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태을검선(3)
“그야 목숨에 걱정이 없이 검선 어르신과 같은 고수와 검을 맞댈 기회는 흔치 않은 기연 아니겠습니까.”
뻔뻔하기까지 한 운호의 대답에 검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닌 바 재능도 다시 보기 힘들 만큼 대단하지만, 성정 역시 그에 못지않다. 대체 어떻게 화산에서 이런 녀석이 나온 것일까. 아니, 어쩌면 화산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탐이 났다.
“그 흔치 않은 기회, 너만 원한다면 자주 만날 수도 있는데. 어떠냐? 혹시 관심 있느냐?”
“그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뜻밖의 반응.
단호한 거절이 아닌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그래, 물론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종남의 검선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태을검선(太乙劍仙)
물론 화산이라는 외부의 압도적인 상대가 있어서라고는 하지만, 그는 기천 년을 내려온 종남의 전통 자체를 바꾼 남자다.
그의 대답에 운호가 답했다.
“네, 바로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라고?”
무언가 이야기가 헛돈다는 느낌. 설마 이 녀석?
“종남을 대표하시는 분이 화산을 오신다는 건 아무래도······.”
“허허, 뭐라고?”
뻔뻔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종남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이렇게 받아쳐 버리다니.
건방지고 무례하다.
하지만 애초에 무례했던 것은 검선 본인부터다. 무엇보다 검선은 ‘도인’이라기 보다는 ‘무인’이었다. 무인이라면 응당 저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마음에 든다.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천재의 존재를 믿는다. 어떻게 보자면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평생이다. 그 어떤 시대의 천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화산? 그래, 화산은 분명 대단하지. 아마도 완성된 화산의 검술은 매우 아름다울 것이 분명하다.”
단순히 이야기로 전해지는 화산의 검술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평생을 검에 바친 검선이기에 알 수 있다. 지금은 비록 그 흔적만이 남았다지만, 화산의 검이 향하는 그 목적지는 실로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초석은 흙에 묻혔고, 기둥은 무너졌으며 서까래는 이미 썩어 사라졌다. 흔적은 남았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어려운 여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 자신을 생각해보아라. 언제나 가장 멀리 보는 것은 시대의 거인이 아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이가 가장 멀리 본다.”
화산의 팔대 검술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것은 오직 셋뿐이다. 비급은 남았다지만 익히는 이가 없어 유실된 검술이 무려 셋이고, 그나마 두 개는 비급조차 온전하지 않다.
운호가 되물었다.
“하면 검선께서 만약 70년 전, 저희 백운 태사조님께 같은 제안을 들으셨다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 것 같습니까? 또한, 검선께서는 스스로 거인이 된 것을 후회하십니까?”
그럴 리가.
물론 더 멀리 보는 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누군가다. 하지만 시대의 천재라면,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누군가가 되기 보다는 그 스스로 거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검선이 웃었다.
“참으로 맹랑한 녀석이로구나. 그래, 좋다. 내 더는 권하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종남의 검선이 손에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세상의 법칙 대로라면 그 지팡이는 당연히 땅으로 떨어져야 하거늘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지팡이를 잡고 있는 것처럼 지팡이는 허공에 둥둥 떠올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그 형상은 권신이 보여줬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그것과 다르다.
늙은 검선의 두 발이 지팡이를 밟고 올라섰다.
맙소사, 어검비행술(御劍飛行術). 아니, 이 경우는 검이 아닌 지팡이이니 어장비행술(御杖飛行術)이라고 해야 하나? 먼 옛날 이미 우화등선한 종남의 시조인 순양자(純陽子) 여동빈이 구사했다고 전해지는 그야말로 신선들이나 사용할법한 기술이었다.
운호가 검선이 지팡이를 내미는 순간마다 느꼈던 그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 지팡이에 탄 것이 검선인지, 아니면 저 지팡이 자체가 검선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
그 순간, 운호는 깨달았다. 저것은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랬다. 이것은 검선이 마지막까지 베푸는 가르침이었다.
“아······.”
지팡이를 탄 검선이 한순간 점이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 운호는 검선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고 느꼈다.
운호가 이미 사라진 종남의 검선을 향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 * *
“아직 경지까지 한참 남은 것이 허세만 늘어서는. 하여간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원래 아무것도 없는 놈들이 항상 있는 척하는 법이다. 아니, 검을 타고 날긴 왜 날아? 튼튼한 두 다리 뒀다가 뭐 하려고?”
그날 밤.
증무 진인이 연신 투덜댔다.
“게다가 잘 크고 있는 녀석에게 종남은 무슨. 운호야, 혹시라도 종남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 된다. 그 있어 보이는 척하는 녀석이랑 그 종화라는 계집애가 별종인 거다. 종남파 놈들은 그야말로 말이라는 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 벽창호들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종남에 갈 생각 같은 거 없습니다.”
“크흠, 아니, 거 걱정은 누가 걱정을 한다고 그러는 게냐. 그 녀석이랑 나를 비교하면 당연히 내 쪽이 훌륭한 선생인 것을.”
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그런가요? 사실 태사조님은 등선을 하셨다고는 하시는데, 제가 뭔가 본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공과격인지 뭔지에 얽매여서 제대로 알려주시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알려주는 것이 별로 없다니!! 내가 얼마나 계획적으로 움직······. 으악!! 이 망할 공과격!!”
증무진인이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여간 너는 절대 그렇게 경지 맛 좀 봤다고 허세 부리면 안 된다. 그렇게 경지 맛 좀 보면 자기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는데, 고맘때가 딱 죽기 좋은 때다.”
