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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52화 (52/288)
  • 52화

    신검합일(4)

    장례의 절차가 차곡차곡 진행됐다.

    북으로는 요녕의 모용세가부터 남으로는 남해 보타암까지. 수많은 문상객들이 종남을 찾았다.

    팔십 년.

    그래 무려 팔십 년이다.

    한 사람의 검객이 팔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인연은 적지 않았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권신이었다.

    자연재해를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기도는 그대로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새치 하나 보이지 않던 머리가 반쯤 허옇게 새어있다. 얼굴에는 피로감과 주름이 뚜렷하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역천검귀를 처단하면서 내상을 입었다더니 정말인 듯하군.”

    “화산에서 한시진만에 삼백리도 넘는 거리를 달려와서 역천검귀를 주살하셨다더군.”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권신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 천무십칠성 가운데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마교의 팔대제사장이 모두 무사했다면······. 상상만해도 정말 끔찍해.”

    “글쎄, 옛날 그 시절도 아니고. 지금에 와서는 고작 그 정도로 뭐 끔찍할 것도 없지. 당장 초절정의 숫자만 보더라도 중원 무림 쪽이 우위지 않나.”

    “멍청한 소리!! 단순히 숫자만 가지고 논할 게 아니야. 마공의 기괴막측함은 둘째치더라도 그 녀석들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어.”

    “풋, 대제사장이라니. 자네 설마 그런 헛소문을 진지하게 믿는 건가? 탈마(脫魔)라니.”

    “헛소문이라니!! 우리 증조부님께서 직접 목격했던 일일세.”

    “증조부님이라니······. 그래, 뭐 그때는 진짜 있었다고 치세나. 헌데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가. 상식적으로 좀 생각해보게. 그런 게 있다면 마교 놈들이 지금까지 근 백 년을 조용하게 있을 리 만무하지 않겠나. ”

    걸왕(乞王)과 대력(大力), 그리고 운룡(雲龍). 구파에 소속된 여섯의 천무십칠성 가운데 무려 세 사람이 검선의 장례에 참석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모용세가, 모용세가다!!”

    권신과 더불어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사내.

    요녕의 왕.

    벌써 30년 가까이 요녕 땅을 떠나지 않았던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 무신(武神) 모용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쯧쯧쯧, 멍청한 늙은이들 같으니. 고작 그깟 놈 하나 때문에 하나는 죽고, 하나는 그 모양이 돼?”

    무신 모용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내가 경지를 슬쩍 구경했다면서 까불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망할 늙은이가 다 늙어서 노망이 난 게지. 평생 동안 무식한 칼 들고 다녔으면 계속 들고 다녀야지 제 놈이 뭐라고 그깟 지팡이나 들고 다녀서는.”

    “······.”

    “무식하게 삼백 리를 달렸다며? 내공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그렇지 능공허도를 한 시진을 펼쳐대니 몸이 그렇게 상할 수밖에. 게다가 그런 몸으로 역천검귀를 쫓아갔다며? 쯧쯧쯧. 아쉽구먼. 잘하면 움직이는 걸로 장례 두 번을 퉁 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하늘이 무너져도 요녕 땅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이 굴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와서 악담인가.”

    “백 년이나 잠잠하던 놈들이 나타났는데, 삼십 년 숨어지내던 늙은이가 나타나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게다가 그 녀석들······. 마기를 숨겼다면서?”

    권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라. 그저 모종의 방법으로 잠시 기운을 감춘 것뿐일세. 전투에 들어서서는 본래의 마인 그대로였어.”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백 년 가깝게 잠잠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나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나?”

    무신이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요즘 젊은것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자니 영 불안하단 말이지. 당장 내 아들놈만 하더라도 이번 일을 별거 아닌 거로 치부해버리더군. 이게 다 마교가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탓이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큰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었지. 작은 할아버지들 가운데 사지가 멀쩡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었고. 천무십칠성? 강호제일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세? 웃기지 말게. 나는 이제야 간신히 할아버지의 무공을 따라잡았다네. 하면 자네는 어떤가? 백운 노조의 경지가 눈에 보이기는 하는가?”

