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신검합일(3)
작은 동굴.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아직이다. 괴물은 여전히 주변에 있다. 그렇기에 지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개죽음이다. 어차피 죽음은 확정적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그 죽음을 가치 있는데 사용하겠다. 그리하여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
짐승의 이름은 광혈마(狂血魔) 이염. 마교 도륜당의 당주이자 지(地)급의 마존이었다.
* * *
남궁 세가는 당나라 시절부터 무려 칠백 년을 내려온 명문이다. 오대십국을 거쳐 송의 건국에도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으며 특히 그 영향력이 강해졌던 남송 시절에는 송나라 국가 예산의 1할을 좌우할 만큼 압도적인 부를 자랑했었다.
이후 원나라를 거치며 그 세력이 크게 축소되긴 했지만, 현재까지도 무림 최고의 명문가를 뽑으라면 첫손에 꼽히는 집안이었다.
칠백 년.
사람은 그 형질을 조금씩 후손에게 물려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돈과 권력은 인재를 부른다. 미인, 기재, 영웅. 시대를 풍미할만한 사람들이 꾸준히 남궁가와 피를 섞었다. 그 세월이 무려 칠백 년이었다.
구대 문파는 혈연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한다. 하지만 칠대세가는 다르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널리 인재를 구하는 구파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 내려오는 형질이, 그리고 교육이 매우 수준 높은 인재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적게는 삼백 년. 길게는 천 년을 내려온 칠대 세가들의 저력이다.
그리고 남궁철은 이번 세대. 남궁의 핏줄을 가장 진하게 타고 났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팔 척에 이르는 커다란 키. 주먹코로 보일 만큼 큰 코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보기 드문 미남이다. 무엇보다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 지금까지 봤던 무인들과는 그 결이 달랐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기세를 감추려는 의도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느껴지는 기세로만 보자면 절대 또래의 수준이 아니다.
백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절정?’
분명 듣기로는 약관까지 아직 1년이나 남았다고 알고 있었다. 백운호 자신과 고작 세 살 차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게 가능하다고? 약관도 채 되기 전에 절정이라니.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백운호가 남궁철의 움직임을 훑었다.
물론 전력으로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것이 아니기에 정확히 추측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통 고수는 평상시의 사소한 움직임 자체도 다르다. 특히 절정의 고수는 거의 모든 동작에 자신이 익힌 무공이 스며든다.
‘정말 절정인가?’
그를 보자마자 놀란 것은 강아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래, 상대는 남궁이다. 저런 기도를 보이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강아현이 그에게 마주 인사했다.
“화산의 강아현이라고 해요.”
“아, 강 소저!!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화산 옥녀봉에는 선녀가 산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군요.”
“그 이야기, 이십 년 전 이야기 아닌가요?”
“하하,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지금 제 눈앞에 이렇게 선녀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백운호가 눈썹을 꿈틀했다. 물론 강아현이 좀 예쁘기는 하지만, 선녀라니. 아니, 이십 년 전은커녕 이백 년 전에도 안 통했을 것 같은 느끼한 말이다.
하지만 남궁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강아현이 슬쩍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이상하게 거슬린다.
“아, 그러고보니 옆에 소협은?”
“백운호라고 합니다.”
“백 소협?”
남궁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그렇다면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겠지. 남궁철이 자연스럽게 강아현 쪽으로 몸을 십오도 정도 틀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미녀다. 무엇보다 화산 옥녀봉의 후계자라면 격에 맞는 상대이기도 하다.
가벼운 신변잡기가 오고갔다.
남궁철은 사교적인 대화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별것 아닌 주제로 상당히 긴 시간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하, 저는 역시 황산모봉이 좋더군요. 제가 나고 자란 곳의 차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요. 혹시 백 소협은 특별히 즐기는 차가 있나? 아차차, 내가 말을 놔도 괜찮겠지? 이래 봬도 내가 삼 년은 형이니 말이야. 그나저나 조실부모하고 힘들게 저자에서 자라다니. 이 형이 참으로 안타깝구만. 그래도 외양만 봐서는 워낙에 명가의 자제로 보이니 이제 교양만 쌓는다면 아무도 출신이 그렇게 천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할걸세.”
하지만 그의 화법에는 참으로 고약한 구석이 있었다.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면서도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래서야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속 좁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화산도 참으로 대단하군. 기회의 문이 보통 넓은 것이 아니야. 보통은 속가의 추천을 받은 자들만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운데, 이러니 화산이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밖에. 나도 훗날 가주 자리에 오르면 문호를 조금은 더 개방하는 것을 고려해봐야할 것 같구만. 하하하하하.”
강아현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백운호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떠드는지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가 신경을 쏟는 것은 남궁철이 보여주는 저 특이한 기도였다.
대체 뭘까.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다. 이건 남궁 세가 무공의 특성일까? 아니면 남궁철이라는 개인의 특성일까?
바로 그때였다.
문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소검후 아니야?”
“소검후? 소검후라면 소문난 추녀 아니야? 그런데 저 여자는 추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소검후 맞는 것 같은데?”
