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종남의 검(5)
권신이 종화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종화의 깊숙한 곳을 샅샅이 훑어냈다. 멀리서 슬쩍 봤을 때는 알 수 없든 수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웃었다.
“참으로 재밌구나. 자명이 참으로 재밌는 아이를 키워냈어.”
종화가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지간히 되바라졌다는 평가를 듣는 종화였지만 감히 함부로 대꾸할 수 없었다. 딱히 권신이 무언가 특별한 의도를 품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인간에게 특별한 의도를 품었기에 두려운 것이 아닌 것처럼, 권신 역시 그러했다.
“네 사부의 몸은 걱정하지 말거라. 치료가 제법 걸리기는 하겠지만 별다른 탈은 없게 해줄 터이니.”
권신이 비무대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그의 등 뒤로 두둥실 떠오른 벽운의 몸이 따라 움직였다.
-후아
종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비슷한 반열에 들었다고 알려진 태을 검선을 자주 봤었지만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과연 천무십칠성 가운데서도 천하제일을 노리는 고수란 이런 것인가?
“너 지금 그렇게 태사조님한테만 신경 쓸 상황이 아닐 텐데?”
비무대 위.
종화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권신이 불러서 올라온 아이가 하나 있었다.
“백운호라고 한다. 오늘 네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사람이지.”
훤칠한 키. 균형 잡힌 몸. 옆구리에 찬 검이 인상적이다. 물론 화산에 검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류라고 보긴 힘들다. 화산 무공 특징은 어마어마한 내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내공을 활용함에 있어서 검과 같은 신외지물을 통해 내공을 발산하는 것보다 몸에서 직접 발산하는 것이 당연히 유리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자리에 어중이떠중이를 올렸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너, 작년에 서안에서 마인과 싸웠다는 그 녀석이구나.”
종화의 얇은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혹시나 하고 뛰어 올라왔는데 이건 최고의 결과다. 부전승도 승리는 승리라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직접 때려눕히는 쪽이 훨씬 낫다.
그런 종화를 바라보던 백운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 정말 종남파 맞아?”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니, 종남파는 원래 여자는 제자로 안 받지 않나? 근데 너 여자잖아.”
!?
사람들의 시선이 종화에게 향했다.
여자라니. 어떻게 봐도 더벅머리에 주근깨의 지저분한 사내아이다. 물론 요모조모 떼어보면 중성적인 느낌이 들긴 했지만, 저맘때 사내아이 중에는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운호의 이야기처럼 종남은 여자는 제자로 받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종남을 상징하는 단어가 무엇이던가.
순양(純陽)이다.
당나라 말, 종남산 종남루에서 순양자 여동빈이 정양자 종리권에게 화룡의 법을 얻었다. 이것은 지극한 순양의 도로써 오직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양기를 보전할 때만 지속이 가능한 기운이다.
그렇기에 종남의 도인은 평생동안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물론 저자를 떠도는 극단적인 동자공처럼 그것을 깨트리는 순간 주화입마에 드는 류의 공력은 아니다. 하지만 상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순양을 지키는 것이 필수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화산의 장로 가운데 고수가 아닌 이가 없다. 고수는 사람의 외면이 아닌 본질을 본다. 종화가 품고 있는 기운은 지극히 정순한 양기다. 헌데 그런 종화가 사내가 아닌 여인이라니. 터무니없다.
그녀가 자신의 더벅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딱 보면 나오는데 뭐.”
백운호가 얻었던 깨달음은 동작에 있다. 그 기본은 모든 동작의 무게중심과 운동 방향, 힘의 크기를 분석하는 능력이다.
“뭐, 그래. 어차피 숨기려던 것도 아니니까.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 네가 남자건 여자건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중요했다.
화산의 장문인 굉허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현무가 벽운에게 패배하고, 갑자기 나타난 사백이 문파의 행사에 끼어들었으며 이제는 종남의 제자가 여자라고 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종화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조금 전, 벽운이 사용하던 검과 같은 모양의 검이었다. 운호의 머릿속에 조금 전 벽운이 보여줬던 동작들이 재생됐다.
마치 과정을 생략한 것 같은 움직임들. 과연 저 앞의 계집애가 보여줄 검술은 얼마나 그것에 근접해있을까?
서른 걸음
스무 걸음
열 걸음
그리고
쾅!!!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온 종화의 검이 운호의 허리를 노려왔다. 어느새 뽑힌 운호의 검이 그 검격을 막아냈다.
묵직했다.
그 일격은 백운호 자신보다 작고 호리호리한 여자의 몸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이한 흡력.
종화의 검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흡력이 조금이지만 운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순양일기공의 특성이니까.
‘그래도 이 정도라면!!’
앞서 벽운이 현무와의 비무에서 보여줬던 순양검이 과정이 생략된 시작과 결과였다면 종화의 그것은 느린 시작과 빠른 과정. 그리고 번뜩이는 결과였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종화의 검격 사이로 매농검의 초식을 찔러 넣었다. 그녀의 검이 움직임을 수정했다. 본래는 운호의 머리를 노리던 검이 오른팔을 찔러온다.
의도한 대로다.
매농의 검은 상대의 의도를 제한하는 데 있다. 상대를 노리는 것처럼 움직이던 운호의 검이 종화의 검날을 비껴냈다.
-끼기기기긱!!
불꽃, 그리고 철판을 긁어내는 소음. 백운호의 검이 종화의 대검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녀가 크게 호흡을 들이켰다. 순양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가장 무거운 검.
