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새로운 시작(2)
지금까지 경우를 따져봤을 때, 운호는 증무진인이 말하는 공과격이란 결국 자신의 성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운호가 검기를 사용한 것은 분명 어제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날, 수련을 통해 사용했다. 그가 오늘 잠들기 전 했던 일 가운데 그나마 기억에 남는 일은 장문인과의 대화 정도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공과격의 기준은 무엇일까?
증무 진인이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이 아예 모르는 검술을 알려주는 것은 너무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고, 그러니까 최근에 자운검을 배웠었지? 그래도 납매나 매농은 그래도 형은 얼추 맞게 배워서 좀 쉬웠는데 그건 진짜 못 봐줄 정도더군. 어찌나 입이 근질거리던지.”
“자, 잠깐만요.”
자운검(紫雲劍)?
백운호가 머리를 굴렸다.
자운검의 형? 지금 증무진인은 그 공과격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자운검을 가르칠 생각인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과연 그것일까?
기본적으로 자운검의 초식은 이미 완벽하게 숙지된 상황이다. 물론 백운 진인이 보기에 그의 납매검이나 매농검이 부족했던 것처럼 부족한 부분들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부족함을 떠나서 자운검은 앞선 두 검술과는 그 결 자체가 다르다.
형을 익히고도 제대로 자운검을 펼쳐내지 못하는 운호에게 공야찬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아직 네 내공의 수위가 부족해서 그렇다. 거기서 끊기는 동작은 진기를 크게 일으켜 단번에 몰아쳐야 한다. 결국 자운검은 다른 검술과 다르게 입문을 위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한 무공이라고 볼 수 있지.”
공야찬의 설명처럼 자운검은 화산파에서 자하기공을 익힌 사람 가운데 권장이 아닌 검을 드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검법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자운검을 검술의 탈을 쓴 기공운영법이라고까지 평가할 지경이다. 실제로 백운호 역시 그것을 익힐 때 무언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감각을 강하게 느꼈었다.
그것은 검술이라기보다는 그저 내공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더 강하게 사용하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운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거라면 차라리 내공, 내공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실 수 없나요?”
증무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마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운호의 말을 무시했다.
“자운검은 꽤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앞선 납매검이나 매농검의 형이 형 자체에 그 의미가 있다면, 자운검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승의 경지를 논하는 검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네가 두 발로 선 다음에 익히는 검술로는 딱 알맞은 검술이다.”
“태사조님?”
증무진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후,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나는 너보다 너를 더 잘 아는 사람이다. 특히 무공에 관해서는 더더욱. 지금 네가 할 일은 나의 말을 최대한 이해하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내서 공과격을 아끼는 거다. 지금처럼 말을 끊는 것이 아니라!! 젠장, 쓸모없는 이야기에 공과격을 또 깎아 먹었군. 혹시라도 오늘 자운검을 제대로 다 알려주지 못한다면 이건 전적으로 네 놈 탓인 줄 알아라.”
백운호가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증무진인의 이야기가 틀렸던 적이 있었나? 물론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대화뿐이다. 적어도 무공에 관해서는 증무진인의 이야기가 틀렸던 적이 없다.
증무진인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가 익힌 자운검은 쓰레기다. 물론 어쩌다 자운검이 그렇게 됐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녀석들 나름의 발전이었겠지. 게다가 쓰레기 같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점도 있긴 하니 말이다.”
증무진인이 검을 들었다.
그가 가르쳐주는 자운검은 운호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기본적으로 그 형태 자체가 백운호가 배웠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특히 뚝뚝 끊기던 부분들. 그러니까 폭발적으로 진기를 밀어 넣어 초식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부분들이 놀라운 수준의 기교들로 대체됐다.
“집중해라. 여기서는 내력의 발산이 아니라 유지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나둘, 증무진인의 손을 따라 백운호가 익히고 있던 자운검의 초식들이 변화했다.
이미 익히고 있던 것을 뜯어고치는 일이다. 보통이라면 단번에 새로운 초식을 익혀낼 수 없었겠지만, 백운호는 놀라울 정도로 그것에 쉽게 적응했다.
증무진인 역시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하는 느낌으로 쓱쓱 백운호의 검술을 수정했다.
‘이거?’
검술의 위력만 보자면 본래 백운호가 알고 있던 자운검이 오히려 더 강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전의 자운검이 그저 강력한 검술이었다면 지금 증무진인이 고쳐주는 자운검은 단순히 위력만이 아닌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거기서는 보폭을 반걸음 더 넓혀야 한다. 달려 나가기 위한 초식이 아니라 버텨내기 위한 초식이다.”
간질간질하다.
그것은 분명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할 때 느껴지는 그러한 감각이었다.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린다면 생각이 날 것 같은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가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
“멍청하기는. 자 보거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백운호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태사조님. 설마 이거?”
그래, 납매검이 그러했으며 매농검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자운검 역시 그러함이 마땅하다.
지금까지 운호가 익혔던 화산의 검술에는 각자의 철학이 존재했다.
그것은 그 검술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향이다.
납매검은 호신을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그것은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다.
매농검에서는 미시적 비효율이 거시적 효율로 이어지는 이율배반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매농검은 모든 것을 조롱한다. 심지어 검을 휘두르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운검이 무엇을 근본 철학으로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운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검을 다루는 법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검술의 기법들이다.