백운호가 고개를 돌려 소란이 시작되는 방향을 바라봤다.
목 끝에서 단정하게 정돈된 짧은 머리. 엉망진창 쥐 파먹은 것 같던 더벅머리가 그렇게 된 것만으로도 인상이 크게 변했다. 하지만 고집으로 가득한 반짝이는 눈동자만큼은 그대로다.
종화였다.
그녀가 운호를 향해 달려왔다.
“백운호. 왔구나.”
사람들의 시선이 운호와 종화에게 모여들었다.
종화가 놀라운 활약을 보일 때마다 화산의 제자가 그녀를 꺾었다는 사실 자체는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백운호라는 이름 자체는 퍼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애당초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 자체가 화산에서 노력을 한 덕분이었고, 이름이 퍼지지 않은 것은 그런 소문을 담당하는 외당의 당주가 재무각주의 눈치를 크게 보는 굉명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정도라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저 녀석이 그 소검후를 꺾었다는 그 녀석인가?”
“확실히 화산이라면······. 근데 아무리 그래도 소검후가 자길 꺾은 사람이랑 저렇게 친하게 지낸다고?”
“그야 그럴 수도 있지. 듣자 하니 소검후를 구한 것도 화산의 권신이었다는데.”
별생각 없는 사람들은 운호와 종화가 친하게 안부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을 보고 그저 두 사람이 친분이 있구나. 정도를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들은 그 이상을 생각했다.
‘이거 설마?’
‘종남과 화산. 본래라면 불가능하지만 지금이라면?’
‘근데 서로 주고받을 게 없잖아.’
‘주고 받을 게 없기는. 종남이야 서안 정도만 되찾으면 그만이고, 화산은 서안을 내주는 대신 섬서 너머를 노릴 수 있지. 이번 일로 두 문파의 체급 자체가 달라졌잖아.’
‘하긴, 태을검선이 없는 종남이라면 자기 안마당만 지킨다고 해도 감지덕지 기는 하지.’
물론 당사자들은 서로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기 바빴다.
더 커졌다.
성장기에 단순히 키만 훌쩍 자라난 것이 아니다. 몸의 균형 역시 흐트러짐 없이 자라났다. 정확한 것을 검을 겨뤄봐야 알겠지만, 종화 자신이 강해지는 동안 저 녀석 역시 놀고있지만은 않았음이 확실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더벅머리가 단정해진 것에 눈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운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몸의 균형. 그리고 헤어지기 전과 비교해 확연하게 발달한 전완과 완요골근의 크기였다.
“이야기는 좀 들었어. 몸은 좀 괜찮아?”
종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소검후의 검기가 강호의 일절이라더니. 소문이 실제만 못한 것 같습니다.”
한참 강아현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궁철이 은근슬쩍 종화에게 다가왔다. 종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하하, 저는 남궁세가의 남궁철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누가 그걸 물었어? 지금 운호랑 이야기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끼어든 거냐는 소리잖아.”
강아현이 피식 웃었다.
머리는 조금 여자아이답게 변했지만, 그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남궁철이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며 답했다.
“소검후, 상심이 크신 것은 알겠지만, 말씀이 너무 공격적인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지요. ‘남궁세가’의 남궁철입니다.”
“다시 말 안 해도 알아먹었어. 남궁세가의 남궁철. 지금 운호랑 이야기해야 하니까 좀 빠져줘. 어이, 강아현. 이 남자 너한테 관심 많은 것 같은데. 좀 데리고 가봐.”
강아현이 얼굴에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종화라고 해도 설마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 줄이야. 대체 종남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종화를 저렇게 키운 것일까?
“소검후. 지금 저에게 모욕을 주시는 겁니까?”
“모욕은 그쪽이 하는 짓이 모욕이고.”
그녀는 고수다.
비록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 대인원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의 목소리 정도는 저 멀리서도 구분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멀리서 그들의 대화를 충분할 정도로 들을 수 있었다.
화가 났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운호는 자신을 이긴 유일한 녀석이다. 헌데 이 느끼한 녀석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백운호에게 모욕을 줬다.
그래, 지금 종화 자신이 화난 이유는 그녀를 이긴 유일한 녀석이 이런 변변찮은 녀석에게 무시를 당했기 때문이다.
운호가 슬쩍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남궁 소협 그만하시지요. 불과 며칠 전 좋지 않은 일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과연 남궁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 모여든 시선에 남궁철이 애써 호탕하게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그래. 운호 자네 말이 맞아. 안 그래도 마음이 답답할 터인데. 아쉽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 물러나도록 하지. 아현 소저. 마침 제가 특품의 황산모봉을 조금 들고 왔는데, 저쪽 경치 좋은 정자에서 한 잔 어떠십니까?”
“죄송해요. 오늘은 저도 종소저와 나눌 이야기가 조금 있어서요.”
강아현이 우아하게 남궁철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거절당해서일까? 남궁철의 얼굴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긴, 교분을 나눈 친구에게 일이 생겼는데, 응당 그것을 먼저 하셔야겠지요. 그렇다면 차는 다음 기회에 나누도록 하시죠.”
“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돌아선 남궁철이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