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종남의 검(4)
정직한 공격이 이어진다.
검선 사조님이 말씀해주신 그대로였다.
-화산의 무공은 강자의 무공이며 그들 무공의 철학은 수성(守城)에 있다.
전쟁에서 이기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저 제갈무후도 결국 하북의 생산력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과 같다. 상대보다 더 넓은 땅에서 더 많은 병사를 양성하여 기책을 허용하지 않고 우직하게 싸워나가면 된다.
지금 현무가 펼치는 화산의 무공이 그러했다.
우직하게 쌓아 올린 내공으로 상대의 현란한 초식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이어간다. 자하신공이라는 희대의 절학이 그것을 돕는다.
그렇기에 더 강하게 흔들어야 한다.
화산의 무공을 상대로 무난하게 승부를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난하게 패배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촉의 제갈무후가 모든 것을 쥐어짜 북벌을 감행했던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이득을 얻을 수 없다. 설사 그 결과가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벽운의 검이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 검격을 막기 위해 현무의 주먹이 순식간에 치고 들어왔다. 방어에 삼푼의 힘을 더 실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벽운은 삼 푼의 힘을 공격에 보태, 피하는 대신 오히려 그 주먹을 향해 달려들었다.
간발의 차이
유형화된 자색빛 기운에 휩싸인 현무의 주먹이 벽운이 쓰고 있던 도관을 박살 냈다. 끊어진 벽운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렸다.
하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자색빛 기운이 상대적으로 옅은 오른팔 하박을 벽운의 장검이 파고들었다.
벽운이 검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저항감을 느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 공격은 막을 수 없다. 확실하게 닿는다!!
마침내 벽운의 장검이 자하기공의 기운을 가르고 현무의 몸에 닿았다.
!?
아직이다. 현무의 오른팔 장포가 크게 부풀었다.
-쾅!!!
어마어마한 충돌음. 그리고 크게 부풀었던 오른팔의 장포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크게 세 걸음 물러난 벽운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현무 역시 곧바로 벽운을 따라붙는 대신 그 자리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면포에 그만한 기운을 싣다니. 과연 자하기공이로군.”
“누가 들으면 내가 이득을 본 줄 알겠구만. 낭패를 본 것은 내 쪽인데 말이야.”
“낭패는 무슨.”
겉보기에는 옷이 찢겨 나간 현무 쪽이 손해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건 찢겨 나간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현무는 스스로 장포에 기운을 폭사시켜 검을 튕겨냈다. 그야말로 경지에 이른 기공이다.
비무를 지켜보던 화산의 장로들이 수군거렸다.
“벌써 의복에 강기를 두를 정도라니······.”
“그렇다면 벌써 육단공이라는 말입니까?”
“맙소사, 현무의 나이 이제 마흔다섯 아닙니까. 아직 지천명까지도 한참 남았는데 벌써 육단공의 경지라니······. 그야말로 화산의 홍복입니다.”
현재 화산의 굉자배 가운데 자하기공의 성취가 가장 높은 외당주 굉명의 성취도 아직 칠단공에 불과했다. 그 말인즉 당장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장로 가운데서도 현무를 이길 수 있다 확신하는 이는 손에 꼽는다는 뜻이다.
화산 장문인 굉허자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종남의 의도야 뻔했다. 서안에서 체면을 와장창 구겼다. 속가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 그들로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 나름의 적당한 항의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화산의 잘못이던가. 애당초 서안에 위치한 화산의 속가를 밀어내려 한 종남의 잘못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래, 상대는 고작 종남이다. 그들은 지난 백년 동안 화산에 비할 수 없었던 구파의 말석에 불과하다.
물론 세상에 절대는 없다. 만에 하나라도 현무가 패배한다면 화산이 받을 타격은 너무나도 심대하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기를 십 년이면 이길 수 없고, 이십 년이면 비길만하며, 삼십 년이면 패할 수 없다고 했다고 했다.
현무가 자하기공에 매진한 것도 벌써 삼십 년이다. 굉허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 현무가 이곳 화산에서 같은 배분의 누군가에게 패배하는 모습은 그려낼 수 없었다.
현무의 주먹이 벽운을 향해 쏘아졌다.
그 주먹 앞에서 벽운이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막아내고, 피해내고 공격한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현무의 공격은 우직하게 벽운을 조금씩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백 년이나 강호의 정상에 군림해온 화산의 무공이로구나. 백운이라는 사람이 현대 화산의 체계를 만든 것이 백 년. 그래, 무려 백 년이다.
세대로 따진다면 무려 다섯 세대. 고작 백운이라는 한 개인이 세운 이 체계를 종남파는 무려 다섯 세대 동안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기에 벽운은 기꺼운 마음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렇기에 벽운은 저 친구를 이해했다.
세월과 경험은 사람에게 확신을 안겨준다. 백 년이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졌으니 내일도 당연히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백 년이나 정상에 군림했던 무공이었으니 내일도 군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아주 먼 옛날, 종남산 종남루에서 순양자가 정양자에게 화룡의 법을 얻었다. 이후 종남의 무공은 언제나 순양(純陽)을 근간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화산이 자하(紫霞)를 근간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었다.
종남이 낳은 천재 태을검선이 그 당연함을 깨트렸다.
그리고 그 파격은 벽운에게서 빛을 발했다.
순양(純陽)에서 시작된 무공이 태을(太乙)로 거슬러 올라갔다.
