 공야찬 자신이 현무보다 한 수 위다.
하지만 지금 운호가 보여주는 자운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 그가 익혔던 납매검, 매농검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위치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절망하지 않았다.
진정한 절망은 어려운 길이 아니다. 길 자체가 끊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길이 있다면 걸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어려운 길이라면 어렵게 가면 그만이다.
종남으로 가는 길.
공야찬이 자운검에 매달렸다.
* * *
최초, 운호가 강진과 계약할 때 계약 조건에는 외유를 떠날 경우 매일매일 상태를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보고서를 받아 든 강진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무슨 문제라도?”
“아니, 문제는 아니고······. 잠시 이리 좀 와보거라.”
강진이 운호의 몸을 구석구석 주물렀다.
“설마 했는데······, 역시 그렇군.”
“역시 그렇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운호의 물음에 강진이 운호의 보고서의 내용, 그리고 그가 입었던 부상과 그 경과를 기록해둔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이거.”
“사부님께 연자고를 받은 부분 말씀이십니까?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사부님이 그런 비싼 연고를 그렇게 스스럼없이 저에게 내주실 줄은 저도 몰랐으니까요. 확실히 비싼 약이라 그런지 효과도 굉장하더군요.”
“아니, 그럴 리가······. 아무리 극품의 연자고라고 해도 적어도 일주일은 정양해야 할 상처를, 족히 한 달은 갈만한 타박상을 고작 사흘 만에 일어나게 만들고, 일주일도 안 되어 싹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았습니까. 혹시 이 연자고가 효능이 특별히 좋은 게 아니었을까요?”
운호가 이제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연고통을 강진에게 내밀었다.
강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 연자고는 형님께 내가 만들어 준 물건이다. 뭐 좋은 재료와 최고의 연단사가 만들어낸 연고이니 시중에서 보기 힘든 효능을 지니기는 했다만, 그래도 그만한 효율은 너무 과하지.”
“그렇다면?”
화산금정 강진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연고가 아니라면 당연히 네 몸이겠지.”
“제 몸이요?”
“그래, 네가 벽곡단을 먹은 게 이제 여섯달 째였지? 아무래도 네 녀석 특별히 금단이 잘 받는 체질인 것 같구나.”
“금단을 잘 받는 체질이라구요?”
기억이 났다.
분명 처음 벽곡단을 먹고 몽원경에서 증무진인은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먹었던 그 벽곡단은 과거 수행자들이 신선이 되기 위해 만들었던 금단의 일종이다. 기간은 기본적으로는 이백 년. 하지만 운과 체질에 따라준다면 육십 년 정도면 가능할지도······.
분명 증무진인은 그저 이것을 꾸준히 장복하는 것만으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이 금단이라는 것이 워낙에 몸에 좋지 않은 성분들이 섞인지라 수명 자체를 갉아 먹으니 그것을 육십 년 이상 장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도 덧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특별히 금단을 잘 받는 체질. 그러니까 선조님들은 그걸 아마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강진이 말했다.
“선골(仙骨)을 타고났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