순양의 검이 백운호의 검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예상한 범위 이내다.
검을 타고 올라가 이제 세 걸음하고 반.
-쾅!!
채찍처럼 휘두른 백운호의 왼쪽 다리가 종화의 복부를 두들겼다.
아니다. 간발의 차이. 그녀가 복부 대신 자신의 오른 허벅지를 내줬다.
“약해!!”
그녀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약했다. 근육에 전해지는 미미한 통증. 고작 이 정도는 순양의 진기가 한 바퀴 회전하는 것으로 다 회복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회복에 진기를 집중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묘한 검술이 그녀를 현혹했다. 그때마다 그녀에게는 그 자그마한 피해들이 쌓여갔다.
종화가 이를 악물었다.
명백하다. 지금 비무를 지배하는 쪽은 저쪽이다.
그녀가 보고 들었던 화산의 무공과는 달랐다. 화산의 무공은 우직하고 정직하게 그리하여 결국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지금 백운호가 보여주는 것은 화려하며 기괴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검들이 연달아 그녀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런 검격을 몇 차례 교환하다 보면 어느새 자잘한 피해가 몸에 쌓인다.
그래, 형태는 다르지만, 이것 역시 화산이로구나.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했다.
화산의 무공을 공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그대로 실행하면 그만이다.
‘모든 여력을 뽑아내어 단 한 번에 찔러 넣겠다.’
그리하여 그 순간, 종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백운호가 깨달았다.
‘온다.’
현무를 단번에 무너트렸던 바로 그 검이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양의 기운이 그 근원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하여 태초에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기 전.
모든 것이 텅 비어있는 그곳에는 오직 태을이 있었다.
순양태을검(純陽太乙劍)
일초식.
순양귀태을(純陽歸太乙)
그것은 그의 사부인 벽운이 보여줬던 것에 비하자면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나라면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비무를 지켜보는 이대 제자 대부분은 그 질문에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것은 찰나를 찌르는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태을의 일 검 앞에 백운호가 눈을 반짝였다.
아마 앞선 비무를 보지 못했더라면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앞선 비무에서 그의 사부가 명백하게 증명했다.
‘이 무공은 미완의 무공이다.’
절대의 위력이면 뭐 하는가.
단 일격을 쏟아내고 스스로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을.
그래, 오직 일격뿐이다.
물론 접전의 과정에서 그 공격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면 당해낼 수 없다. 그것은 무적에 가깝다.
벽운의 일 검이 현무를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피해내거나 흘려낼 수 없는 상황에서 흘려낼 수 없는 속도와 위력으로 쏘아진 일 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도했다.
작은 공격들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렇게 누적되는 피해로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비장의 무기를 빼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기에 지금이다.
포원공의 진기가 크게 부풀었다.
아직 일단공에 불과했지만, 지난 십 개월 전과는 그 효율 자체가 달랐다. 완벽하게 단련된 육체가 그 동작을 도왔다.
부운약표(浮雲躍飄)
하늘의 구름처럼 천변만화하며 부는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화산의 험난한 환경이 만들어낸 절세의 보신경이 빛을 발했다. 처음부터 맞설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순양일기공에서 발휘되던 기이한 흡력이 수십배 강력하게 운호를 압박해왔다.
그의 자세가 크게 무너졌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이 공격만 피해내면 끝이다.
간발의 차이.
태을의 검이 운호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쓸려나간 옷감. 그 아래 피부가 화끈하다. 하지만 기껏해야 피륙의 상처에 불과하다.
이겼다.
바로 그 순간. 운호의 감각이 소리쳤다.
-끝이 아니다!!
저 멀리 비무를 바라보던 태을검선이 미소 지었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저런 재능을 갖고도 천하제일이 아니라 이인자에 만족해야 할 거라고.”
안일했다.
애초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대체 왜 종남에서 여아에게 무공을 가르쳤던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여아가 순양일기공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여아에게 태을검선이라는 종남 최고 고수의 무공이 이어진 것일까?
그냥?
웃기지도 않는 소리!! 세상의 이상한 일에는 마땅히 그런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태을 검선이 만들었고, 벽운이 몸으로 실험했으며, 그 제자인 종화가 비로소 익혀냈다.
태을(太乙).
그것은 오직 순양의 기운을 지닌 순음의 여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순양태을검(純陽太乙劍)
이초식.
천지여일(天地如一)
무너진 자세.
그 위로 쏟아지는 절대의 일격. 그 앞에서 운호는 얼마 전 사부와 나눴던 문답을 떠올렸다.
백운호가 물었다.
“저도 이제 수련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의미인가요?”
공야찬이 답했다.
“물론 이대로 더 정진한다면 그리 먼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아직이다.”
발가락에 힘을 주어 몸을 튕겨냈다. 잘 발달한 신체가 그 동작을 가능케 했다. 손에 움켜쥔 검의 감각이 또렷했다. 전신을 움직이는 포원공의 내력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그의 사부가 말했다.
진정한 검기는 심기체의 합일에 있다고.
사부만큼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그의 마음도 기운도 육체도 아직 사부에 비한다면 가소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부가 며칠 전 보여줬던 그 수준의 일 검이라면.
그의 모든 것을 짜낸다면. 어쩌면 그곳 정도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웃었다.
뻔하다. 그런 것 정도는 공야찬의 검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백운호의 모든 마음과 육체와 기운이 검 안에서 어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