몸 속을 들끓는 순양의 진기가 태을로 변환됐다. 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튼튼하기 짝이 없는 벽운의 기맥이 찢어질 듯 아려왔다. 그렇기에 오직 일검이다.
순양태을검(純陽太乙劍)
팽팽하게 당겨졌던 벽운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해방됐다. 기회를 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산의 무공은 항상 정직했으니까. 변하지 않았으니까. 덤빌 수 있다면 마음껏 덤비라는 승자의 무공이었으니까.
그 압도적인 일 검 앞에서도 현무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주 긴 세월. 그 강력함을 증명해온 화산의 무공을 그저 오롯하게 펼쳐냈다. 또렷하게 유형화된 자하의 기운이 그의 양손을 감쌌다. 화산의 막대한 정기가 그를 도왔다. 그리하여 한계에 가깝게 도달한 양이 질적 변화를 이뤄냈다.
강기였다.
어딘가 불안하고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에 어울리는 단어는 오직 강기(罡氣)라는 단어뿐이었다.
-쾅!!
막대한 힘과 힘의 충돌.
마치 화탄을 터트린 것 같은 어마어마한 충격음과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무승부는 없었다.
비무대 위에 선 사람은 단 하나.
저 멀리 비무를 지켜보던 두 노인의 희비가 교차했다.
팔십 년을 승리하지 못한 노검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팔십 년동안 패배하지 않았던 노권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화산의 권이 종남의 검 앞에 꺾였다.
쓰러진 현무의 강철과도 같은 양손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이······, 이 어찌!!”
그나마 그들의 입에서 사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상대가 같은 구파의 일원인 종남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서 현무를 약당으로 옮겨라!!”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쓰러진 현무를 약당으로 옮기라 소리쳤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그 자리. 현자 배 가운데 현무의 뒤를 잇는 고수. 현천자 조곽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최근 제자의 몸을 살피느라 현무 사형의 몸이 심하게 축난 상태였소. 벽운 도우께서는 자신이 있다면 이 현천과 손을 섞어보심이 어떠하오.”
비무대 위에 선 벽운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여기 현우도 있소이다.”
절대 패배할 것 같지 않던 현무가 패배했다. 그야말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
여기저기 화산의 이대 제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만!!! 그만들 하시지요.”
저 아래, 비무의 결과에 싱글벙글 웃고 있던 벽운의 제자 종화가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설마 강호의 명문인 화산에서 차륜전이라도 하실 생각인겁니까?”
“아······,아니 그것은······.”
“사부님 몸은 좀 괜찮습니까?”
-주르륵
벽운의 입가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순양의 진기를 억지로 태을로 전환하느라 생긴 내상이었다.
“사부님은 지금 더 이상 비무를 할 상태가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굳이 비무를 원하신다면.”
열다섯.
지저분한 더벅머리의 아이가 검을 뽑아들었다.
“제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 했던 제자의 패배에 넋이 나가 있던 굉허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뿔싸.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혹시라도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눈앞이 캄캄했다.
“왜?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상대라면 어린아이라도 무서우십니까?”
비무대 위에 선 어린 녀석이 뻔한 도발을 감행했다.
터무니 없다. 평소였다면 코웃음 거리도 못됐을 일이다. 하지만 가장 믿던 제자가 쓰러졌다. 화산을 이끌 차세대 최고 고수가 종남의 고수에게 패배한 상황이다. 그것도 화산 본산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장에 잡아서 주리를 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여기서 저 꼬마를 상대하겠다고 이대 제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화산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넘어 똥통에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장문인의 시선이 삼대제자들을 스쳤다.
가장 먼저 장광에게 눈이 갔다. 발군의 덩치다. 고작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팔 척의 키가 오촌이나 더 자랐다. 덩치로만 보면 화산 제일이다. 느껴지는 기도 역시 일 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비무대에 선 저 꼬마에 비교하자면 너무나도 부족하다.
뒤이어 자기 사부 곁을 지키기 위해 약당을 향해 달려가는 이준형에게 눈이 닿았다. 마찬가지다. 만약 왼팔의 부상이 없었더라도 가능성은 삼 할 미만이다.
그 외에 다른 제자들 역시 비슷하다. 아니, 차라리 장광 쪽이 그나마 낫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나란히 선 남녀에게 도달했다.
강아현, 그리고 백운호.
어떻게 해야 할까? 강아현? 아니면 여기서 굴욕을 감수하고 일을 맺음 지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백운호를 비무대 위로 올리는 것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재밌는 아이로구나.”
“사······, 사백님?”
대체 언제 그곳에 나타난 것일까?
장내를 압도하는 폭력적인 기도.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권신 청무가 비무대 위, 벽운의 곁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몸이 제법 상한 것 같군. 이거 족히 한 달은 정양을 해야겠구나. 쯧, 비무에서 이긴 녀석이 어째 패배한 녀석보다 더 크게 다쳤누.”
자신의 기세를 감추지 않는 권신 바로 앞에 선 종화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감당할 수 없는 재해를 앞에 둔 생물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어디 보자, 이 녀석은 약당으로 보내면 될 것 같고. 문제는 이제 너로구나. 화산의 무공을 한번 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은데 다 큰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를 어찌한다?”
권신이 잠시 턱을 긁적였다.
“그래, 이러면 되겠구나.”
권신의 시선이 움직였다. 장내 모두의 시선이 권신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하여 그 시선의 끝.
그곳에는 그가 서 있었다.
“어떠냐. 한 번 나서 보지 않겠느냐?”
“사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백운호의 몸이 비무대 위로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