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53화 (53/288)

53화

신검합일(5)

종화는 조금도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의기소침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화산에서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운호, 그리고 아현과 검을 섞겠노라 선언했다.

“괜찮겠어?”

운호의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당연하지. 애도의 기간은 지난 며칠로 충분해. 언제까지 주저앉아서 징징 짜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태사조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나와 사부를 살리셨어.”

분명 태을 검선은 종남 전력의 3할 이상이다.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런 시대의 거인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 무게감과 압박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벽운 도사는, 그리고 태을 검선은 종화를 고작 그런 무게감과 압박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 할 만큼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사부님은 그리고 나는 더 큰 사람이 돼야만 해. 그게 태사조님의 희생에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외양은 몇 달 전보다 조금 여성스러워졌지만, 그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패배 앞에 주눅 들지 않는다. 저것이야말로 평생을 화산에게 패배했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태을 검선의 정신 그 자체이자 그가 그들에게 건넨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다만 곧바로 비무가 이뤄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태을검선의 장례가 치러지는 종남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구파와 칠대세가만이 아니었다. 태을검선은 팔십년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가 쌓아 올린 인연은 대문파에 국한되지 않는다. 종남 어디를 가건 보는 눈이 존재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구파와 칠대세가의 회합은 이어졌고, 후기지수들은 그 나름의 교류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종화가 있었다. 그녀는 소검후라는 이름으로 종남을 대표하는 후기지수였다. 운호와 아현 역시 그 사이에서 화산의 대표로 함께 했다.

남궁철은 여전히 재수가 없었지만 다른 모든 후기지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화산의 이름은 드높았고, 감히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구파와 칠대세가에도 많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강아현은 종남의 정기가 옥녀진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연신 투덜댔다. 애당초 포원공을 익혀 화산에서도 딱히 산의 정기가 돕는다는 느낌 따윈 받지 못했던 백운호에게는 배부른 투정이었다.

장례의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은 종남에 검선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하나둘씩 산을 내려갔다.

다만 구파와 칠대세가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회의에 강호 무림의 절대자 중 하나인 무신이 참석했음에도 그들의 의견은 쉽게 좁혀지지 못했다.

덕분에 약속했던 비무를 실행에 옮길 시간이 생겨났다.

“아직 멀었어?”

“이제 거의 다 왔어. 바로 저기야.”

비무가 이뤄진 곳은 태을 검선이 생전에 벽운이나 종화를 지도해주던 분지 한 가운데에 있는 공터였다. 종남 본산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은 주변이 빽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어지간히 큰 소란이 나더라도 주변에 소음이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백운호,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잠깐만요. 혹시 괜찮다면 내가 먼저 상대해보고 싶은데요.”

“네가?”

종화가 자신의 종남검을 톡톡 두들겼다. 지난번 화산에서 목검을 사용해 비무할 때와는 다르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운호야 괜찮지?”

“어, 나야 뭐 상관없어.”

백운호가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현이 검을 뽑아 들었다.

“뭐,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하지만 각오 단단히 해야할거야. 목검을 쓸 때와는 완전히 다를테니까.”

종화의 검이 움직였다.

-쾅!!

목검을 사용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위력.

이것이야 말로 사천의 삼대 문파를 제압하고 또래 최강자로 평가받던 무당의 유천까지 제압한 종남의 검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검 앞에서 강아현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고작 몇 달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강아현의 실력은 놀라울 만큼 발전해있었다. 무엇보다 자운검의 활용이 남달랐다. 본래 그녀가 자운검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옥녀진결 이단공이 필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강건해진 신체 능력으로 옥녀진결 일단공인 상태에서 자운검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신체 능력이 강건해진 것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그녀는 약 삼 주에 걸쳐 운호와 종화가 비무 하던 것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그녀는 백운호가 아니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흡수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가장 자주 사용하던 기법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덕분에 옥녀진결 이단공을 격발시키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무를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이 생긴 만큼, 마음에 여유가 늘어났다.

종화는 내심 이제 종남검을 들었으니 강아현 정도는 쉽게 제압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검을 섞은 이후 그런 마음을 버렸다. 화산에서의 지난 한 달. 그 길었던 비무에서 가장 크게 성장했던 것은 어쩌면 강아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화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열여섯.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강아현만이 아니었다. 권신과의 만남은 기연이었다. 권신은 그녀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인간의 ‘한계’라는 것 자체를 깨트렸다.

백운호가 아닌 강아현을 상대로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토록 이를 악물고 수련해온 그녀라면 이 검을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다.

순양의 진기가 한층 부드럽게 태을로 변환됐다.

그 가운데 진기의 소실은 6할 정도. 이전에 비한다면 훨씬 순탄한 변환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잠깐!!”

백운호가 소리쳤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남궁 공자.”

