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신검합일(身劍合一)
그렇기에 그것은 검인 동시에 백운호였으며 백운호인 동시에 검이었다.
-쾅!!!
이성을 잃은 마인의 본능이 감지하는 영역의 바깥.
백운호의 검이 그의 몸을 두들겼다.
신검합일(7)
사람과 검의 경계가 흐릿했다.
권신 청무는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산봉우리의 높은 곳에 도달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서 있는 곳이 산의 정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전혀 다른 길로 산을 오르는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무신 모용경 역시 정상에 서지는 못 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가 선 위치에서는 그래도 백운호가 해낸 것이 무엇인지가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 중 그것에 더 감탄한 것은 무신 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저 나이에 검을 어렴풋이 깨우친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신검합일이라고?”
“신검합일?”
오직 자신의 신체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오직 스스로에게만 파고들고 또 파고들 뿐인 저 무식한 권신은 모른다.
‘자신’으로 한정된 우주를 확장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상승의 초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쾅!!
백운호의 검이 마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마치 육중한 둔기에라도 맞은 것처럼 살거죽이 터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마기로 충만한 강철 같은 근육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인이 휘두른 왼팔이 백운호의 몸을 노렸다.
이성을 잃은 괴물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
아니다. 경시할 수 없다. 단순히 속도와 위력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뇌의 절반이 녹아내려 이성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괴물이지만 수십 년 몸에 익힌 무공은 이미 그의 본능에 새겨졌다.
그 본능적인 동작 하나하나에 경지를 넘어선 무학의 이치가 담겨 있다.
백운호의 몸이 휘두른 검을 중심으로 훌쩍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검이 운호를 휘두르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움직임이다. 검의 무게는 기껏해야 한근 반 남짓. 헌데 그런 검이 백삼십근은 족히 되는 운호를 휘두르다니.
하지만 신검합일의 지고한 경지가 그 말이 안 되는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
강아현과 종화가 숨을 골랐다. -울컥, 목을 타고 넘어오는 비릿한 핏물을 뱉어냈다. 서둘러 품에 넣고 다니는 요상단을 꺼내 씹어 삼켰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지급의 마인이라면 대지의 기운을 강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때도 좋지 않았다. 하필 전신의 진기를 폭발시키는 순간이라니.
그녀들의 시선이 백운호와 광혈마에게 고정됐다.
놀라운 모습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 자신들도 많은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백운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것 이상이다.
하지만 부족했다.
상대가 너무 강하다. 절정을 넘어선 마인이다. 그녀들은 절정의 고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상대가 이성을 잃어버린 마인이라고 해도 그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일류까지가 인간의 한계라면 절정은 그 한계 너머에 존재한다.
그녀들이 인지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때때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공방이 이어졌다. 분명 더 많은 공격을 가하는 쪽은 운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위태해 보이는 쪽 역시 운호였다.
꽉 깨문 이빨 사이로 붉은 핏물이 보였다. 마인의 공격이 스친 부위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군데군데 찢어져 핏물이 흘렀다.
당연했다. 그의 검인 이치의 편린에 도달했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도와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지금 이런 몸으로 끼어드는 것은 방해가 될 뿐이다. 자욱한 마기가 그녀들의 조식을 방해했다.
‘이대로라면······.’
그것은 백운호에게도 실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검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지금 백운호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것인지 아니면 검이 백운호가 되어 그를 휘두르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운호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검선이 발휘하던 신묘한 무공의 정체다. 하지만 저 마인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더 깊숙이. 더 완벽하게 하나가 돼야 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이 검이 되어 무한이 돼야 한다.
운호의 존재감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만큼 검의 존재감이 또렷해진다. 그렇게 검과 운호가 더욱더 하나로 이어졌다.
그렇게 그 순간 운호는 무한한 가능성의 일부가 됐다.
분명 운호의 몸을 관통한 것 같았던 광혈마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운호의 검이, 아니 어쩌면 운호가 광혈마의 왼쪽 허벅지를 그었다.
-서걱
광혈마가 놀라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러났다. 허벅지 근육이 크게 쩍 벌어졌다. 막대한 마기가 출혈을 억제했지만 손상된 근육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광혈마가 바라보는 세상에 두둥실 검이 한 자루 떠올랐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검이다. 그를 자극하는 선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새겨진 명령이 강하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저 검을 부러트려라!!
광혈마공이 또 한 번 폭발했다.
태을검선을 상대하던 그때만큼, 아니 어쩌면 그때 이상으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진원이 불타올랐다. 지급에 다다른 마인의 진원이다. 그것은 가히 마단(魔丹)이라 부를 만하다.
권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에는 무신이 그를 가로막았다.
“아직. 조금만 더 지켜보지.”
“위험하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화산의 무공은 다르네.”
“정확히는 자네가 익힌 무공은 다른 거겠지. 저 아이의 무공은 그와 다르네.”
기종의 무공이 일 년 일 년 나이테를 둘러 가는 나무와 같다면 검종의 무공은 일순간의 탈각과 같다.
“그래도 저건 너무 위험해.”
“지금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면 빠르건 늦건 모두 다 경험했건 일이야. 자네와 거지, 땡중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이제 종남의 청정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지간의 기운이 온통 검붉은 악의로 들끓었다. 종남에 있던 다른 고수들 역시 그 마기를 느꼈다.
“이건?”
“맙소사!!”
한 사람이 풀어놓은 것이라 믿기 힘든 그 엄청난 악의의 홍수가 자신을 수습하려던 종화와 강아현을 휩쓸었다.
운호 역시 그에 대항하기 위해 한층 더 깊숙하게 자신을 잊었다.
