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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57화 (57/288)

57화

무림맹(2)

몽원경.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증무진인은 홀로 서 있었다.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뭔가 어렴풋이 중요한 대화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운호에게는 퍽이나 생경한 감각이었다.

증무진인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잘했다.”

별다른 수식어 없는 칭찬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운호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네?”

“검이나 들어라.”

“지금 혹시 저한테 잘했다고 하셨습니까?”

“검이나 들라니까.”

증무진인이 그대로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수없이 많은 길이 백운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생각할 때 그중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

-챙

자연스럽게 뽑혀 나온 검이 증무진인의 검을 튕겨냈다. 자운검의 기법에 따라 검이 흔들렸다. 매농검의 검리에 따라 증무진인을 유혹했다.

이 순간, 증무진인과 운호는 마치 거울을 사이에 둔 사람처럼 검을 주고받았다. 마치 약속된 대련과 같은 공방이 이어졌다.

증무진인의 검이 자유를 품었다. 운호의 합리성이 그 자유를 제약하자 증무진인의 역설이 그 합리성을 농락했다. 농락당한 합리성은 어느새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되어 상대를 위협했다.

납매와 매농 그리고 자운검까지.

초식과 초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검의 대화가 격렬해졌다.

증무진인이 실감했다.

이 녀석 정말 상승의 초입에 발을 담갔구나.

웬 모질이의 오지랖 덕분에 의도했던 길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용케도 바른길로 돌아왔다. 심지어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빠르다.

증무진인의 크게 제한된 소우주와 백운호의 소우주가 부딪혔다.

막대한 힘의 해방. 그리고 충돌.

-쾅!!!

“커헉!!”

백운호의 반신이 크게 뭉개졌다.

증무진인은 크게 뒤로 세 걸음 물러났을 뿐, 별다른 피해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공간에서 증무진인은 운호와 동일한 내공, 동일한 신체 능력으로 그를 상대했다. 그렇기에 결국 이것은 순수한 기술의 차이였다.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만할 시간 따윈 조금도 주지 않는 무자비함이었다.

그렇게 흐릿해져 가는 운호의 곁에서 증무진인이 홀로 읊조렸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됨을 깨달았다고 하여 얼음이 물이 되었는가? 아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됨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물을 얻기 위해 얼음을 녹이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 * *

-커헉

잠에서 깬 운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광혈마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당했던 부위가 아려왔다. 사부가 선물한 극품의 연자고를 또 한 번 듬뿍 퍼 발랐다.

확실히 약이 좋아서일까? 의원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몸이 회복되고 있었다. 최소한 일주일은 누워있어야 한다던 몸이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멀쩡히 걸어도 괜찮을 만큼 회복됐다.

아니 멀쩡히 걷는 정도가 아니다. 이틀 동안 건너뛰었던 수련을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만큼 몸이 회복됐다.

역시 비싼 약은 비싼 값을 한다.

가볍게 자소공으로 몸을 풀었다.

마지막 순간, 너무 큰 고통 탓에 증무진인의 이야기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말은 기억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다.

증무진인의 그 말처럼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수련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깨달음을 얻고 그다음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깨달음을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니까.

새벽 수련을 끝내고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길.

“이봐, 동생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커다란 코.

남궁철이 슬쩍 다가왔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위기의 순간에 마지막까지 손을 보태려 했다는 점 정도는 마음에 들었다.

물론 정파의 인물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마땅히 그래야 함을 지키지 않는 놈들이 태반이다.

“무림맹이 만들어질 것 같아.”

“네? 무림맹이요?”

“누워있느라 못 들었나 보군.”

무림맹은 상설로 운영되는 단체는 아니었다.

중원은 넓다. 중앙 정부조차도 중원을 통제하지 못하여 각 지역의 패권문파들이나 호족들에게 치안을 담당하게 하는 마당에 상설로 운영되는 무림맹이라니. 어불성설이다.

무림맹이 결성되는 것은 오직 구파와 칠가 모두가 공감할 만한 문제가 생겼을 때뿐이다.

“확실히, 마기를 숨긴 채 중원에서 난장을 피우는 마인이라면 주목할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무림맹을 만든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아예 원정을 갈 거라는 이야기가 있더군.”

“네? 원정이요? 마교를? 그러니까 천산에 있는 그 마교 본산을요?”

“그래, 천산 마교 원정.”

“그게 가능합니까?”

“글쎄, 그거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논의를 시작했겠지. 어른들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닐테니 말이야.”

* * *

마교를 제외한 강호의 세력비를 보자면 구대문파와 그 속가가 사 할. 칠대세가가 삼 할. 기타 독립적인 문파들이 일 할 오 푼. 그리고 낭인을 비롯한 연고 없는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로 일 할 오 푼 정도 된다.

마교의 경우는 너무 오랜 기간 숨죽여 있었던 터라 그 정확한 세력을 측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드러난 정보를 통해 추측하기로는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중간 즈음 된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이권을 따지는 구파 칠가와 달리 단일 문파가 그만한 힘을 가졌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려 두 배가 넘는 세력의 차이다. 힘이나 세력만으로 따지자면 또 정벌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세력의 크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물리적인 거리다.