“남궁? 남궁철?”

“운호야 남궁 공자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이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수준 이상의 고수이거나 그에 특화된 누군가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철이?

백운호가 몸을 돌려 검을 뽑아들었다.

“나오시지 않는다면 부득이하게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와 수풀로 빽빽한 산림.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워어. 동생, 진정하라고. 그렇게 아무 때나 검을 뽑아 들어서야 품위가 떨어지잖아.”

“남궁 공자? 대체 어떻게?”

남궁철이었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그의 몸에서는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대던 것과 대조된다.

“품위라······. 그렇게 쥐새끼처럼 몰래 따라와 다른 사람들의 비무를 훔쳐보는 것이야말로 품위 떨어지는 짓 아닐까요?”

“어허, 쥐새끼라니. 나는 그냥 워낙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기에 걱정이 돼서······.”

운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이라니 참으로 비루한 변명이십니다.”

“아니, 변명이 아니라······.”

“걱정 따윈 해주실 필요 없으니 물러나 주시죠.”

“묘하게 공격적이네. 혹시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거야?”

“글쎄요, 남의 비무를 훔쳐본 사람에게 이 정도면 공격적이기는커녕 정중한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훔쳐보다니!! 지금 그 말이 나에 대한 모욕인 건 알고 있지?”

참으로 비루하다.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 인간이 이러하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잘못을 지적받으면 사과하기보다는 화를 낸다. 이런 류의 인간에게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통하는 것은 오직 권위뿐이다.

“후······, 그냥 칼이나 뽑으시죠.”

“뭐라고?”

“이대로 물러나실 생각 없잖습니까. 그러니 상대해드리겠습니다. 마침 위치도 딱 좋군요.”

남궁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후회할 텐데.”

강아현에게 정말 관심이 있어서이건, 혹은 다른 의도가 숨어있어서이건 상관없었다. 운호 입장에서는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주는 격이다.

검선과 함께 강호 최고의 검사로 손꼽히는 검왕의 무공이다. 또한 평소 주는 것 없이 미운 인간이다.

운호가 선수를 양보하지 않았다.

포원공의 진기가 풀려나온다.

충만한 내력과 단단한 마음 그리고 단련된 신체가 한 점을 지향했다.

검기(劍氣).

종화와의 비무에서 처음 사용했던 그것이 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원숙함을 품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압도적인 공격 앞에서 남궁철의 기세가 급변했다.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던 모습에서 평소의 그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 마치 진짜 절정 고수의 그것처럼!!

제왕검형(帝王劍形)

오직 남궁의 후계자에게만 전해지는 절정의 검술. 남궁철의 검에 금빛의 광채가 맺혔다. 그의 일 검이 백운호의 검을 향해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부술 정진 정명한 제왕의 검이었다.

* * *

광혈마 이염은 오랜 시간 자신을 다스리고 있었다. 자신의 몫으로 배급된 기선단을 씹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미 광혈마공을 폭발시킨 부작용으로 이성은 반쯤 날아간 이후였지만, 그의 머릿속 깊숙한 곳에 새겨진 명령만큼은 또렷했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그렇게 이성이 날아갔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 명령만을 되새기며 기다릴 수 있었다.

선기(仙氣)

가장 진하게 그 기운을 풍겨대던 늙은이는 이미 제사장이 처리했다. 남은 것은 흐릿하게 그것을 피워내는 어린 계집뿐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는 대업에 큰 지장을 줄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것을 고려할 이성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흐릿하던 선기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성이 남지 않은 마인이, 오직 목적을 향하여 짐승처럼 달려 나갔다.

* * *

찰나를 수십으로 쪼갠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에 울려퍼졌다.

-마인이다!!

서안에서 처음 마인을 목격했던 그때와 같았다. 증무 진인의 목소리다.

그 사이에도 남궁철의 검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경시할 수 없다. 저 검에 서린 위력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저것은 자운검과 비슷하지만, 그 효율 자체가 다른 검술이다. 지닌바 내공을 극한까지 뽑아내고 그것을 증폭시킨다.

운호의 감각이 주변을 훑었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운호가 본래 가진 감각과는 조금 달랐다.

저 멀리 하얗게 덧칠된 새까만 악의가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돌진해오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새하얀 덧칠이 벗겨질수록 그 속도는 더 빨라진다.

제왕의 검이 먼저일까, 아니면 저 악의가 먼저일까.

운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 뿐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두가지 모두다.

종화도, 아현이도 그리고 지금 검을 휘두르는 남궁철도 아무도 저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저것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운호 자신뿐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급박한 순간. 운호의 의식이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그 인지를 따라 마음이 움직였다. 기초적인 검기가 서려 있던 검이 그 마음을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검선과의 비무에서 발휘됐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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