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37화 (37/288)

37화

종남의 검(3)

“황당하다는 표정 짓지 말게. 그건 자네와 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아닌가.”

“우리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해서 재능만 놓고 보면 내가 자네에게 뒤질 건 없었지. 하지만 무공에서 중요한 것이 어디 재능만이던가.”

태을 검선이 담담하게 자신이 권신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고수는 재능만으로는 탄생하지 않는다.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문파의 전폭적인 지원, 이미 앞서 길을 걸었던 선사의 지도가 다 합쳐져도 탄생하기 힘든 게 바로 고수일세.”

“하지만······.”

하지만 검선이 토로하는 그 부족함은 재능이 아니었다.

모든 대단한 고수가 자신에게 필적하는 제자를 키워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똑같은 재능이라면 좋은 사부가 있을 때 그 재능을 개화시키기 더 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직 애송이이던 시절 권신에게는 백운이 있었다.

그래 물론 화산에는 여전히 권신이라는 걸출한 고수가 있다. 하지만 그때와 비교한다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검선은 지금 이리 말하고 있었다.

당시의 종남에는 백운에 비견될만한 고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종남에는 나 태을검선 자명이 있노라고 말이다.

“자네에게는 백운 진인이라는 대단한 분이 계셨네. 게다가 당시 화산은 그분의 지도 아래 정말 파격적인 일들을 감행했었지. 맙소사. 삼대 제자들에게 매화 신단이라니. 당시 우리 종남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파격이었지.”

“하지만 백운 사조님이 안 계신다고 해도 화산은 여전히 화산이네.”

“그래, 시간은 벌써 칠십 년이 흘렀건만 화산은 여전히 그때의 화산이로군.”

검선의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여전히 그때의 화산.’

그리고 그것은 바로 열 달 전, 저기서 검을 휘두르는 맹랑한 녀석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그렇기에 그것은 화산의 권신을 움직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 * *

“사부님, 이거 망한 거 맞죠?”

“그러기에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괜히 되지도 않는 도발 따위는 하지 말라고.”

벽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문에서는 이번 화산행에서 두 가지를 명령했다.

하나는 벽운 자신과 현종의 비무. 그리고 그 제자와 제자의 비무였다.

물론 그 두 가지 명령 중에서 더 중요하고, 가능성도 높은 것은 벽운 자신의 비무 쪽이었다. 애당초 화산의 성향을 생각할 때 삼대 제자 간의 비무를 허락할 리는 만무했으니까.

하지만 망했다.

화산 장문인 굉허는 사실 무공으로 따지자면 화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수준은 아니었다. 당장 화산파 굉자배에서 굉허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고수만 둘이나 된다. 이는 화산이 백운 진인 이후로 장문인을 세움에 무공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무공밖에 모르는 녀석이 한 집단의 수장이 된다면 벌어질 일이야 뻔하겠지.

실제로 화산의 전대 장문인인 청허만 하더라도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권신 청무 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청공이나 청우와 비교해도 반 수는 처진다.

“화산의 장문인은 우리 같은 애송이가 아니라 저기 저 황성의 속 시커먼 늙은 구렁이들을 상대하는 괴ㅁ······ 아니, 사람이다.”

“하지만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비무는 안 시켜줄 것 같았으니,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면 도발이라도 해보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 봐라.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종화가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도 현무 도사님이면 화산의 차세대를 대표하는 고수인데 그 정도면 본산에서도 인정하시지 않을까요?”

“후, 이 멍청한 녀석아. 저쪽에서 현종 도우가 아니라 현무를 내보낸 의도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거야 요즘 가장 이름값이 높은 분이 현종 도사님이니까 굳이 사부님의 이름을 높여 줄 이유가 없다 이거겠죠. 게다가 실제 실력으로 따지자면 현무 도사님이 현종 도사님보다 더 낫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하고요. 뭐, 현무 도사님이면 사부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걸 수도 있겠고······. 사부님은 무른 사람이니까 친구인 현무 도사님을 내세우면 알아서 포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을 수도 있겠네요.”

벽운의 주먹이 종화의 머리를 콩 두들겼다.

“잘났다. 그걸 다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 굳이 거기서 그런 저급한 도발이나 해대고.”

“헤헤, 그래도 뭐 나쁜 결과는 아니잖습니까. 본산에서야 콕 찝어서 현종 도사님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화산에서 오랜 시간 차세대를 대표하는 고수로 밀어준 사람이 현무 도사님이기도 하고요. 설마 진짜 친하니까 좀 그래? 뭐 이런 건 아니시죠?”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니, 그리고 내가 꼭 이긴다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여긴 화산이다. 화산. 이 놈아.”

“에이, 그게 뭐 어때서요.”

“어떻기는!! 화산은 우리 종남에 못지않은 명문이다. 그리고 현무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나라고 어찌 승리를 확신하겠느냐.”

종화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저라고 눈이 없겠습니까? 대충 다 훑어봤습니다. 삼대 제자라고 있는 녀석들은 열댓 명이 달려들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겠더라고요. 그러니 사부님도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대 제자 서넛 정도는 찜쪄먹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부님이 드신 것도 있는데요.”

“어휴, 말이나 못 하면 진짜 밉지나 않지. 하여간, 사조님이 요 녀석 버릇은 다 버려놨다니까.”

“어? 그거 적하 사조님이 사부님한테 매일 하는 말씀이잖아요.”

벽운의 손바닥과 종화의 뒷통수가 사제간의 정을 나눴다.

참으로 화기애애한 사제지간이었다.

* * *

비무대 위.

현무가 물었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가? 무를 겨루고 싶었다면 나에게 조용히 이야기하지 그랬나. 그랬더라면 내가 자네를 찾아갔을 것을.”

