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종남의 검(6)
-쾅!!!
태을의 검과 백운호의 검이 교차했다.
태을의 검은 무서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어느 천재의 평생에 전통 있는 집단의 파격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태을의 패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태을의 검을 휘두르는 종화라는 개인의 기량이 백운호라는 개인 기량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다.
종화의 몸이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종남의 검은 크고 두꺼우며 단단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기절까지 한 와중에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은 종화의 검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득했다.
물론 백운호라고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직전의 일 검은 말 그대로 운호의 모든 마음과 육체와 기운을 한데 모은 일 검이었다. 그렇기에 검과 검의 충돌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그의 내부를 흔드는 것까지는 막아낼 여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통증에도 불구하고 운호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고통이 아닌 성취감 가득한 웃음이었다. 어쨌거나 비무대 위에 두 발로 선 것은 종화가 아닌 운호 자신이었으니까.
생각보다 훨씬 수준 높았던 비무. 그리고 그 충격적인 결과에 이곳에 모인 화산의 모든 사람이 백운호를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
아무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각자가 알고 있는 정보가 다르고 품고 있는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것 한 가지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좋은 일이건, 혹은 나쁜 일이건. 당분간 화산의 중심에는 저 아이가 서겠구나.
그리고 그러한 기이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비무를 지켜보던 강아현의 박수 소리였다.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명했다.
-짝짝짝
“훌륭하구나.”
그리고 그 박수에 누군가의 박수가 더해졌다.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 화산의 가장 큰 어른인 권신 청무 진인이다. 그리고 그의 박수가 자기 사부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화산의 이대와 삼대 제자들을 합류시켰다.
그렇게 수백 명의 박수갈채가 비무대 위로 쏟아졌다.
종남의 검 앞에 화산의 권이 무릎 꿇었다. 그리고 곧바로 뒤이어 올라온 종남의 미래 앞에 화산의 미래들이 굴욕을 당할 뻔했다. 그리고 백운호는 화산을 대표하여 그것을 훌륭하게 분쇄해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적어도 이 순간, 백운호는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낸 화산의 대표였다.
연단의 가장 높은 곳.
그들을 바라보는 화산 장문인 굉허자의 얼굴이 복잡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그의 손을 떠난 곳에서 벌어졌다. 대체 청무 사백님은 무슨 생각으로 백운호를 무대에 올렸을까? 그 분은 검종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 아니던가.
아니, 하지만 여기서 운호가 비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과연 삼대 제자 가운데 저 종화라는 아이의 검을 받아낼 아이가 있었을까?
점점 커져가는 박수 소리와 환호성.
굉허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거기에 자신의 박수를 더했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공야찬이 빠르게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의 시선이 백운호를 훑었다.
‘대체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물론 이론적으로야 백운호의 진기를 모조리 끌어다 쓰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여력을 모조리 끌어쓰는 와중에 심기체를 그 수준에 정확히 맞춘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백운호는 그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그래, 어쩌면 그 불가능이라는 기준 역시도 결국 나 공야찬의 기준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
아니다. 단순히 질투만이 아니다. 후회, 회한, 안타까움.
만약 나에게 저런 재능이 있었더라면 사부가 그렇게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공야찬이 백운호의 명문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손길에 백운호가 핏물로 붉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부님. 제가 해냈습니다.”
백운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신이 해낸 일에 칭찬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공야찬은 알 수 없었다.
백운호의 저 표정이 수십 년 전 그가 포원공 이단공에 올랐을 때 사부에게 지었던 표정과 닮았다는 것을.
또한, 지금 자신도 모르게 씰룩이는 입꼬리가 그의 사부가 그를 바라볼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하다는 것을 말이다.
공야찬은 자신의 사부처럼 환하게 웃으며 제자를 축하해주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통제하며 그저 퉁명스럽게 엉망진창이 된 제자의 몸을 걱정했다.
“잔소리 말고 집중하거라. 속이 아주 엉망이다. 이대로 자리를 옮기는 것보다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요상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공야찬이 백운호의 운기요상을 도우려는 찰나.
그의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먹이거라.”
“사, 사조님?”
권신이었다.
“내상도 제법 되는 것 같고, 놀라울 만큼 완벽하게 진기를 뽑아낸 터라 그대로라면 시간이 제법 걸릴 수도 있다.”
“감사합니다.”
영약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요상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극품의 옥고환이었다. 공야찬이 사양하지 않고 단환을 받아 백운호의 입에 집어 넣었다.
바짝 말라 있던 백운호의 단전에 한줄기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어 정신을 잃은 종화의 몸을 살피던 권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 어째 오늘 비무는 이긴 녀석들이 더 피해가 크구나.”
팔의 경맥에 조금 피해가 있었지만, 몸 자체는 그저 조금 흔들리고 기운이 고갈됐을 뿐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중간에 검이 파손된 덕분에 몸에는 충격이 덜 전해졌다.
게다가 순양의 기운을 태을로 전환하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그의 사부에 비해 이 아이는 별다른 제약이 없는듯싶었다.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를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다.
-안타깝구나. 저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저 이인자로밖에 머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권신의 머릿속에 태을검선의 자신만만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 비무는 백운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화산 무학의 승리일까?
