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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45화 (45/288)
  • 45화

    선단(2)

    “자소단. 그리고 네 몸.”

    “자소단이랑 제 몸이요?”

    운호 역시 자소단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자소단은 꼭 필요한 자원이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다. 투자를 해두고 육 년을 지켜보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헌데 몸이라니?

    “아,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서 말이야.”

    “내공이 쌓이지 않는 체질이요?”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헌데 굳이 그게 연구할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이지. 사실 내가 봤을 때 너는 청무진인, 그리고 준형이와 함께 화산파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 하나야.”

    뜻밖의 이야기. 백운호가 되물었다.

    “제가 그 두 사람과 함께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 하나라고요? 그거 혹시 조금만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

    강진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언제나 ‘보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으음······, 넌 바보, 그러니까 저지능자의 반대에 선 존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바보의 극단이라면······. 당연히 천재겠죠.”

    “그래, 저지능자의 반대편에는 고지능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그 둘은 공통점이 존재해. 바로 둘 다 ‘보통’에서 벗어났다는 점이지. 자 보거라.”

    강진이 붓을 들어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로축이 지능의 발달이고 세로축이 사람의 숫자라고 한다면······.”

    “한다면?”

    “이것이 인간집단 전체의 형태다.”

    가운데가 불룩하게 솟구친 산봉우리 같은 곡선. 그 곡선을 그려낸 강진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사실 수식으로 펼쳐내면 훨씬 복잡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이쪽은 내 전문분야의 이야기이니 생략을 하고. 이런 형태의 도표는 그 집단의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공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보자, 여기 이 점이 이준형이라고 한다면······.”

    오른쪽 끝의 가로선에 거의 딱 붙은 지점에 그려진 동그라미 하나.

    백운호가 그 반대쪽, 왼쪽 끝의 가로선에 거의 딱 붙은 지점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곳이 저라는 이야기겠네요.”

    “그래, 바로 그거다. 그말인 즉, 너는 이준형만큼이나 매우 희귀한 존재라는 의미다.”

    백운호가 쓰게 웃었다.

    “희귀하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을 갖는다니 조금 씁쓸하네요. 이왕 희귀할 거라면 저도 반대쪽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어쨌거나, 어떠냐? 내 제안이.”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험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약물에 대한 반응성 위주로 실험을 진행하겠지? 부작용이 절대 없을 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만 대체로 몸에 좋다고 알려진 약재들 위주로 실험이 들어갈 테니 사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대단한 기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 대신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매일매일 이곳 홍매당에 와야겠지. 또한, 하산하게 되면 몸 상태에 대한 일지를 작성하고 나에게 보고를 해야한다.”

    백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건이 너무 후하다.

    “나쁜 점은요?”

    “글쎄다. 나쁜 점이라······.”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이준형이 어째서 그 제안을 거부했는지를 알려주시면 됩니다.”

    “역시 영리하구나.”

    “그렇게 좋은 조건들로 가득한데 이준형에게 제안을 안하실 이유가 없을테니까요.”

    강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턱 끝을 긁적였다.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게다가 이것저것 약을 먹게 되면 내공 자체가 난잡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약의 휴지기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준형이는 그래서 거부를 한 거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준형이 아닌 현무다. 아직 정식으로 입문을 하지 않은 제자들에게는 이런 제안을 하는 것 자체가 문규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이후에는 제안 자체가 전해지지도 못했던 것 같구나. 너에게 패배한 직후에 설득을 했다면 충분히 먹혔을 텐데 말이다.”

    지금까지 운호가 접했던 강진은 항상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고, 가끔은 조금 헐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이준형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섭외하지 못했다는 점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에게서는 약간의 섬뜩함이 느껴졌다.

    화산금정 강진이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장담하마. 종합적으로 봤을 때 너에게는 절대 손해가 가는 제안은 아닐 거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설사 내가 불의의 사고로 선단을 제작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굳이 강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제안 자체가 운호 자신으로는 크게 손해볼 것 없는, 아니 매우 훌륭한 제안이라는 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약속한 그 ‘선단’이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하게 강진이 자신의 사부인 공야찬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낼 수 있는 호의를 넘어서 있었다.

    대체 왜?

    궁금증을 굳이 참을 이유는 없었다.

    “사숙, 저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건지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글쎄다······. 뭐 그 부분은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해두자꾸나. 정 찝찝하다면 찬이 형님, 그러니까 네 사부에게 물어보고 결정해도 괜찮다.”

    그저 내공에 관한 도움을 얻고자 찾아갔던 옥녀봉에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백운호는 강진의 제안에 자신의 마음이 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사부에게 이야기를 들어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그날 밤.

    운호의 이야기를 죽 전해 들은 공야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온종일 이리저리 끌려다닌 탓인지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로구나.”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후한 제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특별하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나쁜 체질이잖습니까. 사실 이건 오히려 천금을 주고라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널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의 의도에 나쁜 마음이 있는 건 아닐 테니, 그 의도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괜찮다.”