자하기공을 익힌 이들이 그것을 내공을 통하여 도약하는 것으로 간략화한 것이 이해됐다. 위력은 더해지는데 그 기술 자체는 훨씬 쉬워진다. 충만한 내공을 지닌 이들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초식의 어색한 부분이 그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됐다. 힘을 통하여 쉽게 갈 수 있는 부분들을 굳이 더 어렵게 돌아간다. 하나의 파지법으로 넘어갈 수 있는 초식에서 무려 다섯 번의 파지법 변화가 이뤄진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근거는 앞서 증무진인이 수정해준 초식의 형태들이다.
그렇게 백운호가 아직 증무진인이 가르치지 않은 초식들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사부에게 배웠던 자운검이 아니었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자운(紫雲)
그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다.
증무진인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탁 두들겼다.
“그래!! 바로 그거다!! 아니, 아니지. 거기서는 세 치 아래를!!”
세세한 부분은 분명 손볼 곳이 많았다.
하지만 그 초식의 방향성이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다. 백운호가 펼치는 그것은 이제는 검술의 탈을 쓴 기공 운영법이 아니었다.
총 여덟 초식 가운데 두 가지를 수정해줬더니 거기서 찾아낸 규칙성을 기반으로 나머지 여섯 초식을 고쳐낸다.
그야말로 문일지십의 기재다. 하지만 그것은 증무진인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던 부분이다.
그래 애당초 이 정도가 아니라면 답이 없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증무진인이 슬쩍 공과격을 계산했다.
아슬아슬했다.
이 빌어먹을 공과격의 제약 같으니. 유일한 위안이라면 이 빌어먹을 제약이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조언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조언? 그래, 그거라면 제법 자세히 말해줄 수 있다.
아니면 아까 녀석이 물었던 내공에 관한 해답? 완전한 답안은 아니더라도 답안을 향해 가는 길 정도는 안내해줄 수 있다.
증무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부분들은 백운호의 재능과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희망은 없다.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멀리 봐야 한다.
물론 결국 백운호 입장에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겠지.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언젠가 단순히 십이 아닌 백, 천을 볼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백운호의 자운검이 점점 증무진인이 알고 있던 그것과 흡사하게 변해갔다.
‘조금만 더, 여기서 조금만 더.’
아슬아슬한 공과격의 사슬이 그를 옭아맸다.
삼 푼의 아쉬움.
하지만 그 아쉬움은 백운호라는 아이의 재능과 그 가능성을 믿기로 했다. 그래, 재능만으로 따졌을 때 무려 천하 십대 고수 정도는 무난하게 노릴 수 있는 재능 아니던가. 그것도 지금이 아닌 그가 활약했던 바로 그 시대를 기준으로 말이다.
“불교의 용어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점수돈오(漸修頓悟), 돈수점오(頓悟漸修), 점수점오(漸修漸悟),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돈수(頓悟頓修). 그 차이를 알고 있느냐?”
뜬금없는 태사부의 질문에 백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수행과 깨달음의 관계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들이다. 당연히 알고 있다. 지난 3년. 화산의 수업은 방대했고 백운호는 그 수업의 내용 대부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네?”
“그리고 자운검도 이만하면 당장 어디 가서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검이나 들어라. 오늘은 어디 자운검으로 한번 어울려 보자꾸나.”
백운호의 몸속 깊숙한 곳에서 포원공의 진기가 움직였다.
* * *
이른 아침.
몽원경에서와 달리 여전히 현실의 몸은 완전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종화와의 그 비무에서 운호는 자신의 진기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 썼다. 단순히 근육만 하더라도 한계를 넘어서게 움직이면 회복되는데는 며칠이 걸린다. 아무리 옥고환으로 몸을 보했다고 해도 적어도 사나흘은 더 정양해야 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가 흘러갔다.
다만 공야찬과의 검술 수련은 이뤄지지 못했다. 백운호의 몸 상태도 몸 상태였지만 공야찬 본인도 제법 바빠진 덕분이었다. 며칠 전 비무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화산파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나 외당 소속으로 경험이 풍부하지만, 사부인 굉무가 죽고 없어 딱히 비호해줄 사람이 없는 공야찬은 여기저기서 끌어다 쓰기 딱 좋은 인재였다.
백운호가 정오를 지나 서쪽으로 향해 가는 태양을 가늠했다.
오시 말? 미시 초?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것일까?
강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사백님 오늘도 안 계신 거야?”
“어, 사부님 요즘 좀 바쁘시더라. 그런데 너는 오늘도 한가한가 보다?”
“한가하기는 누가 한가하다는 거야. 나도 엄청 바쁘거든? 그냥 네가 몸도 아직 엉망이니까. 아니, 그러니까 네가 걱정된다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이렇게 약해진 상태에서 괜히 누구랑 시비 붙어서 지기라도 하면 내가 너한테 졌으니까 나도 그 녀석에게 간접적으로 패배하는 꼴이 되는 거라서. 그래서 찾아온 거거든?”
얼굴이 벌게져서는 빠르게 말을 내뱉는 강아현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대체 이런 산 깊숙한 곳에 동떨어진 모옥에 누가 일부러 시비를 걸러 찾아온다는 건지.
백운호가 웃으며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백운호? 와, 진짜 찾기 힘든 곳에 살고 있네. 어쨌거나 야, 너 나랑 한 판 다시 붙자.”
종남의 검을 등에 짊어진 더벅머리 소녀.
종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