무신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운호가 가지고 태어난 하늘이 내린 재능 덕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10년, 그리고 20년이 흘렀을 때도 결과는 지금과 같을까? 그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인간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는 법이니까. 지금처럼 화산에서 아무것도 안 해준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 성장을 방해한다고 해도 백운호라면 그 모든 것을 극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신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서 그것이 옳은 길인가.
순양자 이래 긴 세월 동안 금녀의 문파였던 종남은 그 오랜 전통을 깨고 여아를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화산은?
그래, 검종과 기종. 참으로 많은 일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쉽지 않겠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금녀의 문파가 여아를 제자로 받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종남의 금녀는 그저 오랜 전통이지만, 화산의 검종은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역린이니까.
‘하지만······.’
그의 시선이 화산의 늙은 장문인에게 향했다.
* * *
“놀라운 일이었다. 태을(太乙)이라니. 게다가 여아라니. 종남 그 꽉 막힌 벽창호 집단에서 용케도 그런 발상을 해냈구나.”
증무 태사조님이 종남의 검을 칭찬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들어 본 증무 태사조님의 칭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칭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사조님은 무려 권신 사조님께 ‘멍청한 노력도 저 정도까지 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이라는 평가를 내렸던 분이다.
“그 무공이 태사조님께도 놀라운 일이었습니까?”
“글쎄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보다는 전통이니 뭐니 하면서 무려 팔백 년 전에 유행하던 장검까지도 꿋꿋하게 유지하던 머저리들이 저만큼이나 궁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구나. 난 종남의 벽창호들이라면 앞으로 천년쯤 발전이 없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거든.”
“그렇군요. 그나저나 말씀이 좀 많으신 걸 보니까 오늘 또 그 공과격이라는 게 제법 쌓였나 봅니다?”
증무 태사조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녀석도 매일 바닥만 기어 다니더니 드디어 이제야 두 발로 섰구나.”
확실히 그 일 검을 두 발로 선 것이라고 표현한다면, 이전까지의 내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는 비유는 적절했다.
태사조의 칭찬에 내가 웃었다.
“웃기는. 아직 한참 멀었어. 고작 칼 한 번 휘두르고 기진맥진한 꼴이라니.”
“그거야 내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 부분 아닙니까.”
“핑계다. 찾아보면 길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야. 게다가 분명히 힘의 낭비가 있었다. 평소에 연습 열심히 해뒀다면 약간의 여력 정도는 남겨둘 수 있었을 거다.”
“아니, 깨달음이 그 순간 번뜩이고 찾아왔는데, 평소에 그걸 어떻게 연습합니까.”
“그게 자랑이냐? 그리고 일전에 내가 누누이 말했지. 깨달음 하나 얻었다고 실전에서 그렇게 무턱대고 시도하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기 힘들 거라고.”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공감하기 힘들다.
이전이야 워낙에 어려운 분이라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그야 저도 실전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비무 아닙니까. 비무에서 한계까지 사용해보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해보겠습니까.”
“멍청하기는. 당연히 수련에서 그렇게 해야지. 비무라는 것은 강호의 싸움을 전제로 하는 훈련이다. 거기서 그렇게 뭐 좀 깨달았다고 아하!! 이러고 남발하다 보면 실전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돼버리기 마련이지. 내가 그러다가 골로 간 놈들 참 많이 봤다.”
증무 태사조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잔소리하지 말고 검이나 들어라. 오늘 어쩌다 두 발로 섰으니 이번 기회에 그 감각이나 몸에 완벽하게 박아 넣어야겠구나. 네 말처럼 당장 쥐꼬리만한 내공은 어찌 할 수 없으니 오늘 공과격은 너의 수련을 위해 쓰도록 하자.”
“공과격을 제 수련에 사용하시겠다고요?”
태사조님이 대답하는 대신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나의 그 의문은 그리 오래지 않아 말끔하게 풀렸다.
평소 나는 태사조님의 검에 찔려 죽는 순간, 이 몽원경에서 빠져나갔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검에 찔린 상처가 어느새 말끔하게 회복됐다. 진기 역시 그와 함께 빠르게 회복됐다.
그리하여 그날 밤.
나는 총 서른일곱 번이나 태사조님의 검에 사망했다.
* * *
이른 아침.
어제의 비무 탓일까?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웠다. 혹사당한 기맥이 아려왔다. 진기의 양 역시 평소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냥 누워서 쉬고 싶다는 유혹이 강렬하게 나를 덮쳐왔다.
“안 되지.”
몸이 약해져서일까? 공기가 유달리 차갑다. 자소공을 한차례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몸이 데워지지 않았다. 한 번 더 꼼꼼하게 자소공을 펼쳤다. 이제야 몸에 조금씩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운호야!!”
저 멀리서 아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평소 강아현이 방문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녀석도 매일 아침 자소공 수련을 빼먹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그 수련을 끝내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추운 날씨에도 이마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하다. 그녀가 옷소매로 자신의 땀방울을 닦아 내리며 답했다.
“너 다음 회차 자소단 대기 명단에 이름 올라왔어.”
“뭐라고?”
“아침에 자소공 수련 중에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장문님의 특별 지시래. 아, 그리고 오늘 어쩌면 운호 너 부를지도 모르겠다던데?”
“장문인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