마교의 본거지인 천산이 세외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저 먼 곳에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이번 태을검선의 장례에 곤륜의 운룡이 참가한 것에 크게 놀랐었다. 사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곤륜파가 있는 곤륜산맥에서 여기까지는 무려 팔천 리 길이다. 그것은 하루 여덟 시진씩 한 시진마다 말을 바꿔가며 쉬지 않고 말을 달린다고 해도 보름은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다. 보통 사람이 곤륜을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달 반은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헌데 천산은 그보다 더 멀다. 직선거리로 무려 일만 리. 길을 따라가면 일만 삼천리에 달한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로만 편성을 한다면 말을 달리는 속도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요. 게다가 말은 갈 수 없는 험지도 돌파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지 않겠소?”

제갈첨이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한 달 가깝게 그렇게 경공으로 달려서 몸 상태가 무사할 리 만무하잖습니까. 하물며 저희가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마교를 징벌하기 위해 가는 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두 달 정도에 걸쳐서 조금 쉬엄쉬엄 가면 해결 되는 일 아니요. 자꾸 그렇게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어깃장만 놓으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요.”

“이 일은 도장의 말씀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의욕만 앞세워서 될 일이 아닙니다.”

광혈마의 난동 직후로 회의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어디에서 모일지를 가지고 하루종일 논쟁하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넘어 마교를 징벌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해남검파의 대표로 참가한 파랑검 원환이 물었다.

“헌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의미가 있겠소? 어차피 다 사문의 어르신들이 결정해야 될 문제인 듯한데.”

“그건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의 말에 반박했다.

제갈첨. 그리고 화산의 대표로 참가한 홍매당주 능라나찰 소여향이었다.

“먼저 말씀하세요.”

소여향이 제갈첨에게 발언권을 양보했다.

제갈첨이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원대협. 사문의 어르신들이 모여서 결정을 내리려면 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자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서 그걸 작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니 저희는 마교의 징벌에 관해 예측되는 물자의 양. 필요한 인원. 그리고 그것들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등을 미리 논의해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맞아요. 원대협. 물론 어르신들의 한 마디에 저희의 논의가 무의미한 일이 될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건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거예요.”

각 문파들의 의견을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번 장례식에 별생각 없이 정말 순수하게 조문의 사절을 보낸 문파들이 문제였다. 평생 무공만 수련한 이들은 순진하여 벗겨 먹기 쉬운 상대였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너무 벗겨 먹어도 곤란한 상대이기도 했다.

어찌 됐건 이번 사건으로 마교에 대응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고, 너무 일방적으로 기우는 저울추는 그것을 깨트리기 딱 좋은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구파와 칠가가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었다.

탈속한 척 수염을 쓰다듬는 도인들도, 머리를 밀고 수양하는 중들도, 군자인 양 대범한 척 하는 속가의 무인들도. 모두 다 각자의 욕망이 존재했다. 누군가는 명예를, 누군가는 권위를, 누군가는 재산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제자들의 안위를.

제갈첨은 누구보다 그런 욕망을 파악하는데 빠른 눈치를 지닌 사내였다.

구파와 칠가. 무려 열여섯 개나 되는 문파의 의견들이 빠르게 정리되는 데는 분명히 이 사내의 공로가 매우 컸다.

물론 단순히 그것만으로 모든 것들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종남과 모용.

종남의 경우 참으로 많은 것들을 양보했다.

그들이 마교의 척살이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진정한 대협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태을검선을 잃은 그들의 분노가, 감히 본산에서 그 제자를 잃어버릴 뻔한 그들의 분노가 그만큼 거대했기 때문이다.

모용 역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내놓았다.

종남과는 조금 달랐다.

이미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무신 모용경은 모용세가의 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무신이 마교 정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한혈마 사백두. 물론 대식국에서 수입한 순혈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속도는 부족하지만, 지구력에서는 훨씬 뛰어납니다. 장거리를 달리기에는 이만한 말이 없지요. 거기에 건량 일만 근과 육포와 어포 삼천 근을 내놓겠습니다.”

한혈마 사백두와 식량.

은전으로 따진다면 팔만 냥가량. 화산의 일 년 예산을 넘어선다. 요녕성의 왕이나 다름없는 모용세가이기에 가능한 지원액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입니다만 태상가주님께서 직접 참가하시겠다고 합니다.”

“무신님께서요?”

“상대는 마교입니다. 팔대······, 아니 이제 칠대로군요. 하여간 마교의 제사장들을 상대하려면 그만한 고수가 나서야지요.”

마교의 제사장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경지에 오른 무인뿐이다.

결국 모용 세가의 말은 각 문파 비장의 고수들이 모두 이번 원정에 참가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종남에서의 첫 번째 회합이 끝났다.

“그렇다면 석 달 뒤, 무한에서.”

“석 달 뒤 무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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