    “특별히 강진 사숙을 믿는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글쎄다. 실패한, 혹은 도태된 이념을 믿는 사람들끼리의 동질감? 뭐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겠구나.”

    “도태된 이념이요? 설마 강진 사숙도?”

    운호가 검종이라는 말을 집어삼켰다.

    공야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녀석의 개인사이니 여기서 풀어놓기 좀 그렇고. 어쨌거나 녀석이 너를 해하겠다는 의도로 제안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다만?”

    “녀석의 기준 자체가 종종 일반과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또한, 세상에는 의도는 선할지라도 결과가 좋지 못한 것 역시 빈번하다. 그러니 설사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녀석과 무언가를 진행할 때는 항상 신중해라.”

    공야찬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내가 매우 바쁠 것 같다.”

    “혹시 외당 일로 산을 내려가시는 겁니까?”

    “차라리 그랬다면 함께 내려갔을 터인데, 그게 아니라 문 내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이 사부를 찾는 일이 많구나. 그러니 혹시라도 수련 중에 어려운 점이 있다면 오늘처럼 저녁 시간에 따로 묻도록 해라. 그리고 이제 슬슬 너희 삼대 제자들에게도 무언가 임무가 주어질 것인데 그 부분은 내가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네, 알겠습니다.”

    * * *

    “자, 그러면 오늘은 드디어 너랑 다시 한번 붙어보는 건가?”

    어제와 같은 시간.

    종화가 이번에는 목검 세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운호가 물었다.

    “너 괜찮겠어?”

    “뭐가?”

    “아니, 보아하니 그 목검으로는 검술을 제대로 다 펼쳐내지 못하는 것 같던데. 그 태을검인가 하는 검술 말이야.”

    그 질문에 종화가 사납게 웃었다.

    “네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지난번이야 너는 나를 알고, 나는 너를 몰랐지만, 이제는 다르잖아? 난 지난 이틀 동안 저 인형 같은 계집애를 통해서 화산의 검술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글쎄다.”

    “잔소리 그만하고 검이나 받아.”

    종화가 던지는 목검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무게, 호구의 길이, 균형점. 거의 완벽했다. 이 정도면 전문적으로 목검을 제작하는 일을 해도 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난번 비무.

    그리고 어제와 그제 있었던 강아현과의 비무.

    언제나 그렇듯 종화가 먼저 빠르게 달려들었다.

    느린 시작과 빠른 과정. 그리고 순식간에 이뤄지는 결과.

    순양검의 그것이 운호를 압박해왔다.

    -딱!!

    하지만 가볍다.

    아무래도 목검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무식하게 무겁고 단단한, 800년 전의 제철 기술로 만들어진 종남의 검은 더더욱 그렇다.

    ‘이 정도라면.’

    딱 좋았다.

    자운검을 연습해볼 기회다.

    포원공의 진기가 몸을 보호했다. 근육은 한층 강하게 약동했고 힘줄과 인대는 더 부드럽게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종남의 검은 사납고 억세다. 가진바 내공이 십 대라고 믿기 힘든 수준인 종화의 검은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자운검의 묘리가 발휘됐다.

    충격을 흘려내고, 흡수한다. 검을 다루는 각종 묘리가 운호의 손에서 펼쳐졌다.

    종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지금 백운호가 펼치는 검술은 어제와 그제 강아현이라는 아이가 펼쳤던 검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찝찝하다.

    아마 백운호를 상대하는 것이 오늘이 처음이었다면 이 찝찝한 감정 속에서 허우적대다 결국 약속된 패배를 향해 차근차근 걸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백운호와는 한차례 상대해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요 며칠, 종화는 그 비무를 수없이 복기했다.

    그것은 일종의 포석과도 같았다.

    언뜻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당장에는 쓸데없는 낭비와 같은 움직임이다. 당장의 공방에서는 크게 필요가 없는 움직임들. 아니, 오히려 손해를 보는 움직임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비무 전체로 놓고 본다면 결국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움직임이 된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

    물론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에 살펴본다면 거기서 그런 포석을 깔아두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의 이야기다. 상대는 사람이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대체 어떻게 미리 알고 그런 포석을 깔아둔다는 말인가.

    미래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에서 이뤄진 일이다.

    종화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불가능한 일을 우연이라 단정짓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를 궁구했다.

    결국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최선이라 생각했던 모든 동작들이, 사실은 그의 의도 아래 있었다.’

    상대의 최선을 읽고 그에 대비한 포석을 미리 깔아둔다.

    사실은 그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은 그녀의 역량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미래를 읽는다는 것보다는 더 현실적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택했다.

    최선(最善)이 아닌 차선(次善)을.

    그 선택을 바라보며 운호가 웃었다.

    지금 종화가 보여주는 저 행동이 익숙했다. 당연하다. 저것이야말로 아주 오래전, 몽원경에서 증무진인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만났을 때 운호가 했던 선택이었으니까.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길을 찾아낸 종화를 향해 백운호가 검으로 속삭였다.

    증무 진인이 그에게 했던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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