“자네 혹시 기억나는가? 우리와 함께 칠룡으로 뽑혔던 백가가 그렇게 뽑히고 고작 이 년 만에 장가를 갔던 일 말일세.”

“그걸 어찌 잊겠나.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그 친구 그거 칠삭둥이라고 박박 우겼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갓 태어난 칠삭둥이 몸무게가 한 관을 넘는다니 말이야.”

“그러니까 말일세. 백가가 시뻘건 얼굴로 칠삭둥이 맞다고 박박 우기던 꼴이라니. 참으로 볼만한 구경거리였지.”

“헌데 백준 그 친구 이야기는 갑자기 왜?”

벽운이 답했다.

“글쎄, 문득 자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나서 말이야. 참으로 그대로야.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세상 모든 것이 자네 얼굴과 같다면 얼마나 좋겠나. 아니 그런가?”

“······.”

“헌데 이 세월이라는 것이 어찌나 빠른지 그때 그 칠삭둥이가 벌써 내후년이면 약관이라더군.”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만.”

“그래, 이십 년일세. 무려 이십 년. 그러니 어쩌겠는가. 자네나 나나 이제 등에 짊어진 것들이 달라졌으니 이럴 수밖에.”

현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는 않을걸세.”

“그거야 그 얼굴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게다가 화산이라니. 그야말로 등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겠군.”

“자네가 등에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 때는 그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지. 오게나.”

벽운의 검이 번뜩였다.

* * *

본래라면 사부와 검술을 수련해야 할 시간이었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건 검선의 검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나 역시 기꺼운 이야기였다. 검선은 강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검의 최고봉이었다.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 비무를 하는 것이 검선 본인이 아닌 검선의 수제자격이라는 벽운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검선의 검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사부와 함께하지는 못했다.

지금 내 옆에서 재잘거리는 강아현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본래 현무 사백님이랑 벽운 도사님이 이십 년 전에는 함께 칠룡으로 꼽히던 분이야. 그리고 당시 칠룡에 꼽혔던 분들 가운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계신 분은 총 넷.”

“그래, 그래. 이십 년 전,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로 꼽히던 분들의 무위가 얼마나 될지는 말들이 많다. 최소한 본산의 장로님들 수준은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게 이렇게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그 이야기는 벌써 열 번도 더 들었어.”

그날, 갑작스러운 방문 이후 강아현은 하루에 한 번씩 모옥을 방문해서는 벽운도사님과 그 제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실 수련이라는 것도 하루 온종일 이어질 수는 없다. 주로 그녀가 방문하는 시간은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빨래나 청소 등을 하는 시간이었고, 가끔 기분이 좋은 날에는 청소나 빨래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아현의 방문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나의 수련이 바빠서 관심을 끊고 있긴 했지만, 검선의 수제자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는데, 강아현은 대체 어디서 그런 소식들을 듣고 오는 것인지 벽운 도사님과 그 제자에 관한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시작한다.”

선수는 벽운 도사였다.

통상적인 검보다 삼 할가량 길고 두꺼운 장검이 묵직하게 움직였다. 그 무게감 때문일까? 동작 자체가 민활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니, 착각이었다. 벽운 도사와 현무 사백의 거리는 약 삼십 보. 하지만 마치 중간에 공간이 삭제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몸이 현무 사백 앞에 나타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현무 사백의 양손, 아니 양팔. 아니 양팔을 넘어 전신으로 보랏빛 기운이 아지렁이처럼 일렁였다.

-쾅!!

기운과 기운의 충돌이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폐부가 떨려올만큼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벽운 도사가 휘두르는 검이 현무 사백의 몸을 노렸다.

분명 그 시작은 느릿하고 묵직했다. 하지만 처음 그의 동작처럼 그 중간 과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작과 결과만이 존재할 뿐, 과정이 빠진 것 같은 기묘한 검술이다.

반면 그것을 상대하는 현무 사백의 동작들은 그 대부분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정직했다.

물론 보통 무공에서 정직함은 절대 칭찬이 아니다. 오히려 흠집에 가깝다. 하지만 이 순간 현무 사백이 보여주는 그 정직함은 흠이라고 볼 수 없었다.

우공이산이라고 했다.

사실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대체 어느 멍청한 사람이 산을 옮긴단 말인가. 하지만 현대 화산의 기틀을 잡으셨던 백운 태사조님의 가르침은 그와 같았다.

삼십 년을 넘는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결같이 연마한 무공이 오롯하게 펼쳐졌다. -쾅쾅쾅 손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라고 믿기 힘든 굉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팽팽한 싸움.

“승부는 끝났어.”

강아현이 단언했다.

“물론 지금 수세에 몰린 건 사백님이지만 글쎄. 사백님의 자하기공에는 흔들림이 없어. 그리고 이대로 장기전이 돼서 내공 싸움으로 가면 벽운 도사님은 절대 사백님을 이길 수 없지. 뭐,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여기가 화산이 아니었다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

강아현의 말처럼 벽운 도사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백님의 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몸을 감싼 자색빛 기운이 점점 더 진해지는 느낌이다.

만약 이곳이 화산이 아닌 종남이었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은 화산이다. 화산의 기운에는 화산의 기공이 가장 어울린다. 비록 그 차이가 결정적 격차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저만한 고수들 사이에서 그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법이다.

그 사이 사백의 몸을 둘러싼 자색빛 기운이 점점 진해졌다. 이제는 아지랑이 수준을 넘어 제법 또렷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그의 주먹이 벽운 도사의 도관을 박살 냈다.

강아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종남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리고 그 순간.

벽운 도사가 강아현의 의문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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