보통 사람의 평균 수명이 쉰 살이 채 못 된다. 환갑만 되도 장수했다고 하는 세상에서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여든쯤 되면 슬슬 천수를 다할 나이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보다 훨씬 더 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그때의 그 느낌.’
검선과 검을 섞을 당시에 느꼈던 마지막 그 감각. 그것을 다시 체험하고 싶었다. 사실, 그런 감각이라는 것이 한 번 느꼈다고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년 단위의 수련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몽원경의 공과격을 활용한 수련은 매우 효과적이다. 생과 죽음의 경계를 강제로 체험하면서 그 때의 감각을 수십 번 되살린다. 종화와의 비무에서 깨달았던 그 검기(劍氣) 역시도 몽원경의 수련을 통해 체화시키지 못했더라면 다시 활용하기까지 매우 큰 고생을 했을 것이다.
자운검의 그것은 종남의 검선이 보여주던 그 기이한 감각들과 분명 관련이 있다. 그때의 그 감각을 조금만 더 느껴본다면 납매검이나 매농검이 그랬던 것처럼 자운검 역시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증무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네?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때 그 수련 다시 시켜달라고 할 생각이잖느냐. 다시 말하지만 안된다.”
“하지만······.”
“공과격이 부족하다.”
공과격의 부족?
분명 지금까지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때면 항상 공과격이 따라왔다. 게다가 오늘도 잡담을 하기에 분명 ‘공과격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헌데 부족하다고?
어렴풋이 공과격이라는 것이 깨달음이나 성취가 아닌 다른 무언가와 연관돼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말로 확실해졌다.
‘아니, 잠깐만. 아니지. 태사조님의 기준에서 공과격을 더 요긴하게 사용해야 하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봐야 공과격 아깝다는 대답밖에 듣지 못할 테니까. 그렇기에 우선은 지금에 집중했다.
단 한 번의 기회.
증무 진인은 언제나 최고의 비무 상대다. 아니, 이건 단순한 비무 수준이 아니다. 실전이다. 보통의 비무에서 이처럼 흉험하게 목숨을 걸 수는 없다.
낮에 있었던 검선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 순간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집중했다. 마치 내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내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검을 움직이는 그 감각.
-푸욱
하지만 그 감각을 느껴보기도 전에 증무 진인의 검이 운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쯧쯧쯧, 하여간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이······. 깨달음? 그래 좋다. 하지만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어설프게 그런 거 쓰려다가는 골로 가기 딱 좋다고.”
딱 죽기 직전까지 아프다.
하지만 괜찮다. 이곳은 그저 꿈일 뿐이다.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쌩쌩해진다.
“그러니까 여기서 수련하는 거잖습니까. 현실에서 어설프게 써먹다가 골로 가지 않으려고.”
“수련은 혼자 검을 휘두르는 게 수련이고. 비무는 실전처럼. 실전은 비무처럼.”
그렇게 언제나처럼 비무나 대련에서 어설픈 깨달음을 시험해보지 말라는 증무 태사조의 잔소리와 함께 오늘의 기회가 사라졌다.
* * *
매일같이 찾아오던 종화가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특별한 근거는 없었지만, 검선이 자신을 찾아온 것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
“오래간만이야.”
“일주일이나 대체······, 뭐, 뭐에요? 그 멍들은?”
강아현이 깜짝 놀랐다.
일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종화의 몸에는 울긋불긋한 멍들이 가득했다. 더벅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무공 수련 좀 열심히 해서 말이야. 덕분에 오늘도 너희들이랑 비무를 할 몸 상태가 아니야.”
“그래, 그렇게 보이네.”
어쩌면 운호 자신에게 검선이 찾아왔던 것처럼, 녀석에게는 권신 청무 태사조님이라도 찾아갔던 것일까?
녀석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비무 할 상태도 아니라면서 어쩐 일로 찾아온 거에요?”
“그냥······, 그 동안 지겹게 얼굴 봤는데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건 좀 그래서.”
“떠난다고요?”
“어, 사부 몸도 이제 다 회복됐으니까. 젠장, 이제 슬슬 감이 오는 게,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
운호가 피식 웃었다.
“꿈은 밤에 자면서 꿔야지. 왜 훤한 백주대낮에 꿈을 꾸고 있는 거야.”
“하여간. 밉살맞다니까.”
“종남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강아현의 질문에 종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들를 곳이 몇 군데 더 남았어.”
그간 미운 정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매일같이 물고 뜯기 바쁘던 강아현이 종화에게 타박상에 좋은 약이라며 고약 하나를 내밀었다. 포장부터 향까지. 딱 봐도 고급품이다.
“고마워. 잘 쓸게. 난 뭐 줄 건 없고. 나중에 종남에 오게 되면 꼭 나를 찾아오라고. 그땐 내가 진짜 종남검이 뭔지를 확실히 보여줄 테니까.”
그렇게 벽운과 종화가 떠나갔다.
두 사람 모두 상태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종남의 검선이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또다시 몇 달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 순간 강아현은 뭔가를 깨닫기라도 했는지 갑작스럽게 폐관에 들어갔다. 공야찬은 여전히 바빴으며 검선의 가르침을 통해 느꼈던 그 감각은 여전히 잡힐 듯 말 듯 운호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사실이다. 태을검선이 귀천했다.”
천무십칠성.
현 강호의 절대자 가운데 하나의 사망 소식이 강호를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