화산의 검이 선명하게 빛났다.
“이제 정말 안 되겠네. 이러다 큰일이 나겠어.”
권신은 저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저 마인 앞에 선 것은 스스로 검으로 대도를 걷겠노라 당돌하게 외치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저 검이 그 소년을 휘두르고 있었다.
주와 객이 전도됐다.
그렇기에 저것은 결코 무문(無門)이 아니었다.
무신이 혀를 찼다.
멍청한 친구 같으니. 저것이야말로 도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이거늘.
한 걸음.
권신이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한 걸음.
이제 검과 하나가 되기에 딱 한 걸음을 앞둔 바로 그때.
-깨달음 하나 얻었다고 실전에서 그렇게 무턱대고 시도하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기 힘들 거다.
어째서였을까?
백운호의 머릿속에 깨달음을 통해 무언가를 이룩할 때마다 자신을 꾸짖던 증무 태사조의 말이 떠올랐다.
들끓는 악의로 무장한 마인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체 증무 태사조가 알려준 자운검의 검리는 어디에 있으며, 태을검선은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그런 것을 보여줬을까?
자운검이 추구하는 철학은 나와 검의 경계를 허무는 것일까?
다시 한번 태을검선이 휘둘렀던 무한을 떠올렸다.
그 노인은 과연 검과 하나가 되어 그 무한에 도달했었나?
아니다.
지팡이는 검선을 휘두르지 않았다. 또한 지팡이는 검선을 타지 않았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은 검선이었으며, 지팡이에 탄 것이 검선이었다.
그렇기에 검선은 무한이 된 것이 아니라, 무한을 휘둘렀었다.
백운호가 검을 휘둘렀다.
무한에 한없이 가까워졌던 한 자루의 검은 다시 무한을 휘두르려는 인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것이 옳다. 또한, 그렇기에 부족했다.
그러나 괜찮았다. 검과 하나가 되려던 인간에게는 없던 것이 검을 수족처럼 부리는 인간에게는 존재했다. 백운호의 감각이 주변을 훑었다.
“지금이야!!”
백운호가 소리쳤다.
그녀들이 아니다.
강아현과 종화는 넘쳐나는 마기의 폭풍 속에서 여전히 스스로를 추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최초, 마인의 일격에 나가떨어졌던 남궁가의 검이 있었다.
속가의 무공은 청정도량의 무공과는 다르다. 창천을 이야기하고 천뢰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혼탁한 세상의 창천이며 천뢰다. 자신을 완벽하게 수습한 채 조용히 기회를 노리던 남궁의 금빛 천뢰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쾅!!
제왕검형(帝王劍形)
천뢰(天雷)
고작 일격.
하지만 그 일격만큼은 절정 고수의 그것에 비길만했다.
광혈마의 마기가 뭉텅 깎여나갔다. 마치 귀찮은 파리를 쫓는 것처럼 휘두른 팔에 남궁철이 또다시 튕겨 나갔다.
백운호가 검을 휘둘렀다.
자운검은 빽빽하며 복잡한 초식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화산의 선인들이 막강한 내공으로 그것을 생략한 것이 이해갈만큼 쓸데없이 방대하며 정교한 초식들이었다.
그것은 백운호만큼 형을 이해할 수 있는 천재가 아니라면 엄두조차 나지 않는 기법들이었다. 실제로 화산의 삼대 제자들 가운데 백운호 다음가는 재능이라 볼 수 있는 강아현도, 그의 사부인 공야찬조차도 이것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정해진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파탄이 생기는 그 갑갑한 초식들. 하지만 운호는 이미 매농검을 통하여 미시적 비효율이 거시적 효율로 연결되는 역설을 알고 있었다.
자운검은 그 복잡하고 방대하며 빽빽한 규칙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정한 자유였다.
그래, 이 길이다.
검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잊는 것이 아닌, 이 방대하고 빽빽한 규칙으로 검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 더 어렵고 귀찮은 길이지만, 그렇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생명을 불태우는 마인의 공격이 매서웠다.
자유를 얻은 운호의 검이 그의 엄밀한 계산 아래 움직였다. 내줄 것을 내줬다. 운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권신이 웃었다.
그래, 화산의 무학이라면 마땅히 저러해야 한다. 감히 검으로 대도를 걷겠노라 당당히 주장하려면 저 정도는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
끼어들지 않았다.
본능에 몸을 맞긴 저 괴물은 모르겠지만 권신의 눈에는 저 싸움의 결과가 뻔히 보였다. 운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는 속도보다 저 여아들이 회복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호는 아직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 것은 종화였다.
백운호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아현이 다시 합류했다. 팽팽한 싸움.
남궁철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아이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나다. 여기서 내가 합류한다면 이길 수 있다. 바닥난 진기를 박박 긁어모았다.
이전에 비하자면 채 절반도 되지 못하는 제왕의 천뢰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저 마인에게 타격을 주기 힘들다.
그가 깊숙하게 호흡했다.
제왕진결 특유의 과장된 기세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절정에 다다르지 못했음에도 절정고수에 준하는 그 강렬한 기세가 마인의 감각을 두들겼다.
그것은 그야말로 일순간의 틈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포착하던 운호의 감각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비대한 인지능력은 이미 이런 미래조차도 목격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운호가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극에 다다른 합리성이었으며 비효율과 효율이 혼재된 역설이었으며 무한하기를 희망하는 자유였다.
그리고 그 모든 깨달음은 운호의 것이었기에 그 검은 오롯하게 운호라는 인간의 일부였다.
-서걱
마인의 강철같은 허리가 절반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