    * * *

    칠대 세가의 지낭 제갈첨이 생각했다.

    대체 어째서 마교는 지금 이 시점에 움직인 것일까? 단순한 우연일까?

    그럴 리가. 세상에 거듭되는 우연은 없다.

    “규야, 잘 생각해봐라. 최근 삼 년 동안 마인과 관련되어 가장 크게 회자된 일이 뭐 뭐였지?”

    “최근 삼 년이라면······, 귀주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 두개랑 광서에서 있었던 흡혈마 건. 운남에서 점창의 청일도사가 채음마를 추살했던 일. 그리고 종남의 안방인 서안까지 침투했던 마인을 화산의 현종도사가 처리했던 건이 있었죠.”

    “그걸 십 년으로 늘린다면?”

    “당가와 청성에서 대대적으로 대읍현을 청소했던 일. 귀주에서 벽력괴가 동전 닷 문에 독음노조를 추살했던 일 그리고 감숙성 명사산 사건 정도 기억나네요.”

    “거기서 이상한 점 없어?”

    “이상한 점이요?”

    “마인들의 출몰지역 말이야. 귀주, 광서, 운남. 주로 십만 대산 근처잖아. 거기에 기껏해야 감숙 정도고.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섬서 지방에 마인들이 출몰을 했단 말이지. 그것도 마교의 팔대 제사장 중 하나인 역천귀검이 주력 부대중 하나인 도륜당을 이끌고 말이지.”

    “그거야 마기를 감출 수 있는 기법을 개발했기 때문이겠죠.”

    제갈첨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 멍청한 동생 놈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아니, 지금 그건 중요한 점이 아니야. 기술은 그냥 기술일 뿐이지.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기술을 사용한 대상이 대체 왜!! 하필 섬서성이고, 왜 하필 종남파냐는 거지.”

    “글쎄요······.”

    “규야, 잘 듣거라.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건이란 항상 복잡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사건들도 아주 간단하게 해석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어.”

    “해석하는 방법이요?”

    “그래, 해석하는 방법. 뭐 어려운 건 아니다. 그냥 그 사건의 결과를 보고 누가 어떤 이득을 얻었는지를 살펴보는 거야.”

    “이득이라면······. 설마?”

    제갈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멍청한 동생 놈이 이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은 것 같다.

    “그래, 종남이 세력을 펼치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화산의 알려지지 않은 고수와 그 제자가 서안에 숨어있던 마두를 제거했지.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야. 종남은 벽운 도사에게 강호행을 지시해. 그리고 강호를 떠돌던 벽운 도사는 화산에 올라 비무를 벌이지. 결과는? 놀라운 승리다. 이제 화산의 위기지. 그런데 하필 그때 공교롭게 그 알려지지 않았던 고수의 제자. 그러니까 서안탐마동이 벽운 도사의 제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단 말이지.”

    제갈규가 고개 저었다.

    “하지만 그거야 서안탐마동이 화산의 삼대 제자 가운데 가장 강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글쎄.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 헌데 벽운의 제자인 소검후가 뜻밖에도 엄청난 고수였단 말이지. 사천의 삼대 문파를 상대로 모조리 승리. 심지어 한 배분 위의 고수인 당갈염과는 동수를 이뤘지. 게다가 무당이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유천까지도 제압을 했어.”

    “그야 그렇지만, 서안탐마동도 그만한 고수일 수도 있으니······”

    “그래,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면 홍보를 해야지. 우리 아이가 그런 대단한 고수를 꺾었습니다!! 이렇게. 물론 화산은 소문을 내긴 냈어. 그런데 굉장히 소극적으로 소검후가 화산에서 패배했다는 이야기만 떠돌지, 그 고수가 서안탐마동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가 어떤 고수라는 사실도 전혀 홍보하지 않아. 오히려 그를 감춘다는 느낌이야. 그들이 대체 왜 그랬을까?”

    “글쎄요······. 그거야 그냥 서안탐마동이 화산의 윗선에 밉보인 게 아닐까요?”

    -딱!!

    “멍청한 소리 하기는. 이제 입문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삼대 제자가 대체 밉보일 일이 얼마나 있겠느냐? 게다가 아무리 밉보였다고 해도 그만한 재능이다. 화산이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밀어줘야지.”

    “그런가요?”

    “분명 화산에서는 그를 널리 알리지 못할만한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뭐 당장 그건 일단 미뤄두고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보자꾸나. 벽운도사와 소검후가 종남의 이름을 드높였다. 화산은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 그리자 공교롭게도 마교가 또 다시 빵!! 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확실히 듣고 보니 조금 공교롭긴 공교롭네요.”

    “조금? 화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마인이 나타나고 마교가 나타났다. 그것도 지금까지 마인이 나타나지 않았던 섬서성에!! 그리고 꼭 그 마인들을 제압하는 건 화산이다. 과연 이게 고작 ‘조금’ 공교로운 일일까? 게다가 권신 청무진인은 한 시진 만에 무려 ‘삼백 리’를 주파해서 종남의 검선이 치명상을 입은 ‘직후’에 나타났구나.”

    제갈규가 제갈첨의 말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하지만 형님의 그 말씀은 마교에서 검선이 나타날 걸 미리 짐작했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말 아닙니까. 태을검선이 마중을 나온 건 그냥 변덕이었잖아요.”

    “아니다. 내가 생각할 때 태을검선은 벽운도사와 소검후를 암중에서 따라다녔을 거다. 그리고 화산의 권신이라면 그걸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겠지.”

    “형님 그건 너무 음모론입니다.”

    “과연 그럴까?”

    대부분 사건의 범인은 그 사건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이다. 그리고 이번 마인 사태들은 쭉 화산에게 커다란 이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였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형님, 절대 안 됩니다. 지금 그거 너무 위험한 생각이에요.”

    “나도 안다. 내 생각 위험한 거.”

    “정말 공교로운 우연일거에요. 화산입니다. 화산. 마교가 지금처럼 위축되는 데 가장 커다란 공을 세웠던 화산이요.”

    “그래, 상대는 화산이지. 그런 공을 세우고 구파에서 탈퇴 당할 뻔 했던 화산.”

    “아, 형님!!”

    제갈첨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경솔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으니까. 일단은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다.”

    “중심에 있는 사람이요? 설마? 형님 안 됩니다. 절대 안되요!!”

    “이 멍청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권신은 당연히 안되지. 너 사람이 한 시진만에 삼백 리를. 그것도 제대로 된 관도도 아닌 아예 길 자체가 없는 산을 돌파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나도 그런 괴물과는 엮일 생각 자체가 없다. 내가 말하는 사람은 백운호다.”

    “백운호? 서안탐마동이요?”

    “그래, 뭐 이제 동(童)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색하긴 하다만. 어쨌거나 잠깐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확실히 수상한 인물이었다.”

    분명 백운호는 소검후를 상대로 승리했다.

    그리고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가 아닌 이상에서야 일정 수준의 내공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선심후수. 화산 무공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도가 너무 부족했다. 혹시나 해서 몸까지 살폈지만, 꽤 잘 단련됐다는 느낌뿐. 특별히 외공을 수련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짧은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 감추는 것이 있다.

    “그래서요? 서안탐마동을 지근 거리에서 감시하시겠다고요? 형님, 형님 연세가 벌써 이립입니다. 아직 약관도 안 된 애송이랑 어울리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에요.”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다 적임자가 있으니까.”

    “자, 잠깐만요. 설마 형님 저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딱!!

    또 한 번, 제갈첨의 주먹이 동생의 머리통을 두들겼다.

    “멍청하기는. 너나, 나나 도긴개긴 아니냐. 그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인물을 옆에 붙여뒀다.”

    “훨씬 자연스러운 인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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